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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그 가운데에서의 여성 예술가

이선영

경계, 그 가운데에서의 여성 예술가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기; 여성에게 경계는?


갤러리 부연에서 지난 5월에 열린 ‘경계 여성’ 전은 사진, 영상, 오브제, 회화 등 다양한 매체가 전시되어 있다는 점뿐 아니라, 한 작가에게도 그만큼의 다양한 매체의 운용이 있다.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지만 잡다(雜多)할 수도 있다. 양자의 관계는 한끝 차이다. [여성 서사와 매체 연구]라는 주제 아래 이론적인 공부 또한 치열하게 했기 때문에 학제적이면서도, 가사노동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조건에서 야기된 잡다함이다. 매체나 형식의 문제를 넘어서 ‘경계’를 성별과 연결시키는 순간, 전시 이슈는 더 뜨거워진다. 여성은 명확히 분류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비공식 부문’에서 행해왔지만, 이러한 방식은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의 영역으로 감춰져 있다. 예술 또한 대체로 그림자 노동에 속하기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은 여러 겹의 소외에 직면한다. 하지만 예술이 삶에 뿌리를 둔 다양한 기원을 체감하는 이들의 작업은 우회로를 통해서지만 예술의 본질과 만나게 한다.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모두 여성이다. 경계에 관련된 주제는 결코 여성 전용은 아니지만, 경계를 확연히 느끼는 이들만이 이것을 내적인 문제로 끌어안을 수 있다. 




갤러리 부연 전시전경



예술은 한 다리 건너는 문제에 왈가왈부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가장 기본적인 경계인 몸’, ‘그래서 질서의 기준이 되는’(메리 더글라스) 경계는 투명하지 않으며, 이 전시에서 작가의 성 뿐 아니라 구체적 작품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전시는 페미니즘이라는 익숙한 용어에는 안주하고 싶지 않지만, 굳이 부정할 수도 없는 종합적 실천의 결과이기도 하다. ‘경계 여성’ 전(기획; 민경, 이정훈)은 ‘경계, 그 가운데에서의 여성 예술가’의 줄임말로, 여성이 경계 위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남성/여성으로 깔끔하게 나뉘는 관념적 범주의 하나인 여성이 아니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그러한 구분 자체가 와해 되는 존재, 또는 상태가 바로 여성임을 자각한다. 경계 위의 존재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시각 이미지로 치면 여러 종이 얼기설기 결합 된 괴물같은 존재다. 태도로 치면 하나에서 끝을 보지 못한 의지력 약한 이들이며, 삶과 냉정하게 거리를 두지 못한 아마추어들이다. 괴물이 하나의 종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순수하지 않다. 자율성의 결과물이자 조건인 순수는 근대 이후 현대예술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다른 분야만큼의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삶이라는 뿌리를 제거한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수많은 배제를 낳았다는 점은 여성을 비롯한 타자화된 존재들의 약진을 통해 드러났다. 물론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리얼리즘’이라는 조류가 있었지만, 모더니즘의 파편성을 종합한다는 총체적 관점 역시 한계가 있다. 하나는 현대사회의 분열적 조건에 순응하고, 다른 하나는 관념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미학사를 점령했던 격렬한 대립만큼의 큰 차이는 없었다. 심지어 양자는 이항대립을 이루면서 현실적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여성들은 파편화된 현대적 삶의 조건 또한 억압적임을 인식하고 분리된 것을 연결하려 하지만, 더 이상 이전 시대의 종교나 리얼리즘처럼 총체적 비전을 가질 수 없는 시대다. 여성들의 어법은 집합(Assemblage)적이다. 집합적인 것은 유기체적 질서에 기반한 총체성의 비전에 비해 그 연결망이 가변적이다. 현대문화의 키워드로 부각된 개념으로 리좀이나 유목을 과 비슷하다. 여성주의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를 대안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물론 이때의 유목은 유유자적한 초월적 행위가 아니라 경계를 날카롭게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다. 타자들이 근현대의 사회적 규범 보다는 더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감으로서 자신들을 배제하는 분류체계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생산력이 발전된다고 그만큼 타자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커질 수 있다. 삶의 여러 교란적인 요소와 무관하지 않은 원초적 혼돈은 작업의 시작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괴물 탄생의 배경을 원초적 혼돈으로 묘사한다. 신화 도입부에서는 흔히 밤과 낮이 뒤섞여 있고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하며, 신들과 사람들, 짐승들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없다. 원초적인 무 차별화, 원래의 카오스는 심한 갈등의 성격을 가진다. 경계 위의 존재가 바로 괴물이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순수와 위험; 오염과 금기의 분석]에서 분류체계는 반드시 비이례적인 것을 낳으며, 모든 문화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반항하는 사건들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비정상은 주어진 체계 장치나 계열에 일치하지 않는 요소이다. 


