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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혜 / 상흔으로 인해 다양해지는 몸

이선영

상흔으로 인해 다양해지는 몸 

 

이선영(미술평론가)



패널 위에 섬유를 씌워 만든 김영혜의 작품은 부드러운 천과 비유될 수 있는 피부와 중첩된다. 작품 [겹쳐진 산]에서 몸과 하나가 된 천은 또한 산으로 변신한다. 디지털 기기가 보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스킨’은 자연물을 넘어 사물까지 점령해 나간다. 보이는/보이지 않는 위험인자로 가득한 현대에 다양한 차원의 피부(피막)는 유기체를 보호해줄 것이다. 하지만 방어막은 뚫리기 마련이며, 이번 전시에서 여러 형태의 상흔으로 나타난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몸의 양태는 다양했지만, 상흔으로 인해 더욱 그렇게 되었다. 생물부터 무생물에 이르는 연속적인 전이는 오감이 총동원됐을 작업 과정 중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 발상이다. 개념/시각을 넘어서는 감각으로 흘러넘치곤 했던 작품들은 이번 전시 [부드러운 착각]에서 아예 감각의 혼란을 끌어안는다. 산의 연결은 혈맥과 산맥 등으로 연상을 이어간다. 작품 [부드러운 착각-겹쳐진 산]은 산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모두 ‘푸르다’고 하는 표현이 떠오른다. 




겹쳐진 산 18cm120cm7cm 패널위에 섬유 2023



푸른 청춘이라는 표현도 있둣이, 작가는 푸름으로부터 출발하는 연상의 고리에 몸을 추가한다. 김영혜는 이번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사물들이 의식을 가지고 나름의 원칙대로 움직인다는 생각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고 말한다. ‘첩첩이 겹쳐진 산들을 보며 포유동물의 등허리를 읽어내고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 들을 보며 물 위로 솟아오른 무릎팍을, 과실을 보며 다른 동물의 신체를 떠올리는 경험은 유쾌하고 즐겁다.’ ‘물질로 이루어졌으되 목숨이 달려있지 않은 존재. 그러나 그런 사물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건네오면 세상의 모든 공간은 생명으로 출렁이며 차오르고 그 생명들과 함께 나 또한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해지는 것이다’라고 쓴다. 눈으로 보이는 듯한 생생한 비유법은 작품으로도 구체화 됐다. 이러한 지속적인 연결망은 유비(analogy)적 세계관에 바탕 한다. 유비라는 면으로 자연을 이해한 철학자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그리이스의 자연과학은 ‘자연 세계에는 정신(mind)이 충만하다’는 원리에 기초했다고 본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그들의 자연은 운동하는 물체(body)들의 세계였으며, 운동은 ‘생명력’ 또는 ‘영혼’에 기인한다고 믿어졌다. 유비적 사고는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자연이라는 대우주의 밀접한 관련을 말한다. 크지는 않아도 물과 중첩된 몸의 이미지가 있는 김영혜의 작품은 그러한 연결고리가 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몸 위의 상처 또한 그러한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물방울이 연결된 것처럼 푸른 덩어리들로 표현된 몸 또한 연결되어 배치된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인간은 본질상 만물을 내포한다. 즉 소우주로서의 인간성 안에서 대우주의 모든 궤도가 함께 진행’됨을 밝힌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또 다른 책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의 개념]에서도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응이라는 르네상스적 사상이 자연과 자유의 대립을 극복하고 인간의 자아 인식을 통해 우주 내의 인간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부드러운 착각-겹쳐진 산  18cm40cm 12cm 패널위에 섬유 2023



카시러에 의하면 우리는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에 의해 구성된 문화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이 문화 세계는 일정한 생성법칙으로 구성된 다양한 상징형식들의 체계라고 말한다. 물이 흐르듯이 이런저런 형태로 발생하고 분화하는 김영혜의 작품들은 상징형식들로 연결된다. 카시러가 말한 ‘상징형식의 개념’으로서의 예술은 상징적인 표현, 곧 감각적인 기호와 그림을 통해 정신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카시러는 낭만주의에서 ‘자연과 정신의 절대적 동일성’(셀링)을 발견한다. 셀링은 ‘자연을 기하학적 질서화 수학적 법칙의 총합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형식과 힘의 전체로’ 이해한다. 낭만주의가 신비적 사유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부드러운 착각’에 의해 추동되는 작품들은 신비롭다. 푸른 빛은 신비감을 더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유비적 사고의 역사를 총괄한 후, 거기에서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을 본다. 


