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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기 / 마법의 행성에서(On the Enchanted Planet)

이선영

마법의 행성에서(On the Enchanted Planet)

 

이선영(미술평론가)

 


올해 회고전 성격의 전시 [마법의 행성]을 갖는 이종기는 자신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한 중진작가로서, 2009년 첫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초대전 35회와, 2014년 서울아트쇼를 시작으로 아트페어에 70여회 참여했다. 초창기부터 그는 저 멀리에 있는 초월적인 이상이 아니라 자신의 손이 닿는 소박한 문화 아이템으로 놀이하듯 작업해왔다. 작품과 자료, 시연과 공연이 함께 하는 그의 전시장은 말 그대로 ‘마법의 행성’ 같다. 이러한 환상적 분위기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음악과 만화, 오래된 물건이나 마을 풍경 등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들에는 각박하고 진부한 현실과 대조되는 재미와 이상이 있다는 점에서, 상상적 자아와 냉정한 현실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한다. 회고전이라 하기에 젊어 보이는 작품들은 추억을 소환하는 항목들에서 회고에 걸맞는 위상을 갖춘다. 모두 작가가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그런 아아템들이 소위 말하는 ‘키덜트’ 취향임은 부정할 수 없다. 



Enchanted Planet - 2  162X130 acrylic on canvas  2018


하지만 그러한 취향이 소수의 것이 아닌 시대가 왔기에, 그의 작품이 각광 받아왔을 것이다. 작품 소재로 등장하는 백자나 김환기 작품의 경우는 ‘고급예술’에 속하지만, 고상한 완상을 넘어서 그것들과 유희하고자 한다. 이종기는 가치가 매겨져서 코드화되기 전의 감성으로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김환기가 푸른 점을 찍었을 때의 마음, 도공이 일상적 용기로 쓰기 위해 소박하게 항아리를 빚었을 때의 마음은 이후 학적, 제도적 체계화 속에서 물신적 기표가 되었다. 김환기는 달항아리에 대한 애호가로 수집도 많이 했으며, 그의 작품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초대 국립박물관 관장이었던 최순우와 친구였던 김환기는 이미 1950년대에 달항아리의 가치를 알아봤다. 도자기가 품은 우주에 대한 상상은 화면 안에 무한을 담으려는 시도를 낳았을 것이다. 이종기가 좋아하는 대중문화도 그런 이상주의가 있지만, 애초에 대중적으로 유통될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산물과는 차이가 있다. 


물렁물렁한 것은 딱딱해진다. 초심은 권위가 된다. 유희는 규범이 된다. 이종기는 이러한 규칙아닌 규칙을 어지럽힌다. 이번 전시에서 최근작을 포함해 40여 점이 선별된 작품들은 작가 말대로 ‘미와 추, 진짜와 가짜와 관련된’ 이슈를 제기한다. 그가 노는 방식은 자신의 방식대로 구별되었던 범주들을 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미술의 한 양상처럼 임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함께 했던 각별한 것 아니면 작품 소재로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신과 다름없는 심슨 가족이나 소중한 수집 아이템인 슈퍼맨 등을 활용하여 환상처럼 깨지기 쉬운 작은 소우주에 잠입한다. 환상과 환상이 만나며, 작품에 따라 결합되는 환상의 숫자는 더 늘어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변신이다. 슈퍼맨도 변신의 산물 아닌가. 주체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보는 대상을 넘어서, 무한을 떠오르게 하는 김환기의 푸른 점들 속에 들어간다면 어떨까, 청화백자에 그려진 상상의 동식물들과 함께 논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다. 



가회동 31번지 61x73cm acrylic on canvas  2011



서촌  73X118 acrylic on canvas  2014


가상현실을 비롯한 각종 ‘OO 현실’의 시대에 그러한 발상은 기술을 통하여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지만, 그가 성장했던 시대는 달랐다. 비약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도 결핍이 있었던 산업화 시대, 현실과 상상의 거리는 멀었다. 아날로그에 바탕 한 문화적 뿌리는 그의 특징이다. 물론 현시대는 이전 시대를 포함하고 있기에 명확히 구별할 수는 없지만 변화는 가늠된다. 마크 포스터는 [뉴미디어의 철학]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어법과의 차이를 분석한다. 정보의 혁명은 아날로그 시대에도 있었지만, ‘기호가 이제는 시공간의 제약에 덜 구애받게 된다는 점’(마크 포스터)이 근본적 변화의 내용이다. 저자는 정보양식의 단계를 1. 대면적이고 구어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 2. 인쇄를 매개로 해서 글로 씌여진 의사소통, 3.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 등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의사소통 수단은 1. 상징적 유사물, 2. 기호의 재현, 3. 정보적 시뮬레이션으로 구별된다. 


