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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수 / 변화하는 시공간의 단면들

이선영

변화하는 시공간의 단면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조현수의 [완전한 풍경]은 가로x세로 길이가 2미터가 넘는 평면 작품 6점이 전시 공간 중간의 천정 위에서 내려뜨리는 구조로 설치되어 있어 관객이 그림의 안팎을 두루 둘러보게 된다. 그 작품이 출발했던 최초의 숲처럼 그곳에 들어선 이를 감싸는 환경으로 연출됐다. 관객이 몸을 움직여 둘러볼 수 있는 시간성은 작품에도 내장되어 있다. 관람은 작가가 접어 넣은 시공간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림은 특정 대상을 순간적으로 고정한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축으로 하여 변화하는 공간의 단면들이다. 어두운 색조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조명에 반응하며 은은하게 빛나는 풍경들은 앞뒷면이 다른 느낌이다. 같은 크기의 작품 여러 개를 드리워 안팎을 반쯤 열어놓은 공간은 자연의 실재감이 있으면서도 둔탁하지 않다. 코드의 조합일 뿐인 문명이 아닌 자연을 향한다. 이러한 방향에는 실재에 대한 욕망이 깔려있다. 붙잡고 싶은 실재를 묘사하기 위해 캔버스 위에 물감을 쌓아 올린 두께만큼 나무껍질이나 바위 표면을 표현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조현수는 그 반대의 방향을 택한다. 




완전한 풍경, 2023, 닥지에 동박, 390x700x1500cm (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경남도립미술관)



종이처럼 얇은 표면에 자연의 두툼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오랜 실험의 결과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물리적으로는 얇은 베일이지만 작가가 그 안에 새겨 넣은 층들로 인해 평면은 묵직해 보인다. 자연은 겹겹의 베일에 감춰진 진리이며, 예술 또한 그러한 베일을 하나씩 열어나간다. 어두운 공간에 여러 장 걸린 작품은 한 번에 그 진의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차츰차츰 스며든다. 공중에 드리워진 작품은 시각 뿐 아니라 전신적 체험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연극성(theatricality)이 있다.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는 [미술과 사물성]에서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꾸며진 무대장치(mis-en-scene) 가운데로 들어서게 되는 체험을 강조한 바 있다. 작가가 숲을 체험했듯이 관객들도 체험하기 위해서 벽에 붙인 한 장의 그림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실에 대한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실제상황의 연출이 중요하다. 상황이 중시되는 작품에서 의미는 작가가 작품 내부에 입력했다고 가정되는 그 무엇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연과도 같이 작품은 현존의 체험을 야기한다. 


시간의 추이에 따르는 몸적 체험은 ‘자연’을 거듭해서 읽히는 신비로운 대상으로 만든다. 베일은 또한 자연에 편재하는 빛과의 관련 속에서 다양한 뉘앙스를 가진다. 서양화 형식이라면 무겁게 재현되었을 수 있을 자연의 두터운 층이 한지를 비롯한 친환경적인 재료로 인해 대폭 경량화된다. 반투명한 부분이 있는 표면은 빛을 투과하면서 설치방식에 따라 앞뒤에서 볼 수 있는 나무숲 풍경을 담는다. 소생하는 만물로 인해 봄기운 가득한 화면의 또 다른 면은 나목(裸木)의 숲이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가변적인) 뒷면에는 앞면 풍경의 굵은 줄기들이 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편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그림자는 창이나 거울의 모델과는 다른, 재현의 또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림자 모델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주류가 되었던 창이나 거울의 모델보다 대상과의 유착관계가 더 강하다. 같은 나무가 계절을 달리해서 바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극적 효과, 즉 몇 걸음 가지 않고 감지되는 변화는 작품에 내재된 시간성 덕분이다. 