에코가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이라고 부르는 사고방식은 기원 초기부터 나타났으며, 중세에  은밀한 방식으로 발전하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한층 더 폭넓은 흐름 속에 흡수되었다. 그 후 갈릴레이의 물리 역학 시대를 굳건히 견디어낸 후 19세기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낭만주의 미학과 현대 여러 비평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에코에 의하면 신비의 지식에서 우주는 모든 것이 다른 것들을 의미하고 다른 것들에 반사되는 거대한 유리의 방으로 인식된다. 보편적 유사함이 융합을 가능하게 한다. 연쇄가 무한하게 지속된다면 해석은 무한해진다. 에코는 해석의 무한함과 표류 현상을 비교하면서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인용한다. ‘유사함은 결코 안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으며, 또 다른 유사함을 가리킬 때만 정착된다...연약한 유추가 증명되고 확실시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주파해야만 한다’(미셀 푸코) 미셀 푸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Vitruvian Man]의 예를 들면서 이러한 주파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의 의미와 한계를 논했다. 




나의 아름다운 손가락 정원, 53cm225cm3cm, 패널위에섬유, 부분채색, 2023



보편성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의 죽음’을 선고하고 싶어했다. 물이 흘러간 자리처럼 몸을 표현하는 김영혜의 작품에는 푸코로부터 대세가 된 현대의 포스트휴머니즘적 사고가 있다. 김영혜의 작품은 인간보다는 자연이 중요한 참조 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호명되는 자연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식민화된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인간중심적 틀을 벗어난 자연은 기괴하게 또는 신비하게 다시 등장한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물처럼 표현된 소우주로서의 몸은 ‘부드러운 착각’으로 표류한다. 에코에 의하면 신비주의적 표류의 대표적 특징은 시니피에에서 시니피에로, 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연결고리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로 미끄러지는, 제어될 수 없는 온갖 방법에 있다. 해체주의를 비롯한 현대의 사상에도 이러한 표류가 발견되지만, 에코는 이전 시대와 현대의 차이를 분명히 한다. 


그에 의하면 표류의 현대 이론과 반대로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은 보편적이고 일의적이며 초월적인 시니피에의 부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은 강력한 초월적 존재, 즉 신플라톤적 절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다는 관점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의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은 모든 텍스트에서 시니피에의 부재가 아닌 시니피에의 완전함을 확인한다. 하지만 현대 또한 ‘궁극적인 시니피에는 접근 불가능한 비밀일 수 밖에 없다’(에코)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대우주의 근간인 인간이라는 소우주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이 그 이유일 것이다. 현대의 작가가 몸을 작업의 중심에 놓은 것은 정복자적인 야망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겸허한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특히 단편으로 나타나는 몸은 아서 러브조이가 [존재의 대연쇄]에서 비유한 자족적인 구슬같은 단위가 아니다. 김영혜의 몸들은 불완전하기에 연쇄망을 이룬다. 