하지만 메리 더글러스는 애매모호한 것을 직면하는 일이 늘 불쾌한 경험은 아니며, 예술의 풍요로움은 애매함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경계 위반자는 위험과 능력을 동시에 가진다. 메리 더글라스는 많은 인류학적 조사를 통해서 한 상태를 떠나서 다른 상태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부정한 자)은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고 그 위험을 타인에게 끼친다고 본다. 명확한 범주에 속하지 않은 경계선 상에 놓여있는 존재는 부정하며 금기시 된다. 경계선이 불확실한 곳에서는 언제든지 오염의 관념이 출현한다. 하지만 경계선 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과 접촉하는 것이고 능력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수시로 행하는 범주의 위반은 혼돈의 영역으로 모험에 해당된다. 모험을 위한 모험이 아니라 경계 안에 안주해 있던 이들, 가령 ‘이성과 사회의 통제 안에 있던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을 갖고 귀환’(메리 더글러스)하는 것이다. 누군가 타자를 만드는 경계는 쉽게 전복되지 않는다. 경계 내부에 있는 기득권자는 경계를 인식조차 못한다. 


경계는 위반될 때, 위반될 수 밖에 없을 때 비로소 의식된다. 예술이 자율화되기 전에 이러한 위반의 의식이 주로 이루어지던 분야는 종교였다. 희생양의 신화나 샤머니즘, 통과의례 같은 동서고금의 의례적 전통에서 행해지던 경계의 위반은 기존 사회를 더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했지만, 결국 인간의 역사가 변화한 것을 보면, 되돌아온 질서는 원점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중심을 조금씩 변형시키는 영원한 회귀의 여정이다. 여성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사회는 분업화되었지만, 각자의 생산물은 공평하게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적 작업 또한 혼돈에서 또다른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때 경계 위의 존재는 경계를 변형시켜 나간다. 또 다른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분류의 원리에서 미리 결정된 공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분류가 정지하는 것은 갈 곳까지 다 간 후 완전히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정지하며, 고유명사는 언제나 분류의 끝에 머문다. 경계 위의 여성작가들은 여성 일반, 예술 일반이 아니라 고유명사를 창출하고자 한다. 


   

