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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이 / 집단적 욕망에 의해 구축된 질서

이선영

집단적 욕망에 의해 구축된 질서

  

이선영(미술평론가)


장지에 연필 등으로 섬세하게 그린 ‘주택단지’(전시부제) 전의 작품들은 ‘동양화’지만, 그리드 구조에 기대어 여러 층과 겹으로 그려진 반듯한 형태들이 가상현실 이미지와도 유사하다. 작품의 소재가 옛것이든 아니든 그것이 구조화되는 단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3D 프린터 등, 정보를 물질화하는 방식도 발전을 거듭하여 현실과 가상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여전히 화가에게는 아날로그 필기구가 디지털 방식보다 자유롭다. 하지만 유한이 전에는 가구회사와 협업한 또 다른 작품으로 작가가 그린 이미지가 현실 속에 서 있기도 하다. 건축 설계 도면을 떠올리는 구조들에는 차원의 변주에 대한 가능성이 잠재한다. 유한이가 다루는 구조는 추상적인 알고리즘 등이 아니라, 인간의 연장인 집이다. ‘주택단지’ 전의 작품 속 구조들은 현실로부터 왔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택은 단지 건축의 문제이기보다는 사회적 차원을 가진다. 집에 관한 한 누구든 감정의 무게들이 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는 겉모습과 내부 구조까지 연동되어 이해될 정도로 분석적으로 표현된 유형들이 전개된다. 작품은 작가가 수없이 접어 넣은 층위들 만큼이나 은유의 층도 두텁다. 백 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나라처럼 급격하게 주거 관련 환경이 바뀐 곳이 있을까. 한국 전쟁 이후 폐허에서 시작한, 제로베이스의 지점이 이러한 변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개발 또는 발전이라고 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속도전이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의 삶의 질을 함께 ‘발전’시켰는지는 의문에 부쳐진다. 포스트모던 국면에서 거리를 두고 근대를 보면 더욱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건축 부문에서 매우 활발했던 것은 우리 삶에서의 건축의 영향력을 알려준다. 삶에서 변화란 불가피하지만, 급속도의 변화는 획일성을 강요한다. 속도전의 전제 조건은 동질성이다. 삶의 안정적인 자리가 되어야 할 집 또한 가속화되는 시간의 주기 속에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2009_장지에 연필,채색_60.5x60.5cm_2022



붉은 벽돌로 두른 칸_장지에 연필, 채색_194x130cm_2022



깊숙한 칸_장지에 연필, 채색_194x130cm_2022 



옥색 타일이 깔린 칸_장지에 연필, 채색_194x130cm_2022



유한이의 작품은 그 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전후의 맥락이 드러날 수 있는 단면을 택함으로, 공시성은 통시성을 내포하게 된다. 이 전시가 열리는 목동의 풍경을 포함하여 어릴 때부터 아파트에서 살았으며, 대규모로 재개발되는 도시로의 이주를 통해 그러한 변화를 체감해 온 작가가 서 있는 좌표부터 시작한다. 2018년 성남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은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나뉜 성남의 사회적 풍경을 주제로 했으며, 이번 전시에서도 성남 관련 작품이 몇 점 포함된다. 아파트, 연립주택, 개별가옥 등 여러 종류가 등장하지만, 바탕에는 미세한 선들이 깔려있고, 이를 바탕으로 대상이 그려지는 점은 공통적이다. 모눈은 특별한 중심이 없이 중성적인 바탕을 이루며, 사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확장성을 가진다. 좌표 위에 얹혀진 집들은 화면 바깥으로 연장되는 듯하다. 하나의 모델이 정해지면 생산성은 극대화된다. 신도시 모델을 외국으로 통째로 수출도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모눈종이가 아니라 장지 위에 연필로 직접 그리는 선은 좌표가 이미 주어진 것은 아님을 말한다. 작가는 여러 좌표계 중에서 수직 수평이 교차되는 특정 좌표계를 선택한다. 이 좌표 속에서 동일성과 차이가 가늠된다. 작가는 장지 위에 연필로 하나하나 긋는 과정에서 선의 느낌이 작품마다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모눈은 종종 지워져 있다. 물신숭배적 욕망의 대상이 된 주택들 주변의 광휘는 모눈들을 지워버린다. 아니 그것은 집단의 욕망에 의해 녹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모눈이 필요할 만큼 합을 맞춘 군더더기 없는 형태들은 실제가 아니면서도 실제의 느낌을 전달한다. 사회학자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의 공동저서 [기호와 공간의 경제]는 근대적 공간을 격자와 비교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근대는 수평적으로는 기하학적 도로 계획이, 수직적으로는 국제양식의 고층 건물이 만들어낸 격자화 된 도시의 추상적이고 부호화된 공간이다. 하지만 격자는 실체가 아닌 관계망일 따름이다. 