나의 아름다운 손가락 정원,16cm120cm3cm,패널위에 섬유,2022



원이나 정사각형같이 이데아의 세계에 등장하는, 신성한 기하학 내부에 안정되게 존재하는 인간같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반석같은 든든함이 아니라 ‘부드러운 착각’ 위에 지어진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면서 무한한 해석을 추동한다. 김영혜의 산은 우뚝 선 기념비적인 산이 아니라, 멀리서 보면 잔물결처럼 보일 수도 있는 산들이 여러 패널의 중첩을 통해 율동감 있게 배치된다. 작가는 산에서도 부드러움을 본다. 부드러움에서 시작해서 부드러움으로 끝날 생명의 특성을 무기질적인 사물에도 투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 속에서 자주 보는 뾰족한 산, 즉 입간판에 걸쳐진 몸의 변주 또한 등장한다. 몸과 자연의 연결은 보다 긴 시간의 주기를 염두에 둘 때 가능한 상상이다. 더욱 잘게 나뉜 시간의 지배를 받는 현대에 예술은 자연을 모델로 한다. 김영혜의 작품은 누워있는 몸과 중첩된 산 같은 통상적으로 생각될 만한 형태가 아니라, 유방이 산이 된다. 


우뚝 선 산에 내재된 남근적인 이미지 대신에, 수평으로 푹 퍼져나가려는 듯한 모습이다. 중심도 여럿이다. 마치 물기 가득 머금은 형태에서 배어 나온 흔적 같이 산 아래를 적신다. 딱딱하고 거친 산도 원래는 부드러웠다. 지층이 형성될 무렵, 물리적 힘의 작용에 의해 접혀진 것이 산이다. 몸 또한 그 발생단계에서는 더욱 부드러웠다. 생명의 씨앗은 분화를 거듭해가면서 내부에 접혀 있던 것을 펼치고, 유기체로 완성되고 입력된 생명의 프로그램에 따라 다시 접혀진다. 들뢰즈의 [주름]에 의해서 철학적인 의미까지 부여받는 접힘/펼침의 과정은 대지나 몸이나 마찬가지다. 사지가 과감하게 생략된 몸의 표현 와중에도 유방 형태가 분명하듯이 작품 속 몸은 여성임이 강조된다. 인간의 피부와 다른 이질적인 푸른색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자연과 몸의 관련을 말한다. 외계인의 표현에나 어울릴법한 푸른 피부가 이물감이 없는 것은 작가의 ‘부드러운 착각’ 때문이다. 생명 유지의 필수물질인 물은 상상을 통해서 몸과 연결되는 것이다. 




부드러운 착각- 말을 건네오는 사물들,110cm87cm10cm 패널위에섬유,2023



근육보다 지방층이 많은 여성의 몸은 남성보다 더 부드럽다. 그것은 생명을 품고 돌보는 역할에 맞춰진 부드러움이다. 달과 같은 생리주기를 가지는 여성은 달이 지배하는 물과 관련이 깊다. 물 또한 지방처럼 여러 완충작용을 통해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부드러움은 여러 상처들로 인해 훼손된다. 부드럽게 연속되는 피부는 그 내부에 단절의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상처들로 인해 몸의 단편화가 반복된다. 바깥으로부터 개체를 보호하는 막이 파열되면서 관객은 모종의 사건을 감지한다. 물과도 비유되는 몸체에 선과 원으로 난 구멍은 내용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위기의식을 낳는다. 특이할 만한 점은 작가가 천이자 피부인 표면에 실제로 상해를 입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작품 속 상처들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정교하게 그려진 것이다. 섬유를 다루면서 늘 칼과 가위를 손에 쥐고 있는 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변형 캔버스(실제로는 패널 위의 천)이기도 한 화면의 환영적 속성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성이다. 상처 입은 몸도 다양한 면모를 가지지만, 환영의 차원은 더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상처에 대한 환상적 차원은 정신분석학에서 연구되어 있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는 [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서 외상은 더 이상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아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적이고 폭력적인 왜곡일 가능성을 말한다. [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외상은 밖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러한 공격이 남긴 심적 흔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충격의 자연성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자아의 표면에 찍힌 자국이다. 그에 의하면 히스테리의 원천으로 그리고 증상과는 상관없이 모든 신경증의 원천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자국, 즉 감정을 지나치게 떠맡고 있는 까닭에 고립된, 그래서 자아에게는 괴로운 그 영상이다. 히스테리의 원인은 환자의 이력 가운데 그 어느 날 실재했던 외적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감정을 지나치게 떠맡고 있는 심리적 흔적에 있다. 