1. 김박현정



김박현정, 페인터#105, 2020, Archival Pigment print, 50x70cm



김박현정, 유리와바다, 2023, Archival Pigment print, 33.4x24.2cm



김박현정, 유리와바다, 2023, Archival Pigment print, 90.9x72.7cm


김박현정의 최근작 [유리와 바다] 시리즈는 연한 색조의 화면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길이의 수직선들이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작품의 매끄러운 표면만이 그것이 사진일 수 있음을 말한다. 여러 사진적 단계를 거치면서 사진의 인덱스적 특성은 희미해진다.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면서 원래의 출발점은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원본과 최종 산물과의 거리는 유리와 바다 사이만큼이나 무한히 늘어진다. 이번 전시의 작품의 경우 작업을 시작한 최초의 사진조차도 타인의 것을 활용했다. ‘유리와 바다’라는 소재는 ‘사진에서의 렌즈’와 ‘빛의 반영(물결)’이나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말한다. 구체적인 사물처럼 제시되었지만, 사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은 바다처럼 무한하다. 김박현정의 작품은 지시 대상이 없이 조형 언어로만 이루어진 추상회화와 다를 바 없다. 장르 구별이 와해 된 현대예술에서 그것이 사진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리와 바다]라는 제목은 전혀 다른 두 양태를 연결한다. 추상회화같은 사진을 입체화시킨 작품 [페인터#105]는 수수께끼에 수수께끼를 더한다. 환영과 관련된 평면은 실재에 대한 지향이 있다. 


작품은 환영, 즉 현실의 반영이나 그림자를 넘어서 현실 공간에서 서 있고 싶어한다. 자연보다 인공이 대세인 현대 문명에서 출발점이 불확실한 것들이 현실을 잠식한다. 사각기둥이라는 굳건한 형태에 붙여진 ‘페인터’라는 제목은 사진 또한 추상회화처럼 자유롭게 현실성을 인정받기를 바란다. 작가는 스스로를 ‘오퍼레이터, 페인터, 에디터(Operator, Painter, Editor)’로 규정한다.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역할이다. 페인터의 역할은 ‘원본 이미지를 팔레트에 짜인 물감처럼 사용해 이미지를 제작’하는 것에 있다. 이를 또 편집하는 과정은 무엇으로부터 출발해도 결정되지 않은 작품의 특성을 만든다. 사진은 지시 대상에 고정된 매체가 아니라 변화무쌍해진다. 사실, 사진은 그 출발부터 세계에 대한 탐사와 수집에 용이한 매체였다. 사진은 출발 당시에 경쟁했던 회화와 비교가 안될 만큼의 경쟁력을 가졌고, 이후 기술의 가속적 발전은 그 거리를 더욱 벌렸다. 사진이 회화를 흉내 내려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후 각자의 매체 순수성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다시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가 왔다. 김박현정의 작업에는 사진이 오락거리로 대중화된 시대에 예술로서의 사진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2. 김재연



김재연, 달과 달, 2023, Archival Pigment print, 21x29.7cm



김재연, 얕은 신호, 2023, Archival Pigment print, 13x20cm



김재연, 우리가 이렇게 떨어진다면, 2023, Archival Pigment print, 42x29.7cm


작가는 이 전시의 작품들에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편리함을 좇는 현대인에게 과거의 매체가 된 필름 카메라는 기술 이상을 요구하는 예술 부분에서 자기 자리를 찾곤 한다. 촬영부터 인화까지 정밀해야 할 사진적 과정은 예견치 못한 실수가 언제든지 끼어들 수 있다. 식물을 비롯한 자연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은 사진에 대한 기대치를 배반하고 실패한 것처럼 모호하다. 대개 자연을 찍는 이는 피사체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재현하려 한다. 이러한 방식은 재현을 통한 대상의 이해와 가상적 소유, 또는 소비에 대한 지향이 있다. 작가는 사진에 투사된 이러한 가정에 회의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대상은커녕, 검은 의상에 떨어진 비듬이나 먼지 같이 오염의 느낌이 있다. 어두운 바탕에 가느다란 하얀 선은 [깊고 푸른 숲]이라는 제목에 힘입어 유기적 형태를 연상시킨다. 회화와는 다른, 사진적 확실성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어둠 속 가느다란 선은 빛의 느낌을 보전하며, ‘빛으로 그린 그림’인 사진의 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 [달과 달]에서 검은 바탕의 밝은 얼룩은 달로 생각되며 선은 천체의 주기적 운동같이 보여진다. 