설치전경

 




살아있는 자연은 한순간도 고정됨 없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미세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주체의 감수성은 세계 내적 존재 조건이다. 철학에서 이러한 체험을 설득력 있게 기술한 것은 현상학이라고 평가된다. 일상속에서 드물게 고양되는 감성은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체험의 핵심이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에 속하면서 세계를 향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존 철학의 주체/ 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에는 상호 간의 삽입과 얽힘을 강조한다. 메를로 퐁티는 ‘진리는 내적 인간에 거주’(아우구스티누스)한다는 기존 관념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내적 인간이란 없으며, 인간은 세계에 있고 자신을 아는 것은 세계 내에서다. 그에 의하면 주체성은 움직이지 않는 자기 동일성이 아니다. ‘주체성이기 위해 타자에게로 열리는 것,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시간에 본질적이듯이 주체성에 본질적’(메를로 퐁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는 어떻게 몸이 자연과 우리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끈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객체로서의 몸을 재검토한다. 메를로 퐁티는 이 책에서 시각은 보는 것에의 참여이고 결속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보는 자는 그가 보고 있는 것 속에 사로잡혀 있기에, 결과적으로 그가 보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서, 모든 시각에는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이 있다고 말한다. 많은 화가들이 증언하듯이 사물들이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나의 능동성은 똑같이 수동성인 것.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여지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조현수의 작품에도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이상한 유착이 존재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몸은 세계 앞에 우뚝 서 있으며, 세계는 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세계와 몸 사이에는 포옹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수직적인 두 존재 사이에는 경계선이 아니라 접촉면이 존재한다.

 









작품은 이러한 접촉면과 관련된다. 자연을 가득 담은 작품은 자연만큼이나 정적이다. 자연은 역사에 비해 정지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역사가 새로움의 행진이라면 자연은 늘 있던 그대로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조현수 또래의 젊은 작가들은 늘 상 새로움에 경도되곤 한다. 역사의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 자연은 보수주의자의 예찬 대상이었다. 근대의 허물이 점점 드러나면서 지배 대상이었던 자연은 되돌아오고 있다. 정지는 자연이 보다 긴 시간의 주기를 가지고 있음을 말할 뿐이다. 새로움이 늘 좋은 것은 아니고 그대로가 늘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 경이로운 기적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시선에게만 자신의 신비를 언뜻 드러낸다. 어린이나 과학자, 예술가는 자연이 멈춰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작가에게 최초의 영감을 제공한 자연은 예술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조현수의 작품은 자연을 접했을 때의 지각과 같은 과정을 촉구한다. 이때 지각된 것의 의미는 ‘이유 없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한 무리의 상들이며, 우리의 지각 장(場)은 사물들로 구성되고 사물들 사이의 공백으로 구성된다’(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종이가 주는 자연스러운 편안함은 종이의 근원이 나무숲이어서일 것이다. 조현수의 작품은 작가가 자연에서 발견한 경이로운 순간들을 작품으로 전해주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결집돼 있으며, 실험은 지금도 계속된다. 작업실에는 실험 중인 샘플들이 많이 있다. 관객이 지나가면 아랫부분이 팔랑거릴 정도의 얇은 종이지만, 이미지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다. 구김이나 기름먹임 등을 통해 질적으로 변화된 한지는 여러 겹의 층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종이라기 보다는 거의 천 같이 질겨진 평면은 매체에 대한 오랜 실험의 결과이다. 이물적인 재료를 덧대고 칠하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작품은 그리는 것만큼이나 만들기의 산물이다. 그러한 조치들이 아니었다면, 한 장의 종이에 그려진 것을 설치작품으로 연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완전한 풍경]은 20대 끝자락에 있는 작가 모교에 있는 호수 인근의 숲을 소재로 한다. 얼마 전까지는 마산 지역에 소재한 레지던시를 기회로 죽순과 대나무 숲을 관찰할 기회가 많아 그것을 작품화하기도 했다. 








숲의 종류가 달라져도 표현방식은 비슷하다. 조현수의 작품은 정확한 재현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만남에서 얻는 생생한 감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확립돼 있는 재현의 방법론들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화를 전공한 조현수는 자신이 마주했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정교한 기술(記述)의 방법을 연구해왔다. 자연적 실재를 기술하는 것은 앞서 인용한 현상학 뿐 아니라 예술의 야심이기도 하다. 세계를 특정한 관념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기 기술하기 위한 철학인 현상학은 철학적 엄밀함을 가지면서도 ‘체험된 공간, 시간, 세계에 대한 보고이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경험을 과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가 제공할 수 있는 심리적 발생과 인과적 설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접 기술하려는 시도’(메를로 퐁티)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주체의 표현 대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상과의 살아있는 교류이다. 


