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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김연식 / 굽이치며 만나는 경계들

이선영

굽이치며 만나는 경계들

 

이선영(미술평론가)

 


‘교향곡; 인드라망’이라는 큰 주제를 4악장으로 나누어서 전시하는 정산 김연식의 작품전은 그자체로 색과 입자의 출렁임의 세계이다. 그의 작품들은 현미경 아래의 미시적 우주부터 심우주(deep space), 때로는 인간의 시야에도 들어올 법한 풍경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그의 ‘풍경’은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관객이 어떤 세계로 해석하든 정지됨 없이 유동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팬데믹 시기에 칩거하면서 집중적으로 제작된 작품들을 올해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여정이다. 지난 5월에 제1악장 ‘컵 속의 무한세상’이라는 부제로 전시했고, 이번 6월에 제2악장인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 전이다. 파동과 입자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상상이 펼쳐진다. 일견 색의 얼룩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심리 테스트(Rorschach test) 얼룩처럼 다양한 해석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정산의 작품은 그의 ‘살과 뼈를 이루는’ 불교의 세계관은 기본으로 깔려있고, 인간의 마음에서 물리학적 이미지까지 아우른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32, (45.5x53), 캔버스에 아크릴.


16세에 불교에 입문한 1946년생의 작가이자 스님은 인사동에서 44년 전부터 사찰음식을 시작하기도 한 다방면의 활동가다. 악장으로 나뉜 전시 부제들도 그렇고 가게에 놓인 피아노는 그의 작품에 음악 또한 깔려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처음 그의 작품을 봤을 때 1960년대 서구 하위문화를 물들였던 몽환적(psychedelic) 음악 이미지가 떠올랐다. 출렁이는 곡선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자연만큼이나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미술과 물리의 만남](Art & Physics)에서 직선은 자연에서는 거의 결핍된 부분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모든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형태는 곡선이거나 아라베스크 형태다. 자유롭게 출렁거리는 색 띠의 향연은 자아의 확장과 연결된 활성화된 무의식을 표현한다. 무의식 또한 그의 작품처럼 흐른다. 여러 겹의 띠로 출렁이는 무의식은 이원론이 지배적인 현실을 침식하거나 도전한다. 작가는 작품의 주요 형식을 선이나 띠보다는 그물과 비유하여 설명한다. 


그물의 비유는 불교적 맥락을 가진다. 불교에서 나온 ‘인드라망’은 [화엄경]에서 부처님이 ‘이 세상은 망으로 첩첩이 쌓여있다’는 말에서 왔다. 이 망의 교차점에는 구슬이 달려있어 서로를 비춘다. 정산은 우리 시대의 인터넷을 그러한 망과 비교한다. 네트워크는 이전의 위계적 구조를 와해하는 경향이 있다.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에서 네트워크와 계층구조 간의 근본적 긴장 관계를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계층구조는 상위집단이 포함된 체계다. 대조적으로 네트워크는 밑에서부터 나타난다. ‘개인들은 노드(node) 역할을 하며 서로의 관계를 결정하고 쌓아가며 하나의 집단으로 융합한다. 각 노드는 동등하며 스스로 방향을 결정한다. 민주주의는 일종의 네트워크이다. 한 무리의 새들이나 월드와이드웹 역시 네트워크다.’(알렉스 라이트)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작품만 나오지만, 실제로 그는 대규모 설치미술에서 망을 사용하기도 했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1(38x38),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10(50x60.5),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1(45.5x45.5),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38(38x38), 캔버스에 아크릴. 


2014년의 거대한 구형태의 설치작품에서 1600 개의 투명 줄에 매달린 면도날 48000개 이용해서 관객을 비추기도 했다. 면도날의 반사면들은 거울의 방과 같은 무한한 반향을 일으키며, 인드라망처럼 우리가 홀로가 아님을 웅변한다. 다른 설치작품에서는 그물을 실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후에 그는 그물을 환영의 세계로만 표현한다. 굵고 가는, 여러 색의 그물들이 첩첩이 쌓인 세계다. 그물은 섬세한 선적 형태로 표현되지만, 그는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의 비율에 따라 선의 강도와 밀도가 정해지며, 행위의 결과를 순간적으로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은 먹색만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선화 못지않은 절제를 요구한다. 그에게 불교의 선사상은 이러한 찰라의 선택과 관련된다. 정산은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색을 억압하지 않고 분출하되, 절도 있게 선택한다. 작업 과정은 그린다기 보다는 만들기에 가깝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부어 캔버스 위에 퍼트린 후 직관적으로 구성하는 단계를 거친다. 