하늘의 중심으로 자처하는 태양과 달리, 주기적으로 변신하는 달은 여성적 상징이다. 달은 여성의 생체리듬과 바닷물같이 자연적 매개고리가 된다. 최소한의 흔적만으로 작가는 여성의 우주를 이야기한다. [세 개의 조약돌]을 다른 작품(달과 달)과 관련지어 보면, 둥근 형태들은 조약돌이자 달일 것이다. 멀리서 보니까 빛이지, 달도 일종의 돌이다. 작은 것과 큰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타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김재연의 ‘만들어진 사진’은 최초의 지시 대상을 여러 겹의 괄호로 치고 관객의 추리와 상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여느 사진처럼 쉽게 소비 또는 소통되지 않는다. 대상보다는 대상에서 발산되는 기호에 대한 해석이 중시된다. [얕은 신호]는 밝은 선이나 얼룩은 크기의 차이 때문에 추상적인 원근감이 있다. 작게 프린트된 작품이지만 공간은 깊다. 심리테스트 얼룩같은 형상은 제목이 의미의 방향타가 되어준다. 작품 [우리가 이렇게 떨어진다면]에서 화분과 식물을 떠올리는 실루엣은 이식되어 입지가 좁아진 어떤 생명에 대한 공감이다. 작가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이번 전시 작품들에 대해 ‘우주의 먼지, 밤의 자국 같은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3. 남경순



Can I try to film a little scene_남경순_2023, 컬러, 유성, 5분 54초



Can I try to film a little scene(2)_남경순_, 2023, 컬러, 유성, 5분 54초


작품 제목 [Can I try to film? a little scene]은 영상이 희귀했던 시대를 소재로 하기에 자명한 질문 같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 예술가의 질문이라면 또다른 울림을 가진다. 페미니즘 미술에 영향력이 있었던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1971)는 출간 이후 숨겨진 여성 미술가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린다 노클린의 분석 중 하나는 여성이 미술인이 되기 위해 당시 아카데미 과정에 필수적인 누드 수업의 훈련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간촐하게 붓으로 그리는 그림도 그럴진대, 당시에 첨단 매체였을 기계들, 그리고 투자 및 배포와 관련된 사업인 영화는 오죽했겠는가. 그 점은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유튜브에도 제한적으로 공개되었지만 조회수가 많지 않다. 남경순의 작품은 영상 범람의 시대에도 여전히 관심 밖에 있는 여성 영화인의 자료에 기반한다. 작품 출처들에는 19세기 말의 희귀 영상들이 포함된다. 영화사 속에 여성을 자리매김하려는 작가는 의도는 뤼미에르 형제의 기록영화 도착하는 기차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작품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인 알리스 기 블라쉐(1873-1968)는 1896년에서 1920년까지 천여편의 영화를 제작한 최초의 여성 감독이었지만, 공식 부분에서 기록을 찾기 힘들었다. 


남경순은 여러자료들을 편집하여 여성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작품에는 무용이나 코미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화려하면서도 활달한 모습은 물론 영화적 실험들도 나온다. 여성의 정치적 목소리를 사이사이에 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거리에서의 시위나 법정 투쟁의 장면들이 그러하다. 후반으로 갈수록 여성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 드러난다. 키스에 의해 수염 털이 옮긴 코미디부터 말같이 채찍질 당하고 학대당하는 여성까지. 아늑해 보이는 가정 내 중산층 여성 또한 고통받는다. 하지만 여성은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여성이 주도적으로 남성에게 애정을 표현하거나 담배, 술, 고기 등을 먹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 모두가 여성에게는 금기시된 것이다. 알리스 기 블라쉐의 작품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같은 존재 또한 욕망이 있음을 알려준다. 맞딱뜨린 남성에게 총을 겨눠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소녀나 불타는 집 등은 당대의 상징적 우주에 대한 반란이다. 남경순은 유명한 남성 작가의 영상에서 반(反) 여성성을 읽기도 한다. 여성의 눈이 칼로 도려내지는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품이 그것이다. 남성의 거세 콤플렉스와 관련되는, 무엇인가 도려내지는 대상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여성 영화인 다각적인 면모는 우리가 그녀를 기억해야 함을 말한다. 