1단지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94.8x130.3cm



2 단지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94.8x130.3cm



실체는 점점 비워져 텅 비게 된다.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전통과 근대의 차이를 이해하는 잣대가 된다. 실체적이지 않은 격자구조는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나가기 위한 공간이다.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 의하면 격자처럼 추상화되어 있는 근대의 시공간은 시장에 의해 추동된다. 시장이 일국적 공간으로, 다시 국제적 공간으로 뻗어나가려면 이 시공간이 추상되어야 할 뿐 아니라, 이 속을 순환하는 객체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격자를 통해서 노동, 자본, 기호가 흐른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이러한 격자구조에서 근대의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본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에서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계획적 조정을 통한 공간의 분절화를 말한다. 하비는 포드의 생산시스템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시간이 공간화됨으로서 사회적 과정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하비는 갈수록 동질적이면서도 분절화 되어 가는 근대적 세계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의 상징이기도 한 바우하우스의 통찰력은 형태가 기능뿐 아니라 이윤을 따른다는 법칙과 관련된다. 그리드에서 파생된 사각 공간은 가장 경제적으로 무엇인가를 쟁여 넣을 수 있으며, 감시되고 조절가능한 체계가 되어 집부터 공장, 학교, 회사, 감옥에 이르기까지 편재하는 구조가 된다. 작가는 숨겨진 질서를 드러냄으로서 그 질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들은 이러한 수직/수평의 축으로부터 구축되고 변형되는 것들을 다룬다. 작품 속 구조는 대부분 집이나 아파트지만, 완성형은 아니다. 작가는 특정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작품 속 주택단지들은 자세하면서도 자세하지 않은 것이다. 작가가 현실 속에서 추출한 구조는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배치되고 공간들 사이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듯하다. 섬세한 그리드에 맞춰 그려지는 건축적 형태는 일련의 구조적 단위가 조합되는 모습이다. 조합은 재구성이나 해체의 과정이다. 




3단지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94.8x130.3cm



4단지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94.8x130.3cm



5단지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 60x120cm



레고블럭 같은 형태는 집, 마을, 대단지로 확장된다. 현실 속에서 이러한 과정은 사회 구성원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지만, 작가는 그에 상응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조형적 과정에 투사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집이기 보다는 생산/소비되는 상품처럼 보이는 구조물의 양상을 강조한다. 곱게 포장된 색감이 그렇다. 작가는 집의 구조가 시대의 사회적 공간 의식을 담는다고 말한다. 틀 지워진 공간에서 개인사가 펼쳐진다. 구조로 결정화되거나 구조를 변경하는 힘은 구조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온다. 삶 또한 구조에 영향받는다. 양자는 물고 물리는 관계지만 구조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서 구조 자체가 현실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자기지시적 속성은 근대의 예술인 모더니즘에도 선명하다.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현실은 자명하지 않다. 이 전시에도 나온 외할머니 집의 사라짐은 우리 삶의 토대가 대지같은 실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황을 말한다. 


개인의 삶은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서나 호명될 것이다. 작가에게 외할머니 집은 언제라도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었을 것이다. 마치 자연처럼 말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도시가 항상 세계상이듯이 집은 소우주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집은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낙원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싶어하는 바램, 요컨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여 신의 조건을 회복하려는 바램’(엘리아데)이다. 기억으로 재구성한 할머니 집은 구름도 보이고 마당의 식물도 있었다. 물론 그 집도 요즘의 대세가 된 주택 양식에 비해 전통과 가깝다는 것이지 그 또한 근대적 변형이다. 하지만 그 집에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잠재적 공간, 즉 현실과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앞서 인용한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이러한 잠재적 공간이 점차 사라진다고 말한다. 