덧칠은 물론 수정도 불가능하다. 고치기보다는 막판에 흐트러뜨리는 만다라처럼 완전히 다시 시작한다. 작가조차도 같은 똑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수많은 섬세한 겹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일 듯하지만, 주사위를 던지는 듯한 우연적 과정을 포함한다. 자신으로부터 용솟음치는 것을 순간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그는 가상의 그물을 친다. 절묘한 순간이 선택되어 갈무리될 때,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결과이기에 작업은 그에게 종교적 수행만큼이나 필연적이다. 그는 ‘예술의 길은 도 닦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작업 과정 중 무아지경은 선의 경지와 비교된다. 작업에 몰입하는 과정은 매일 새벽 4시에야 끝난다. 모나리자 갤러리 2개 층에 걸린 이번 전시는 둥글거나 사각형의 캔버스에 담긴 70여 점의 작은 작품들이 상호작용하는 우주를 연출한다. 사각형이나 원안에 담긴 세계는 이전의 설치작품처럼 서로를 비춘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73x53),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11(50x60.5),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7(45.5x53),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4(45.5x45.5),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9(45.5x53), 캔버스에 아크릴. 


작가는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라는 전시 부제에 대해, ‘양자역학에서 주시하지 않을 때는 파동, 실험할 때 입자로 변하는’ 성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드라이브’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두 범주가 ‘서로 얽히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현대물리학의 가설에서 부처님이 말한 ‘우주 전체의 연결’을 본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앞서 인용된 책에서,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상보(相補)성의 원리가 고전적 관점에서 양립 불가능하다는 가설을 종합했다고 평가한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측면만 진리로 여겨져 대립해온 것이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빛이 입자라는 믿음을 가진 뉴턴과 해안에 부딪히는 물처럼 에테르를 통해 굽이치는 파동이 빛이라는 믿음을 가진 호이겐스의 입장을 대조한다. 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과학은 절대적 시점을 유지했다. 뉴턴은 ‘진리는 절대적이며 그 자체가 수학적인 시간이다. 그리고 그 자체의 본질에서 흘러나와 어떤 외부 사물에 관계없이 항상 유사하고 고정된 채로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양자역학의 세계는 상대적이다. 


파동과 입자가 통합된 관점, 요컨대 다른 두 개가 아니라 세계의 단일한 묘사에 대한 보완적 국면이다. 양자역학의 편에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자연과학이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자연과 우리 자신이 상호작용하는 부분이다’, ‘새로운 물리학에 의하면 관찰자와 관찰된 것은 연관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고는 인문학과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레오나드 쉴레인은 물리학자 보어의 제자로, 보어의 관점을 확장시킨 철학적 입장을 소개한다. ‘파동과 입자처럼 정신(mind)과 우주는 뒤엉켜서 풀 수 없게 통합된다’(휠러). 이러한 해석이 암시하는 것은 정신과 우주의 양상이 한 쌍을 이루는 체계라는 것이다. 미술과 물리학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다. 정산의 경우 불교적 세계관이 가세한다. [미술과 물리] 또한 ‘우리시대의 범례(paradigm)에서 우리는 실재의 근본적인 요소로 네 가지를 인정하는데, 그것은 공간, 시간, 에너지, 물질이다. 이러한 네가지 요소들은 총체적인 만다라를 형성한다’고 서술한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9(60.5x50),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73x53),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30(45.5x53),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6(32x32),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37(38x38), 캔버스에 아크릴. 


레오나드 쉴레인은 양자와 상상과의 관계를 언어학적으로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상상력(imagination)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phantasia’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빛(phaos)가 그 어원이라고 한다. 먼저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 전의 주제를 바로 표현하는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5](이하 작품 제목은 번호로만 표기함)는 선들이 겹쳐 만들어진 파장 사이사이에 입자들이 배치된 상보적 우주을 이룬다. 작품 [-41]는 또한 파동과 입자가 공존하는 우주다. 액체적 흐름과 거품을 동시에 품어 바닷물같은 자연 풍경으로도 보인다. 만약 그것을 풍경으로 본다면 그것은 전지적 시점. 또는 마음의 시점이다. 파동과 입자는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운동의 양상이다. 첩첩이 연결된 그물이 여러 무늬를 만드는 작품 [-1]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힘이 있다. 어느 작품보다 뚜렷하게 구별되는 그물망의 선들이 있는 작품 [-10]은 높은 밀도를 가늠케 한다. 