  


4. 김수진








김수진, 닿기위한 행동, 2023, 채집된 부산물과 사물들, 135x35x185cm


한옥 구조물에 기대어 층층이 쌓은 것들은 어디에선가 떨어져 나온 현실의 잔여물들이다. 나무, 철, 아크릴, 금속, 유리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것들은 어딘가 쓰여지고 남은 용도가 애매한, 누군가는 쓰레기로 간주하는, 그렇지만 현대미술에서 사물이라는 위상을 가지기도 한다. 사물은 미학적으로 예술과 반대 항에 놓인다. 사물은 예술과의 대조를 통해 예술에 진입한다. 사물은 초현실주의 이래, 고갈되어가는 예술의 대항마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급진적 도발부터 즐거운 수수께끼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여왔다. 예술은 사물보다 분명한 의도와 형식을 지녔고 해석에 대해 투명한 편이다. 사물, 특히 김수진이 수집한 단편적 사물은 더욱 불투명하다. 여성은 예술보다 사물과 더 친근하다. 분업화된 현대와 조응하는 전문적인 길만을 걸을 수는 없었던 여성작가는 자신의 여건을 역이용한다. 김수진의 작품은 여러 재료가 사용된 만큼 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인다. 잡다한 재료들이지만 적어도 한 쪽 방향은 칼같이 각을 맞췄고, 전체는 수평을 유지한다. 분류 불가능할 정도로 잡다한 단편들은 작가가 부여한 형식을 통해서 질서화된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한치도 나아갈 수 없으며, 어딘가에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질 수도 있을 만큼 견고하게 접합되어 있지는 않다. 다루기 힘든 재료를 활용하면서도 가변적인 작품은 텍스트를 주제로 한 김수진의 1990년대의 작품과 연속적이다. 텍스트 또한 사물과 마찬가지로 ‘예술작품’과 다르다. 시점과 종점이 확실치 않고 거듭해서 쓰여지고 해석되는 것이 텍스트이고 사물이다. 안정감과 불안정함이 공존하는 이 작품에는 여성작가로서의 현실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잘 맞춰진 퍼즐 같은 이 작품은 통으로 주어진 재료와 시간과 공간을 쓰는 전형적인 조각가의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집된 사물의 목록은 일상의 매 순간이 깨어있기를 요구한다. [닿기 위한 행동]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형식과 연결되어 마치 돌탑을 쌓을 때의 심정이 느껴진다. 닿아야 할 곳, 즉 목표를 향해 직진하기 보다는 다소간 맹목적인 방식으로 더듬더듬 나아간다. 작업은 기승전결이 정해진 합리적 과정이 아니라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예술이든 삶이든 목표라는 것 자체가 불확실한 만큼 우회로도 나쁘지는 않다. 돌아간 만큼 작가는 현실을 (재)발견한다.  

 


5. 조미영







조미영, This World, 2023, 버려진 상자 종이, 혼합재료, 먹물, 아크릴 과슈, 60x40x150cm(좌대포함)


조미영의 자소상은 조각의 기준에서 본다면 취약한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종이로 만들어졌다. 종이로 풍경을 만들던 수년 전 작업이 인체에도 적용되었다. 종이를 붙여가며 만든 흉상은 조소적 과정을 내포하지만, 점토같은 덩어리보다 더 많은 겹과 결을 통해 구축된다. 그만큼 단단하다. 버려진 상자 종이가 활용된 이 작품은 변화하는 시간도 품는다. 종이의 원재료인 나무처럼 내부로 켜켜이 시간을 접어 넣는다. 하나의 덩어리에서 탄생한 ‘순수함’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의 복합이다. 먹물, 아크릴, 과슈 등 안료도 여러 가지 활용되었다. 하나하나 만들어 붙인 머리카락은 종이 입체 작업만이 가능한 독특한 조형적 특성이다. 작가는 흉상에 아파트 숲과 지형지물, 자신의 퍼포먼스 이미지를 타투처럼 만들어 새겨 넣기도 했다. 이 풍경들은 자신이 중심이 된 세계지만, 자기중심주의는 아니다. 여성은 결코 자기중심적일 수 없다. 수없이 덧대어 만들어진 종이 때문에 얼굴은 얼룩덜룩하다. 자소상은 거울을 의지하여 만들어지지만, 거울이 요구하는 사회적 상상의 매끈함 대신에 거울 자체에 내장된 분열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분열 그자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변화를 요구하는 이는 집중해야 한다. 