주택1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64x63cm



주택2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64x63cm



전통적 상징이 사라진 현대에 사람들은 현실과 보다 직접 맞닿아있다. 그에 따른 고독과 소외, 상처와 고통은 모더니즘 작품들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기호와 공간의 경제]는 사회학자 안토니 기든스를 인용하면서, 자아의 성찰적 기획은 ‘매일 매일의 삶을 관통하고 고정된 행위지침이 아니라 다수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추상적 체계’의 매개를 통해 나아간다고 지적한다. 이 추상적 체계는 매우 계산적이다. 환경의 저항을 이겨내고 생존해야 하는 인간은 그 어느 때고 계산적이었지만, 현대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많은 부분이 계산화 된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유한이의 작품 속 그리드처럼 편재한다. 그리드같은 체계가 지배적일수록 땅같은 실재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한국의 지배적인 주택의 양식이 아파트가 되고있는 상황에서, 대지에 대한 지분은 점점 줄어든다. 말 그대로 우리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집이 놓인 자연스러운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그리드는 추상적 좌표를 말한다. 


그러한 좌표는 한 개인의 상황을 즉각적으로 알려주는 기표로 작용한다. 유한이의 작품에서 인간적 삶은 구조로 대치된다. 현실로부터 출발한 작품에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무한 복제 중인 구조들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기도 하다. 아파트뿐 아니라 1950-60년대에 지어진 집단주택이나 이후의 연립주택 또한 ‘주택단지’라는 전시 부제에 포괄된다. 어눌한 글자체로 표기된 ‘주택단지’는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이 전시에는 1950년대 무렵에 지어진 ‘재건주택’, ‘희망주택’, ‘국민주택’을 소재로 한 작품도 등장한다. 당시의 설계 도면들까지 입수하여 작업한 분석적인 작품들은 삶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하다. 작가는 ‘개인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변형하는 개인의 삶, 혹은 개인이 속한 시대 상황의 상호작용에 의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끊임없이 재구축 된다’고 말한다. 




주택3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64x63cm



주택4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64x63cm



주택5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64x63cm



주택6_2023_장지에 연필, 채색_64x63cm



유한이에게 건축은 삶과 구조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중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하나의 사회 전체를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고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구축주의(constructivism)라고 부른다. 미술사에서 이 사조는 1920년대를 지배했다. 혁명기 러시아에서는 생산주의로, 유럽에서는 기능주의로 나타났고 회화나 조각은 지양의 대상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이 입장의 철학적 원조는 데카르트다. 근대를 시작한 데카르트적 좌표체계에서 공간은 무한히 연장된다. 가라타니 고진는 인간 사회의 구축을 역설하는 거대 서사로 이해되는 모더니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겨냥한다. 그의 결론은 견고한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의지는 토대의 견실함이 아닌 그 부재를 드러낸다는 역설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서구 사상에서 위기 때마다 새로워지는 건축에의 의지를 지적하면서, 이 의지는 혼돈스럽고 다양한 생성 속에서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려는 비합리적 선택이라고 본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구조는 현실이 아니라 스스로만을 지시하는 자기지시적 형식체계가 되는데, 이러한 자기 지시적 형식체계는 균형 잡혀있지 않으며 초과적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엄격하게 자기 지시성을 억제함으로서 균형 잡힌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바닥이 없다’(하이데거) 유한이의 작품 속에 지워지지 않은 채 드러난 이 근대적 체계는 바닥없음과 짝을 이룬다. 작가는 이 체계를 ‘훼손’하기도 한다. 이러한 추상적 바탕은 유한이의 작품이 개념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흔한 것일수록 파괴도 전면적이다.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평면도나 입면도 같은 자료들까지 조사한 이유다. 선과 형태란 정확성을 추구한다. 집 또한 상품처럼 규격화된 방식을 통해 경제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전후 폐허에서 시작될 때부터 ‘아파트 공화국’의 씨앗은 있었던 셈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세계대전 이후 국제양식이라고 불리는 모더니즘 건축이 대세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165번길2019pencil and pigment on korean paper,111x70.8cm