부드러운 착각-상처,흉터,무늬 53cm135cm 3cm 패널위에 섬유 2023



[히스테리의 정신분석]은 환상을 히스테리의 기원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라 정신 분석가는 이제 더 이상 환자의 증상 뒤에서 날짜를 추정할 수 있는 실재적인 외상적 사건을 찾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를 불안하게 하는 환상으로부터 외상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히스테리 원인론을 바꾼다고 지적한다. 즉 히스테리의 기원은 더 이상 외상이 아니라, 환상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증상이 아니라 환상이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는 ‘히스테리적 증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신경의 해부학적 구조와는 아무 상관 없이 가상의 해부학적 구조에만 관계된다’(라깡)고 해석한다. 김영혜의 작품은 피흘리는 상처를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감정이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객은 몸을 넌지시 암시할 뿐인 가상적 몸에 각인된 환상을 볼 따름이다. 예술은 상처를 낳았을 특정 사건의 재현에 연연하지 않는다. 


김영혜는 작품에 환영적 속성을 남겨둠으로서 상처와 치유의 보다 근본적 차원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모체로부터 분리되는 출생부터 상처를 말한다. 상처는 인간의 근본 조건인 것이다. 작품 [나의 아름다운 손가락 정원]에서 손가락 끝이 피가 몰린 것처럼 더 붉게 표현된 것은 작가의 고된 작업 과정이 중첩된다. 섬유미술을 전공하기도 한 김영혜는 부드러운 천을 주로 다루지만, 그것은 관객 앞에 말끔하게 전시된 작품의 인상이 그럴 뿐, 그것을 실제 제작하기 위해서는 부상도 허다하다. 평면적으로 걸리거나 설치되는 작품들은 그리는 만큼이나 제작된다. 대중들 또한 작가만큼은 아니어도 손가락을 혹사한다. 물론 차이는 있다. 들뢰즈의 구분에 의한다면, 생산자인 작가는 손을, 주어진 메뉴를 선택하기만 하는 소비자는 손가락을 혹사한다. 김영혜의 작품 속 손가락 형상은 한 화면에 여럿 나타남으로 인해 잠재적인 동감이 있다. 좌우로 긴 이 작품은 얼마든지 더 연결될 수 있는 열린 작품이다. 




부드러운착각- 상처 흉터 무늬, 53cm45cm3cm, 패널위에섬유,2023



확장성은 책장을 이용한 틀이 있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더 넓혀질 수 있는 정원처럼, 더 확장되는 스펙터클처럼 말이다. 제목으로 나타난 시적 비유에 의하면, 푸른 배경에 가득한 것은 대지와 하늘을 잇는 식물적 양태다. 손가락은 식물의 기둥처럼 그 연결고리가 된다. 지상적 조건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천상을 향하는 인간의 모습과 중첩될 수 있는 식물 세계, 즉 정원의 비유다. 손가락들은 묵직한 솜 이불같은 짐 덩어리에 힘겨워 한다. 손가락은 자유롭게 이동해야 하지만 위에서부터의 압박에 짓눌려 있는 듯하다. 정보 과소비의 시대는 몸의 위상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원스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소비사회에서 예술작품 또한 선택되어야 하는 입장이기에, 시각 이미지의 생산자는 과로한다. 김영혜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충격적인 부분도 있기에 그러한 요구에 일견 부응하기도 한다. 충격의 상당 부분은 작가가 주로 몸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몸이라는 기준은 정상/이상을 가늠하는 민감한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정원] 작품은 대지 부분이 생략되지 않아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연결짓는 손/가락의 위상이 잘 나타난다. 어떤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몸통같이도 보인다. 부분으로 전체를 은유하는 제유법에 해당한다. 진화론적으로 손/가락은 인간을 대변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인간만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 직립은 손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노동과 예술을 가능하게 했다. 작품 [박물지]는 책장처럼 짠 틀 안에 한두...n 덩어리가 안치된 모습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소 문제로 틀은 출품되지 않았으나 내용물 일부가 전시됐다. 단편화된 몸은 틀에 힘입어 유기적 질서를 이루기 위한 힘든 여정을 생략해도 된다. 단편들은 칸막이 된 공간에서 나름의 자족성을 유지한다. 특히 서랍 형태의 몸은 자기 자리를 찾은 듯이 안정적이다. 무엇인가를 넣어 보관한다는 점에서 서랍이나 칸막이는 공통적 기능을 가진다. 