낱장의 종이를 활용하는 조미영의 작품에서 분열은 출발에 있다. 주체는 자명한 출발이 아니라 목적이다. 상처와 치유의 반복적 교차가 퇴적층을 이룬 오랜 시간의 두께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자화상은 타자를 지배하려 하지 않지만 기념비적인 위상이 있다. 바닥으로부터 들어올려진 좌대는 관람 편의를 위해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삶 그자체와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집은 여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작품은 ‘나는 이렇다, 그럼 당신은?’ 하면서 말을 붙일 듯 생생하다. 대화와 상호작용은 다름과 거리를 전제한다. 예술은 인간, 자연, 사회, 역사 등 삶에 뿌리를 두지만 그것들과 같지는 않다. 조미영의 작품은 대지 모신과 마네킹이라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원시와 현대가 공존한다. 오래된 집을 이루는 구성요소의 색감과 질감이 유사하여 인체는 주변과 함께 보여진다. 그녀가 가슴에 품은 것들 또한 그녀처럼 시공간의 축을 따라 변모의 과정 중에 있다. 예술은 삶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이제 조미영의 방점은 주체적인 선택에 있다. 예술은 여전히 자유롭지도 자율적이지도 않겠지만,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차이가 있다, 

 


6. 민경



민경, 두개의 신체 _두개의 날개_2023_23x30_수채, 연필, 색연필, 콜라주



민경, 두개의 신체 _붉은 꼬리_2023_23x30_수채, 연필, 색연필, 콜라주



민경, 만나는 신체 시리즈_붉은 꽃잎_2023_56x76_판화지에 과슈, 연필, 콩테



민경, 세 사람, 2023, 종이로 만든 오브제 위에 사진 콜라주, 과슈 드로잉, 40x50x60cm(좌대 미포함)


민경의 작품은 유기체적인 형상이지만 ‘두개의 신체’는 완전한 몸을 이루지 않는다. 물감, 연필, 색연필이 운용된 화면 또한 다채롭다. 여기에 콜라주까지 가세하면 내용과 형식의 복잡성은 커진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유기적인 몸은 질서의 모델이다. 하지만 민경의 작품에는 그러한 질서가 해체되어 있다. 하지만 작품에 내재된 동적 과정은 해체 이후 다시 질서화되려는 과정과 겹쳐진다. 그것은 한 작품에서도 그렇고 여러 점이 함께 걸린 전시장의 작품들 간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유기체에게 해체는 비정상(병)이고 죽음이기에 지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이완된 몸/감성은 해방감을 줄 수 있다. 경계를 넘을 수 있다. 작가는 회화보다는 단촐한 드로임의 형식을 통해 자유를 만끽한다. 형상은 모종의 형태를 형성하기 위한 잠재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두개의 날개’는 존재를 들어 올리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작품 [두개의 신체_붉은 꼬리]는 유기적 질서로부터 이탈된, 또는 탈주한 유기적 흔적들이 있다. 그것들은 말풍선처럼 꼬리를 쭉 빼면서 말한다. 화면 하단에 눈물을 비롯한 체액이 떠올려지는 방울 형태는 몸들의 관계가 녹록치 않음을 암시한다. 