98번길, 2019, 92x84cm, pencil and pigment on korean paper,



유한이의 작품 속 주택들은 낡은 모델을 가지든 아니든, 도면같은 면모가 있다. 하지만 건설 중인지 해체 중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단계는 일종의 폐허이다. 모든 것의 이 영속하지 않음을 한탄하며 무너져 내리는 건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반어법적으로 폐허이다. 견고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즉 근대적 경험은 외할머니집으로 대변되는 오래된 주택에서 왔다. 그 집은 외할머니의 삶과 더불어 여러 번 개보수가 이루어진 곳이다. 작가는 ‘경기도 화성 외딴 마을에 있던 외할머니댁은 성년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휴식처이자 도피처’였다고 하면서, ‘우리의 다난했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은 외할머니의 삶의 흔적들을 더듬어보고, 재구성하여 남겨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외할머니집을 모델로 한 작품 [2009](2022)은 중정이 있는 한옥의 구조를 위에서 본 모습으로, 배경 일부의 식물은 자연과 공존했던 한옥을 암시한다. 


작가는 마당을 가득 채웠던 장미 덩굴을 기억하면서, 여름의 ‘구름, 공기, 색감’을 담았다. 3개의 화면으로 그려진 한옥의 구조를 투시적으로 표현한 작품 [붉은 벽돌로 두른 칸](2022)에도 배경에 옅게 그려진 구름과 식물이 보인다. 하지만 그조차도 도면같은 양식의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뜻했던 외할머니 집에 대한 추억과 감상은 그 또한 몇십년 전에 대중적이었을 집단적 양식에 근거한다. 또한 그 집이 현재는 대단지로 완전히 재구조화되고 있는 경기도 화성에 자리한다는 점도 변화에 대한 폭을 가늠케 한다. 집에 대한 작가의 발언은 형태보다는 색으로 나타난다.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구조들은 희망과 다양성을 상징하면서 금방 사라지는 신기루 같다. 무지개색 뿐 아니라 대개 엷게 처리된 색감은 허구적 느낌을 강조한다. 반대로 드러나지 않아야 할 그리드는 눈에 띈다. 그것은 계획이며, 그것에 투사된 희망사항이다. 이는 집뿐 아니라 모든 상품의 형식에 아로새겨져 있는 기대치다. 




긴골목_2021_45.5x53cm_장지에 연필, 채색



각각의 방_종이에 필름_각 53X45.5cm_2017



마주보는 계단_104X110cm, 장지에 연필, 채색, 2017.



대부분 그 기대치는 허구적이기 때문에 욕망은 계속된다. 집처럼 덩어리가 큰 상품 또한 광란적인 소비의 주기에 포함되며, 삶의 근간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다. 유한이의 작품 소재뿐 아니라 형식, 즉 동양화 재료로 평면에 공간을 표현하는 것은 역사적 선례가 있다. 작가는 송대에 정밀한 건축 그림의 예를 든다. 그것은 왕실이 주도한 사실주의 양식으로, 자대고 그리는 기록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동양화의 기준에서 그런 형식은 예술성보다는 기록적 의미가 강했다. 서양미술사에서 근대에 부상한 풍경화가 중산층의 땅 소유에 대한 증빙 같은 성격을 지녔다는 해석과도 상통한다, 지도 제작과 유사한 방식으로 전망에 대한 지배의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1, 2, 3...N 단지라는 제목을 2023년에 제작된 주택단지는 ‘표준적인 희망’이 투사되어 있다. 시리즈 형식의 작품에 단지수로 명명한 제목이 풍자적이다. 작가의 개인적 흔적인 붓터치를 숨기는 만큼이나 제목 또한 익명적이다. 