일상적 삶에서 그러한 순간이 많지는 않다. 심신이 고양된 상태에서 드물게 축복처럼 만나지는 체험이다. 특이한 대상도 대상이지만 주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그러한 농밀한 시공간이 지나고 난 후 그 한 자락을 조금이라도 재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예술가는 그 순간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면서 조금씩 차이를 형성한다. 사실 조현수의 작품 소재는 그자체로 특이할 것은 없다. 자연도 멋지고 이국적인 풍경들도 많지만 작가의 선택은 거의 동네 야산 수준이다. 반복적으로 발길이 닿은 곳이다. 차이는 이러한 반복에서 가능해진다. 작가는 평범한 숲에서 사건을 경험한 것이다. 세계가 나에게 다가오고 내가 세계에 다가가는 극적인 만남의 순간(앞서 소개된 의미의 현상학적 순간)을 포착하고 기록하기 위해 애썼다. 20대 청년기의 감수성으로 받아들인 자연은 그가 작가였기에 더 밀도 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표현하려는 자만이 표현된 것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수용을 넘어서 생성이 되기까지는 무수한 도약이 필요하다. 예술은 그 과정을 과학처럼 실험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안식을 느낀 숲은 캠퍼스 내의 일종의 정원으로, 작품에 나타난 바는 잘 가다듬어진 수목이기보다는 이리저리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야생성이 강하다. 물론 그 안팎에도 치열한 자연의 경쟁이 있겠지만, 순리에 의해서 조율될 것이기에 숲은 편안해 보인다. 작가는 나무숲에서 ‘완전한 풍경’을 본다. 기하학적인 균형감을 추구하는 프랑스식 정원의 정원사나 개발업자의 눈에는 불완전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자연이 완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왔기 때문일 것이다. 알폰소 링기스는 [낯선 육체]에서 나무와 대면한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한 바 있다. ‘나는 내 눈의 운동과 내 몸의 직립 축을 통해서 나무의 수맥의 위력과 상승력을 감지하고 가늠한다. 나는 개념을 생산하는 나의 정신 능력이 아닌, 나의 척추조직에 내재하는 직립에의 열망을 통해서 그 거목들이 내포한 생명의 직립성을 이해한다. 세쿼이아를 응시하면서 형태화되는 나의 육체-이미지이다.’ 


그는 프랑스어에서 ‘감각’은 ‘의미와 방향’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나무숲에 대한 감각, 즉 인식가능성은 ‘표면화하고 전면화하는 지향성’(알폰소 링기스)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이나 그 과정들이 자신에게 이로울 것임을 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을 추구해왔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성은 인간에게 자유 가능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산업혁명 등을 통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근대에 그러한 관점은 고조에 이르렀으나, 이제 그러한 관점을 당연시하지 않게 될 만큼 많은 재난을 겪었다. 자연은 다시 발견되어야 하며, 이때 예술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대지에 뿌리내리고 가지를 하늘로 뻗는 나무는 삼계(三界)를 연결하는 강인한 지지대와 그것을 통과하는 에너지가 물질화된 형태 그자체다. 나무는 대지 위의 무성한 가지들만큼이나 지하에도 가지(뿌리)가 뻗어있다. 지상과 지하가 짝패처럼 연결된 이 경이로운 생명체는 온 기관을 통해 물과 양분, 그리고 공기를 순환시킨다. 