현재가 마크 포스터가 구별한 세 번째 전자 단계인데, 이때 자아는 끊임없이 불안정 속에 탈중심화되고 분산되면서 여럿으로 불어난다. 그 이전 단계에서 ‘자아는 가상의 합리적 자율성을 중심축으로 하기에 주체로 자처하나 실은 주어진 기능을 담당할 뿐인 수행자로 구성’(마크 포스터)된다. 마크 포스터는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의 이론적 틀을 빌어서 정보화가 진척될수록 말이 사물과의 연계를 잃고 사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고 본다. 전자통신에서 주체에게 객체는 언어적으로 재현된 물질적 세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기표의 흐름 자체가 객체로 되는 자기지시적 경향이다. 자기지시성은 모더니즘의 특징이기도 하며 형식주의를 낳기도 한다. [뉴 미디어 시대의 철학]의 서장 제목이 ‘사물 없는 말’인데, 그것은 객관적 실체가 사라지는 현대를 압축한다. 벼룩 시장 뿐 아니라 아마존닷컴을 통해서 물건들을 사는 현대에 이전의 방식은 현재와 혼재될 수 있다. 



Enchanted White - TIGER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Enchanted White - Forest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NAVERMIND 150x150cm   acrylic on canvas  2021


1960-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에게는 특정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있으며, 작품의 생산에도 반영된다. 키덜트 현상을 비롯하여 누군가는 이러한 취향이 퇴행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예술적 유희는 위험사회가 제안하는 다른 현실도피의 방식보다 평화적인 것은 아닌가. 새로움과 진보라는 근대적 가치의 상당 부분 무의미한 경쟁이나 파괴적인 전쟁으로 이끌리고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 말이다. 음악 애호가이기도 한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틀즈같은 도상에서 1960-70년대 하위문화 절정기의 이상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는 별로 소용도 없는 명분과 당위들이 성실과 윤리 등으로 둔갑하여 초자아적인 상위개념으로 자아를 억누를 때 무의식은 반역을 꿈꾸게 된다. 인생을 살면서 진짜 우리가 몰두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 있음을 솔직히 드러낸다. SNS는 공/사가 구별된 현대인의 삶의 패턴을 공략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소통방식이다. 


사소함은 내밀한 영역으로 감춰져 있다. ‘마법의 행성(Enchanted Planet)’이라 붙여진 동화같은 전시부제는 믿는 만큼 몰두하는 만큼 현실성을 가지는 어떤 영역을 은유한다. 신화와 종교, 그리고 예술도 그 영역과 중첩된다. (정신분석학이 분류한 바의)‘현실원리’의 지배 속에서 ‘쾌락원리’를 담지하는 영역이다. 그에게 음악은 각별하다. 학창 시절 음악회 기획이나 학교 앞 다방에서의 DJ 활동을 비롯하여, 회사 다닐 때는 오디오 부문 사업에도 참여했다. 이번 전시의 부대 행사에서 음악 연주회와 감상회기 곁들여진다. 작품에 유명 뮤지션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다. 마이클 잭슨이 도상으로 나오는 작품은 시리즈로 있으며, 비틀즈의 유명한 앨범 이미지를 [서촌](2014) 풍경에 대입한 바 있다. 유명한 밴드의 음반을 차용한 [NAVERMIND](2022)는 앨범의 정사각형 구도를 유지했으며, 청화백자의 무늬에 손을 대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물고기가 노니는 백자의 둥근 원은 헤엄을 칠만큼 실감나는 우주다. 



정독 도서관 길, 100 x 65cm, Oil on canvas, 2014



해운대역 2 100x82.8cm acrylic on canvas  2020


음악 시연회는 LP를 비롯해서 작가의 컬렉션과 관련되며 작품의 주요 캐릭터들 또한 만화책이나 피규어, 장난감 등 관련 상품들의 수집과 밀접하다. 작업실에는 수집품들이 진열되거나 쌓여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익명의 소비자에게 팔렸던 것들이다. 당대에 흔한 것일수록 후대에 귀해진다는 고고학의 역설이 관철되는 물건들이다. 우리나라도 세기말을 통과하면서 상품과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키치가 유행한 적이 있다. 필립 블롬의 [수집]에 의하면 예술의 흉내만 내는 진품 없는 대량상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키치는 쉽사리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에 의하면 키치는 대량생산의 결과물로서 기계 생산 시대에 수집의 가능성이 열렸다. 대량생산이 이루어짐으로서 사람들은 비로소 완전한 세트를 갖춘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필립 블롬은 하나의 줄거리나 사진틀 혹은 어떤 노래 안에서 자기만의 정취를 추구함으로서 키치 수집선은 완성된 대본 없이 직접적인 감정을 되살려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대용물이 된다고 말한다. 