박물지3 190cm240cm29cm 혼합재료 2023



몸은 기관들을 담고 있다. 영혼과 정신도 담는다. 칸막이는 수집장이나 진열장부터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현대적 공간을 대변한다. 한 칸에서는 호수를 포함한 몸/산 주변으로 물고기가 헤엄친다. 몸이 겹겹이 쟁여진 칸은 출퇴근 전쟁 중의 ‘지옥철’도 떠오르지 않는가. 소설 [향수](파트리크 쥐스킨트 著)의 연쇄살인마에게 이 신체의 단편들은 지고의 향수 제조를 위한 보다 음침한 재료가 될 것이다. 김영혜의 작품에서 칸막이 쳐진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매우 근접해 있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거리가 먼 존재들을 떠올린다. 불행일 수도 다행일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찔리지 않을 만큼만 다가가서 서로의 온기를 공유하는 고슴도치같은 방법이다. 피부 표면에 붙여진 색색의 둥근 형태들이 후각적 상상을 부추킨다. 무엇보다도 단편들은 잘려졌기에 연결된다. 이 또한 확장가능한 열린 작품이 될 것이다. 김영혜의 작품은 닫혀 있음으로서 열린다. 


푸른 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이전과 연속되지만 최근 작업에는 상처를 연상시키는 흔적들이 선명하다. 작품 [부드러운 착각-말을 건네오는 사물들]은 감추고 싶은 상처 또한 리드미컬하게 배열되어 문신처럼 일련의 무늬가 되기도 한다. 작품 [부드러운 착각-상처,흉터,무늬]에서, 등쪽이라 성이 불확실한 몸에 뚫린 구멍들은 단순히 둥근 형태의 조형 요소가 아니다. 작가가 화면을 푹신한 몸으로 연출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후벼파보면서 예수임을 확인하는 바로크 시대의 리얼리즘까지는 아니어도, 몸에 가해진 힘은 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자아낸다. 세 개의 동일한 몸체는 각기 다양한 상흔을 보여주며, 그것은 상처와 치유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물과 비유된 푸른 몸은 치유 가능성에 대해 보다 긍정적이다. 비워진 곳이 채워지는 자연적 순리에 따른다면 말이다. 실제로 피부에 상처가 났을 때 빠른 치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수분공급이다. 




박물지(부분) 혼합재료 2023



치유되지 않아 계속 뚫려 있는 구멍들은 인체를 이루는 생명수는 물론 그 내용물을 더 빨리 고갈시킬 것이다. 어떤 상처는 보다 인공적이다. 등 한가운데 일렬로 뚫린 구멍들은 SF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기계와의 접속을 위한 자리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전 개인전에서 접속의 시대에서의 접촉이라는 화두를 펼친 바 있다. 이번 전시에도 선보이는 입간판 형식의 작품은 변신이라는 오래된 주제가 무엇이든 손쉽게 접고 펼치는 시대에도 연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몸은 덩어리가 아니라 표면이며 표면인 한, 보다 유연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상처,흉터,무늬]의 또다른 시리즈에서 깊게 베인 상처같은 틈은 곡선적이고 부드러운 소우주에서 도드라진다. 하지만 그 또한 틈과 구멍으로 이루어진 몸 생태계의 일부이다. 그것은 안팎을 뒤집을 수 있는 창구멍처럼, 보다 유연한 몸, 가령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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