조현수의 작품 또한 나무가 기(氣)의 흐름이 형태화 된 것임을 알려준다. 나무를 나무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표면에 표현하고, 내용의 용출물로서의 형태를 주목하는 점은 예술을 자연의 반열에 놓으려는 시도이다. 작가는 자연의 근본 법칙인 에너지와 물질의 관계를 예술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로 번역하고자 한다. 무성한 가지들은 수많은 필 선으로 에너지의 흐름같은 특정할 수 없는 것들은 여러 재료의 흔적들로 형상화됐다. 특히 종이와 금속이라는 이질적 재료의 결합이 특이하다. 작가는 이에 대해 ‘과거의 용접이나 이런 야외 조각장에서 주로 작업을 많이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밖에서 자연적으로 버려진 금속들이 비를 맞고 바람을 맞으면서 녹이 스는 걸 보게 됐고, 이 색감들을 한국화 작업으로 옮기려는 연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밝힌다. 작가는 부드럽고 색깔 변화가 다양한 동(銅)의 물성을 물감처럼 사용한다. 동을 얇게 저민 동박은 종이에도 결합 되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이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면이 부식되고 색이 바래가는 금속 박편들은 자연의 생명감을 표현한다. 이때의 생명감이란 변화와 죽음까지 포함한다. 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돋아난 연초록 잎새들은 가을이 지나면서 부식된 동의 색깔과 유사해진다. 상품으로 출시됐을 반짝거리는 금속박은 그림과 화학적 결합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이 메시지에 포함된다. 사라져야 생겨나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작가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소재를 선호한다. 무대같은 체험의 장에서 시간의 추이에 따른 신체적 지각은 중요하다. [지각의 현상학]에 의하면 사람들이 존재를 사고하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의식은 모든 시간과 동시적이다. 내가 시간과 접촉하기 시작하며 시간의 흐름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시간은 줄이 아니라 지향성들의 망이 된다고 한다. 그러한 현상학적 방식은 도구화된 이성으로 포착된 세계를 넘어 신비를 향한다. 더 나아가 신비가 세계와 이성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현상학은 ‘세계의 신비와 이성의 신비를 계시하는 것’(메를로 퐁티)을 과제로 삼는다. 그것은 ‘세계 또는 역사의 의미를 태동상태에서 알려고 하는 동일한 의지’(메를로 퐁티)다. 자연이나 예술 앞에서의 신비한 체험은 감각의 수동성이 아닌 능동성을 전제한다. 알폰소 링기스는 [낯선 육체]에서 메를로 퐁티는 감각 요소를 수용하는 행위를 포착, 포획, 붙잡기로 이해했다고 지적한다. 그의 인용에 의하면 ‘단단함과 부드러움, 까끌까끌함과 매끄러움, 추억 속의 달빛과 햇살 같은 것은 감각의 내용들이 아니라, 우리가 반기는 공생의 형태로서 그리고 외부 세계가 우리에게 침투하는 통로이자 방편으로서 주어지는 것’(메를로 퐁티)이다. 알폰소 링기스에 의하면 감각의 본질은 공간과 시간을 능동적으로 점령하고 결집, 해산시키며 팽창시키거나 공동화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때 하나의 몸짓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감각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물질에 대한 감각도 중요하다. 


조현수는 스텐레스스틸이나 알루미늄, 금과 은 등 다른 금속도 실험했지만, 동이 종이에 자연스럽게 배어들며 변화하는 흔적들을 보여준다고 한다. 시간은 단단한 것을 부드럽게도 하고 부드러웠던 것을 단단하게도 한다. 한국화의 기본재료인 한지의 매체적 가능성이 극대화된다. 종이는 살아있는 재료로 간주된다. 작가는 종이를 자극을 가하면 부드러워지면서 질겨지고, 종이가 기름 먹었을 때 가죽같은 느낌이 난다고 말한다. 작가는 종이에서 돌, 쇠, 가족, 천의 느낌을 발견한다. 종이와 금속에 불을 살짝 가해서 색을 내기도 한다. 또한 종이는 두꺼울수록 밝은, 얇을수록 어두운 느낌을 준다. 비단이나 광목같은 천에 비해 종이는 일종의 막으로, 변화하는 자연과 그림 너머의 풍경을 가능하게 한다. 스케치와 동박 꼴라주, 그리고 먹 작업이 가해진 두툼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기름 먹힌 부분이 투명해지면서 빛을 투과하고 종이의 섬유질을 도드라지게 한다. 한 화면에 여러 질감이 있는 것은 한 공간에 여려 시간대가 공존하는 것과 비교된다. 역으로 시간은 기억을 통해서 서로 다른 공간들을 통합할 수도 있다.


출전; 경남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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