대량생산품은 최고의 볼거리는 못되지만,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수집 품목이 된다. 필립 블롬에 의하면 이러한 물건들은 ‘머나먼 추억의 성골함이요 현재로부터 탈출구이자 개성과 동경 희망의 선언문’이다. 대량생산 시대는 수집에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필립 블롬에 의하면 그곳은 ‘우리가 꿈꿀 수 있을만큼만 가까우며 실제로 추구하지 않을 만큼만 먼 환상의 세계’이며, ‘결코 너무 멀리 가는 일이 없으며 예술과 관습의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지킨다’ 이종기가 작품에 호출한 캐릭터들은 이상세계와 관련되며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이상한 물건의 범주’(필립 블롬)에 속한다. 이 전시에서 대표적인 것은 슈퍼맨 시리즈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서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슈퍼맨을 그리거나 붙이게 했다. 슈퍼맨은 오륙도와 호수 위, 운무 사이를 날아가며 화성행궁이나 정독도서관 길, 한남동 같이 한국인에게 익숙한 지역을 통과한다. 슈퍼맨의 여정에서 장소는 무한정 추가될 수 있다. 



순천     80x80cm   acrylic on canvas  2020



전주 한옥마을 72.7X100cm acrylic on canvas  2021



안동 긍구당 80x80cm acrylic on canvas  2017


슈퍼맨은 부산의 [광안대교](2017)에서도 모습을 보이며, 고래가 있는 바다의 등대(2021)를 통과한다. 음악도 만화도 거의 외국에서 온 소재지만, 그것은 한국적 맥락으로 재배치된다. 한옥마을 시리즈나 문화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북촌 가회동 31번지] 시리즈는 한옥마을에서 한옥을 짓고 살기도 했던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다. 작품 속 오래된 마을은 그가 1960-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작품 속 동네는 가회동처럼 일부러 보존되는 곳이 아니면, 상당 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어린 시절 이후 좋아했던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시간은 그러한 불행과도 화해하게 할 것이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가회동을 동네 풍경처럼 친근하게 그렸다. 가회동 근처의 문화 유적지도 심슨 일가의 놀이터가 된다. [마이클 잭슨] 시리즈에서는 서울 북촌의 마을을 배경으로 심슨 일가와 마이클 잭슨이 만난다. 최초의 상상은 n차 상상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번 전시에서는 3D LED 펜을 이용하여 청화백자 도자기 속 용과 그것을 만지는 캐릭터를 제작하여 움직임의 환영을 보다 입체화했다. 키치가 가지는 이상세계에 대한 추구는 더 강한 강도의 환영이 필요한 것이다. 예술가만큼이나 기업들이 주목하는 영역이다. 최근 뉴스 기사는 한편에 500억에서 1000억까지도 투자하는 디즈니 영화를 소개한다. 이러한 집중적인 투자는 수많은 파생 상품들로 이익을 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다. 제 1세계 문화산업의 산물은 제 3세계의 시골 구석구석까지 복제품으로 유통될 것이다. 이전 시대에 우리의 초등학교 앞 문방구를 채웠던 장난감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랜 시간이 흐는 후에는 문화적 산물로 평가된다. 이종기의 작품에서 보다 한국적인 삶과 관련되는 부분은 오래된 마을이 등장하는 작품들이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나지막한 오래된 가게들이 있는 순천의 풍경들을 지방에서도 발견한다. 