작품 [-21]은 우주의 먼지가 뭉쳐서 우주를 형성하는 듯한 밀도 높은 힘의 파장이다. 혜성과 같은 움직임, 또는 소립자의 운동이 있는 작품 [-38] 전자파의 반향으로 형태와 운동을 파악하는 과학을 떠올린다. 이번 전시에서 구별되는 작품군 중 하나는 서로 간섭하는 둥근 형태들이다. 그의 작품 속 다양한 그물망 형상은 상호적 간섭의 결과이기도 하다. 간섭파 형상은 색과 밀도를 달리한다. 작품 [-2]는 서로 간섭작용을 하는 둥근 파장들을 보여준다. 작품 [-7]에서 간섭파가 있는 영역에 밀물처럼 치고 들어오는 또 다른 형상은 힘과 힘이 복잡하게 마주한다. 작품 [-11]은 영역과 영역이, 파와 파가 만난다. 작품 [-27]에서 파동이 없는 부분은 파동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정산의 작품에서는 색의 힘이 복잡한 형태들과 맞물려 폭발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작품 [-32]는 밝은색의 조합으로 엄청나게 활기찬 결의 흐름을 보여준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12(60.5x60.5),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72.5x60),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20(45.5x45.5),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15(53x41),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16(38x45), 캔버스에 아크릴. 


[미술과 물리]는 19세기 중엽까지도 색을 물질의 독특한 속성이라고 확신했지만, 19세기 초에 과학자들은 색이 변화하는 파장의 빛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정산의 작품에서 색은 파장이다. 작가는 빛에 내재된 파장을 색으로 보이게 한다. 정산의 작품 속 빛과 색은 뉴턴이 모델화한 스펙트럼(spectrum)을 무한히 세분화한다. 특히 푸른색은 지구에서 우주적 차원을 가지는 바다를 떠올린다. 그의 ‘바다’는 안팎에서 끝없이 움직인다. 작품 [-24, 29]는 블루가 가지는 다양한 뉘앙스가 결을 통해서 나타나며, 작품 [-9]에서 푸른 계열의 색감은 유동적 이미지에 바다같은 액체적 성격을 부여한다. 푸르고 하얀 색감이 결합된 작품 [-3]는 밀물처럼 밀려든다. 그의 작품에서 바위나 육지 또한 운동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액체적이다. 작가는 딱딱한 암석에서도 대양을 본다. 단단한 무기질적 표면이 있는 [-2]에는 유동적인 바다가 있다. 브라운 계열의 색감이 있는 작품 [-30, 46]은 단단한 것에도 내재될 유동성을 예시한다. 


홍수나 댐이 무너졌을 때 흙탕물이 범람하듯이 말이다. 작품 [-37]의 검붉은 색감은 거대한 에너지를 품고 흐르는 용암을 연상시킨다. 작품 [-12]에서 유동적 이미지에 새겨진 균열은 모든 단단한 것들의 유동적 근원이다. 균열은 단단한 것이 다시 유동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증후다. 정산의 작품은 위와 아래가 분명히 선택된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아래의 형상은 풍경의 전경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작품 [-4] 기암괴석 또한 그 내부에 그물망을 품고 있으며, [-20]은 바닷물 들이치는 해변의 풍경같은 시야가 있다. 지형도는 풍경의 또 다른 양상으로 시점이 다를 뿐이다. 심연의 호수가 떠오르는 지형이 있는 작품 [-15], 강과 그 어귀가 떠오르는 작품 [-18]은 지형도 처럼 등고선으로 지형을 표시한다. 해양과 대지의 유동적 형태는 그것이 이루는 생태계의 산물인 유기체에도 반복된다. 생태계는 그 자체가 ‘생명의 그물’(프리초프 카프라)이다.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3(32x41),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5(32x32),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34(45.5x53),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7(60x60), 캔버스에 아크릴. 



파동과 입자의 드라이브-48(60x60), 캔버스에 아크릴. 


색감 때문에 식물이 떠오르는 작품군은 무엇도 빠지지 않는 촘촘한 그물망인 우주의 양상이다. 물론 유기체의 외적 재현은 아니고, 운동의 내부, 그 단면이나 단층같은 모습이다. 작품 [-16]은 보라색 양배추의 단면이 떠오른다. 작품 [-43, 45]는 세포적 차원을 관찰하기 위해 횡단면을 펼친다. 녹색 계열이 포함될 경우 식물 세포같은 양상이며, 식물의 씨앗에도 성장을 통해 펼쳐질 수많은 주름이 잡혀있다. 무채색 톤의 망은 형태에 집중하게 한다. 밝음과 어둠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빛은 특별하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작품 [-34]에서 밝은 선들은 반사광 같다. 무채색 흐름은 둥근 캔버스의 작품 [-47]에도 보인다. 온난화 때문에 녹는 북극해의 풍경같은 작품 [-14, 44]은 해수면을 상승시켜 또 다른 파를 형성할 것이다. 둥근 캔버스처럼 같은 형식의 캔버스 여러 개가 나란히 걸릴 때 잠재적인 동감이 있다. 무채색과 유채색 사이의 상호전환이나 그물망의 농도와 밀도 변화같은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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