여성의 생산물인 열매는 그것을 맺기 위한 지난한 노고가 깔려 있다. 민경의 작품 속에는 붉은 열매와 검은 열매가 있다. 하나는 달지만 다른 하나는 쓰디쓸 것같다. 열매를 닮은 다홍색 형상은 여성의 천체인 달과도 중첩된다. ‘두개의 신체’는 여러 방식으로 만난다. 바늘이나 찌르는 이미지는 부드러운 형상과 길항작용에 있다. 여성/작가는 삶과 예술에 가해지는 지속적 도전에 응전한다. 유일한 입체작품 [세 사람]은 종이로 만든 오브제 위에 사진을 콜라주하고 드로잉 한 작품이다. 사진 콜라주를 통해 얼굴 생김새가 상당히 드러나 있는 형태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있다. 그것은 24시간 노동인 육아의 체험과 무관치 않은 작품임과 동시에 회화, 사진, 조소 등을 두루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드러난다. 드로잉 작품을 통해 유기체 단편들의 관계를 이야기했던 작가의 입체작품 또한 관계에 얽힌 좌충우돌의 형상이다. 떨어지지 않는 세 사람은 혈연관계다. 아래로 뻗은 세 개의 다리는 나름의 균형감으로 관계를 받쳐 주고 있다. 그녀가 속한 가정은 원래 네식구인데 세 사람만 엉켜있는 것이 재미있다. 여성에게 아이들 이외의 존재는 그 누구든 한 다리 건너에 있다.


 

7. 배미정



배미정, 2023,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 7 mixed media, 채집된 사물, 석분점토, 마른 식물 등, 가변크기



배미정, 2023, 안녕을 비는 절벽4, Acrylic on canvas, 72.7x60.6cm



배미정, 2023, 살지도 죽지도 않은 나무, Acrylic on canvas, 72.7x90.9cm



배미정, 2023, 꺾어진 나무를 지키는 사람, Acrylic on canvas, 72.7x60.6cm


미술관으로 변모된 오래된 집 여기저기에 숨은 그림처럼 배치된 배미정의 오브제 작업인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 시리즈는 ‘중얼거림’처럼 사적이다. 그것들은 느슨한 연결망을 유지한 채 끝말잇기를 한다. 채집된 사물과 마른 식물 등이 석분 점토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작업들은 찾아야 보이고, 듣고자 할 때 겨우 들리는 다소간 ‘소심한’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하얗게 샌 작가의 머리 같은 털이 비죽 나온 작품 등은 작은 서사들이 작가의 몸과 밀접함을 알려준다. 그것들은 작가의 분신이며 변신인 것이다. 예전에 장독대 등으로 사용했을 법한 야외 공간을 비롯하여, 집이라는 문맥에 놓여진 것들은 삶과의 관련을 주장한다. 적어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밀도 있는 평면인 그림보다는 그렇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작업한 [안녕을 비는 절벽4]에서 서커스 하는 사람처럼 머리에 돌멩이를 이고 있는 여성은 극히 무너지기 쉬운 어떤 상태에서 균형을 잡고자 노력한다. 도미노처럼 근접으로 연결된 ‘위험사회’의 안녕하지 못한 삶에서 안녕을 비는 모습은 세상에 대한 연민이 드러난다. 작가는 잠수함의 토끼처럼 주변 상황의 위험을 먼저 감지한다. 배미정에게 작업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과정이다. 