운무 120x227cm   acrylic on canvas  2018



화성행궁 1      60.8 x 90.9        Oil on canvas  2014



광안대교 89x146cm   acrylic on canvas  2017


지방이 소멸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그의 풍경은 동화같은 따스함을 품고 있다. 전주의 한옥마을이나 풍남문 등 옛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심슨 가족은 즐겁다. 여러 시대가 공존하는 한국의 특성이 반영되어 미래적인 도시 또한 포함된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는 고층 빌딩이 가득한 해운대역은 미래적 배경으로, 그에 어울리는 SF영화 분위기의 심슨 일가와 만난다. 작품 [안동 긍구당](2017)은 동양화 풍으로 그려진 풍경 위를 날아다니는 바트의 모습이 보인다. 문화재는 동네 풍경처럼 일종의 환경처럼 연출된다. [마법의 행성] 시리즈는 문화재의 문양 안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심슨 일가가 포함된다. 2021-2022년 사이에 발표된 [Enchanted White-...]로 시작되는 청화백자 시리즈는 청화백자의 여러 문양 안팎에서 그것을 완상하는 캐릭터의 모습이다. 용의 등에 타는 등, 소재에 걸맞는 캐릭터의 자세들이 재미있다. 이종기에게 꿈이 실현가능한 것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20여년 전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가 작성한 바이오그래피에 의하면, ‘어느 날 저녁 을지로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 회관 이었던 건물의 뎃생반 모집 공고를 보고 끌려들 듯 수강 신청을 하고 몇 주 후부터 여러 미술 교육기관에서 유화 한국화 수묵화 민화 수채화 뎃생 미술사 박물관대학 등 1주일에 8개 프로그램을 동시에 배우기 시작한 때’가 불과 2007년이다. 2년이 지난 2009년에 첫 개인전을 연다. 이후 홍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보다 ‘전문적인’ 차원에서 학업과 화업을 이어갔다. 1956년생의 그가 50대 중반 이후 인생 2막 연 의지력과 활동력을 생각할 때, 이번 전시는 회고전보다는 중간 점검의 성격을 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자료들이 대거 내보이면서 그동안 해왔던 14개의 시리즈 중에서 작품을 선별한다. 자전적 성격을 띄는 이번 전시와 잘 어울리는 자화상 시리즈에서 젊은 시절의 초상을 그려주는 심슨 가족을 표현한다. 



도슨트 90.9x72 acrylic on canvas  2019


작품 소재가 된 작가의 젊은 모습은 7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방송국 활동을 할 당시 부인이 찍어준 흑백사진을 토대로 한다. 자화상 시리즈는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구조를 통해 삶과 예술이 서로 얽히는 상황을 말한다. 그 중 최근에 제작된 [달항아리] 시리즈는 자료, 기록, 회고 전의 성격을 넘어서 앞으로도 작품이 추가될 새로운 시리즈로 주목할 만하다. 작품 [달항아리1](2022)는 김환기의 작품을 배경으로 달항아리를 배치하고, 그 위를 슈퍼맨이 날아가는 구도다. 달그림자가 서려 있는 달항아리는 둥근 천체를 오롯이 살리기 위해 100×100cm 프레임의 캔버스에 제작되었다. 이전 작품 [Almighty Michael Jackson](2012)를 보면 이미 10여년 전에 정방형 구도의 캔버스 안에 그림자가 있는 달이 도상에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풍경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정사각형 캔버스는 음악 애호가였던 그가 흔히 접했을 LP나 CD의 판형과 유사하다. 


여차저차 해서 손에 들어온 새 앨범이 오롯이 새 세계였을 시대의 감성이다. 대개 흘러가는 음원(정보)의 형태로 접하는 요즘의 음악 소통/유통의 방식과도 다르다. 당시 어렵게 구한 음반은 ‘오리지널’로 생각됐다. 1938년이라는 명확한 태생년도를 가지는 슈퍼맨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업실에는 최초로 출간된 만화책 카피본을 비롯한 슈퍼 히어로 관련 상품들이 수집되어 있다. 손으로 만져지는 물적 형식에 대한 애호는 회화라는 주된 형식을 유지하게 한다. 백자에 대한 매료는 색과도 관련되어, 작가는 2021년 ‘마법의 하얀색(Enchanted White)’이라는 부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 배경이 화이트로 들어간 백자는 화면의 물성이 더욱 강조된다. 그의 작품에서 도상들 간의 배치는 오묘하다. 김환기의 푸른 점들은 마치 달항아리로부터 뻗어 나오는 자기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김환기가 사랑했던 달항아리는 서로를 만들어낸 듯 어울린다. 



달항아리(수퍼맨 도자기)  90x90cm acrylic on canvas   2023



달항아리 2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달항아리를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슈퍼맨의 푸른 의상 또한 푸른 우주를 반향한다. 작품 [달항아리]는 크지 않지만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부여한다. 작가가 선택한 도상들은 서로를 끌어들이며 자족적 우주를 이룬다. 이 작품은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활용하는 이종기의 방식이 잘 드러난다. 달도 달항아리도 김환기의 추상화도 슈퍼맨도 다 각각의 맥락이 있었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선택하여 또 다른 맥락을 부여한다. 소위 말하는 새로움이나 창조는 없다. 각색과 재생산, 재맥락화만 있을 뿐이다. 이종기는 그러한 방식이 2류나 3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오래된 격언과 조응한다. 그는 ‘내가 창조자는 아니다. 난 단지 버무렸다’고 말한다. 예술은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신이 영감받았던 것들을 숨기기에 바쁘다. 자신이 딛고 올라간 사다리를 잘 걷어찰수록, 작품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으로 추앙받는다. 