작품 [1단지]는 아파트가 그렇듯이 같은 구조들이며, 무지갯빛 색감은 미래의 집에 대한 기대치를 표현한다. 작품 [2단지]에서 전경과 원경에 걸쳐있는 주택들은 무한의 일부같다. [3단지]는 어느 작품보다도 건축의 밀도가 높다. [4단지]에서 다소간 여유 공간이 있는 단지의 배경은 빛나고 있다. 빛은 무지개 색감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5단지]에서 건물이 놓인 배경의 아치형 또한 풍자적이다. 경쟁을 뚫고 입주만 한다면 곧 도래할 유토피아의 무대가 될 것이다. 2023년에 그려진 주택들은 일련번호가 붙어있는 열린 시리즈이다. [주택1]은 1층 주택으로 지붕의 표현은 없지만, 기와나 슬레이트가 얹어져 있었을 것이다. 집의 원형처럼도 보이지만 이 또한 공중 부양의 상태다. 집은 근대 이후 대지에 결코 뿌리 내리지 않는다. [주택4,5] 는 집에 대한 환상과 좀 더 가까이 있는 다채로움이 있다. 바깥으로 열린 공간이 많은 [주택6]은 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당시의 상가같은 모습이다, 




이사, 2019, 150×240cm, 장지에 연필, 채색



이사, 2019, 162×130cm, 장지에 연필, 채색



2019년에 발표된 성남 소재의 작품들은 1993년 이곳으로 이사 온 이래, 작가가 살고 있는 곳이라 더욱 구체적이다. 작가는 이사 올 당시의 황량했던 분당을 기억한다. 작가는 ‘매끈하고 황량하고 비어있는’ 도시가 좋았다. 하지만 이후 25년의 변화는 한국의 많은 도시에서 발견되는 구도심/신도심의 대조를 포함하여, 그곳을 (재)개발 공화국의 한 모델로 보기에 충분했다. 작품 [이사](2019)는 비록 주어가 빠졌지만,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개인적 경험과 밀접하다. 넓은 들판에 거의 사실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아파트 단지의 색감은 보라다. 이 또한 다른 작품에서의 무지개빛 처럼 희망적일 것이다. 하지만 매우 옅게 칠해진 풍경은 그것의 현실성을 삭감한다. 투시도나 입면도를 넘어서 꽤 사실적인 풍경이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무인지경이며, 계절도 장소도 특정하기 힘들다. 이사가 과거의 일이었다면 주변은 이미 같은 형식의 건물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유한이의 작품에서 집단주택이든 단독주택이든 그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성남 구도심에서 눈여겨 봐뒀던 주택이 어느 날 사라져 있었다는, 그래서 인터넷 지도의 로드뷰에서 찾아내어 완성했을 정도로 변화가 빠른 곳이다. 작가는 이전 시대의 기록을 참조하지만, 후대의 누군가는 작품에서 시대의 기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 [98번길](2019)에서 주택의 창, 문, 방, 그리고 계단까지를 유추할 수 있는 반투명의 건축/구조물은 어떤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붉은 벽돌집이었을 것이다. 작품 [긴 골목](2021)의 동네는 너무 똑같고 밀집되어 있어서 잘못 들어가면 헤맬 것 같다. 현대적 삶이 투명한 감옥인 것처럼 투명한 미로다. 작가는 녹색으로 방수 처리된 옥상과 붉은 벽으로 어떤 지역에 가득한 집들을 표현했다. 작품들은 외할머니집이나 자신이 사는 동네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단편이라 할만한 곳에 대한 광범한 조사와 관심을 바탕으로 한다. 




입구_2019_33.4x53cm_장지에 연필, 채색



로운갤러리 설치전경, 장지에 연필, 채색_각 194x130cm_2022.



2017년 작가는 ‘낮고 높고 좁은 방’이라는 가리봉동을 주제로 한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산업화시기에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표현했다. 그때의 작품들은 작가가 그곳에서 보았던 ‘과거의 여공들, 지금의 이주 노동자들, 그 사이에서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편재한 단절, 외로움, 고단함, 보장받지 못하는 희망’을 표현했다. 작품 [각각의 방](2017)은 집의 설계 도면에서 방 한 칸을 떼어낸 것 같은 형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딱 방 한 칸 정도만이 그의 공간일 수 있다. 각기 다른 색인 시리즈는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기대치를 담는다. 밀집된 주택단지들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계단은 필시 난감함을 자아냈을 것이다. 구조는 인간들을 서로 멀어지게 하고 구조에 의지하게 한다. 작품 [마주 보는 계단](2017)은 같은 구조의 산물들이지만 공동체와는 무관하다는 냉정한 현실이 반영된다. 그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한 말이다.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리드에 바탕 한 구조들은 우리의 근현대를 압축해서 재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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