작품 [꺾어진 나무를 지키는 사람]의 출발은 이 전시에도 함께 참여한 동료 작가의 퍼포먼스였지만 보편적인 울림을 준다. 나뭇가지가 향해야 할 하늘이 아니라 땅 쪽으로 꺽인 나무는 동물처럼 붉은 상처를 드러낸다. 나무는 삶의 중심추가 되어줄 수 있는 인류의 오래된 상징이었다. 흔들리는 시대, 모세혈관 같은 혈맥을 책임지는 존재에게 위험은 긴급하며, 기도밖에 방법이 없음 또한 막막하다. 작품 [살지도 죽지도 않은 나무]의 제목은 거의 신화적인 울림을 가지지만, 도시에 흔히 존재한다. 공해 때문에 먼지 푹 뒤집어 쓰고 자연의 시뮬라크르를 위해 동원된 도시의 가로수들이 그렇다. 수많은 관들로 이루어졌을 나무의 내부가 투시도처럼 그려진 환상적인 유기체는 살아있는 나무에 죽은 부분이 함께 있는 것을 봤던 작가의 실제 체험에서 온 것이다. 아래에는 풍선같은 머리들이 나뒹군다. 고전적인 이상에 의거한 인간이나 자연은 전체로부터 분리되고 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 과도적 시공간을 죽어가는, 또는 살아남으려는 과정 중의 존재에서 찾아냈다. 작가는 ‘생과 사가 뒤엉켜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 새로운 생의 의지로 충만한 경계에 놓인 세상’에 주목한다.

 


8. 지현아



지현아, ARGHA, 2023, hand–embroidered on velvet, 150x100cm



지현아, Enochian Magick#2, 2018~2023, hand–embroidered on velvet, 52x45cm


지현아에게 경계는 초월되어야 하는 현실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작품 [ARGHA]는 초생달 무늬가 있는 검은 드레스로, 발음하기 힘든 제목과 더불어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작가에 의하면 ‘ARGHA’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숨겨져 있던, 비밀처럼 등장하는 여성의 흔적을 밟으며 그 길에서 찾게 되는 단서들 즉, 우묵한 대지, 아랫배, 아치, 초승달, 어두운 밤, 방주, 배, 보호하는 껍데기, 원, 주거지, 그릇, 홀리워터, 언덕, 동굴, 성스러운 장소, 닫혀있는 장소, 피신처, 만다라...등의 상징들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이전 시대 지배적 상징계를 차지한 종교가 율법을 강조한다면,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상상으로 폄하된 종교도 있었다. 동일자가 아닌 타자의 전통, 즉 후자는 흔히 이단이나 신비주의로 분류되며, 영적인 경험을 중시한다. ‘이성적’ 율법보다는 몸과 분리될 수 없는 영혼의 사건들은 억압되고 예술에서 다시 나타나곤 했다. ‘우묵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작품 제목은 이러한 전통에 뿌리를 댄다. 의미는 묻혀있지만, 거듭되는 해석을 추동하는 기호는 여성의 상징이 나타나고 이해되는 방식과 비슷하다. 벨벳 재질의 작품은 주변의 빛을 흡수하여 더욱 검게 보인다.


우주적 어둠 속에서 무늬로 얹혀진 달은 빛을 내는 듯하다. 작가는 옷을 천 위에 고정시켜서 그림같이 연출했다. 비록 의상 일부가 천 ‘액자’ 바깥으로 흘러 나오지만 말이다. 둥글게 배치된 끈 형태의 장신구는 종교적 도상의 광배(光背)같은 위상이다. 정통 종교의 광배같이 번쩍거리지는 않지만 의상의 주인공의 마술적 힘을 암시하기에는 충분하다. 여성은 무엇인가를 연결시키는 존재다. 작가는 액자 모양의 바탕으로 그 위의 이미지에 환영적 속성을 부여했다. 그것은 입을 수도 없지만, 어딘가에 안치되어 있지도 않다. 초생달은 이합집산하면서 가슴, 골반 등 여성의 해부학적 기관을 은유한다. 입구 위에 걸어놓은 세 개의 눈을 닮은 작품 [Enochian Magick#2]는 든든한 수호신처럼 여성적 공간이었을 집을 지켜준다. 전시장이 자리한 구도심은 민간신앙과 관련된 곳이 남아있다. 자본이 집중된 신도심은 또 다른 의미의 마술에 걸려 있다. 합리적이기만 할 수 없는 인간에게 마술은 종교, 예술, 상품 등의 영역에서 힘을 발휘한다. 한복이 아니면서도 한옥과 어우러지는 신비한 의상은 집과 연관된 여성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출전;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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