전대미문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에 자신의 원천들을 숨기지 않는 작가는 순진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사적 부분을 드러냄으로서, 이러한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의혹에 응전할 예정이다. 기존의 여러 도상을 뒤섞는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특징적인 혼성모방(pastiche)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경우 자신의 삶과 한국적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군자를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동양적 철학도 배경으로 깔린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자료의 형태로 다른 작가의 혼성모방 형식의 작품들을 같이 선보인다. 그중 얼굴 없는 작가로 알려진 Death Nyc(“Don't Easily Abandon The Hope”의 약자라고 전해짐)의 판화들이 특징적이다. 1979년 미국 출신이라는 정도의 정보만 알려진 DEATH의 판화는 다른 작가의 여러 작품들이 판화 형식으로 조합되어 있다. 야밤의 광주 송정역 시장을 배경으로 바트가 벽화 그리는 장면이 있는 작품 [BANKSY](2015)는 거리의 예술가에 대한 공감을 표현한다. 



Almighty Michael Jackson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12



BANKSY 7.7x100cm   acrylic on canvas  2015


자신을 둘러싼 문화에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재창조자들에 대한 관심은 뒤늦게 다시 예술을 시작한 작가의 자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소간 경직된 한국 사회에서 한번 정해진 진로가 잘 바뀌지는 않는다. 대개 맞지 않는 것을 하다가 일찍 도태될 따름이다. 이종기는 진로 수정에 성공했다. 그는 현재 누구보다도 바쁜 전업 작가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미술을 시작했으나, 그동안 끊긴 예술의 끈을 다시 이은 지 20여 년이 지나는 시점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작품 뿐 아니라 인생을 내보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시 하기 전에 그것을 수집의 방식으로 향유 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에서 임의적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없다. 고급,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우연성을 실험한다며 임의적인 것들 끌어들이는 개념적 전통이 있다. 자동기술이든 발견된 오브제든 순수한 우연이 있을 수 있나? 그것은 ‘고급’과 ‘순수’의 영역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세일 수 있다. 


예술 아닌 사물들도 많은 물질적 정신적 투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거기에도 많은이들의 꿈과 희망이 응결되어 있다. 동서고금의 원천들이 보다 쉽게 접하게 된 것은 정보혁명 덕분이다. 인터넷의 보편화는 이러한 혁명에 가속도를 붙였다. 아기 때부터 스마트폰을 접하는 요즘 세대와 다르게, 1956년생의 작가는 중년이 돼서야 인터넷을 접했을 것이다. 아나로그 형식의 문화와 예술에 익숙한 채 변화를 맞은 세대 특유의 복합적 감각이 그에겐 있다. 2대의 턴테이블과 믹서 스피커 마이크 등으로 음악을 틀어주는 이번 전시의 부대 행사 중 하나는 아날로그 감성을 물씬 풍긴다. 그가 만들어내는 최종적인 작품은 여전히 물리적이다. 직접 만지고 소장하는 것에 대한 아날로그 취향이 여전하다. 여러 코드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두툼하다. 김환기의 작품을 모델로 하는 배경은 원작보다 더 질감을 강하게 칠해졌다. 달의 질감은 그보다 약하다. 



달항아리 3 100x100cm 캔버스에 아크릴 2022



달항아리  8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어디론가 날아가는 슈퍼맨의 재질은 매끈한 도자기다. 김환기의 작품을 패턴화시킨 배경도 있다. 2022-2023년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달항아리 시리즈는 여러 변주가 있다. 캐릭터 없이 김환기 작품 이미지 배경에 달항아리만 있는 작품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과 관련되어 빈 무대처럼 보인다. 슈퍼맨은 계속 날아가 균열이 가득한 백자 위를 지나가기도 한다. 캔버스 뒷면에 철판을 대서 자석이 붙은 슈퍼맨 도상을 관객이 이동시켜가며 붙일 수 있게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협업으로 도자 작품들도 전시되는데, 캐릭터 이미지가 새겨진 도자와 달그림자가 새겨진 달항아리들이 그것이다. 작품 속 잠재적 움직임을 참여를 통해서 현실화한다. 심슨이 가부좌 자세로 달그림자 새겨진 달항아리를 본다. 심슨은 그에게 부처에 해당 될 만큼 중요한 캐릭터다. 푸른 우주 속에서 균열이 있는 백자를 보는 부처상은 또 다른 위대한 작가 백남준을 끌어들인다. 부처가 어떤 명상을 하는가에 따라 항아리와 우주는 변화할 것이다.


출전; 로이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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