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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이 가속되는 현대의 언어적 조건에 대한 반성

이선영

분열이 가속되는 현대의 언어적 조건에 대한 반성

  

이선영(미술평론가)

 


‘Will you 罵詈 me?/윌 유 매리 미?’라는 전시 부제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원래 의미를 뒤집는다. 기획자 이한나에 의하면, ‘罵詈’는 한자어로 ‘꾸짖으며 욕하다’이므로, 달콤한 청혼의 메시지는 ‘나에게 욕설을 퍼부을 것인가요?’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연인이나 부부를 포함한 인간관계가 순탄치 않은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윌 유 매리 미’가 가지는 양가적 뉘앙스는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선다. 그 자체로 험악한 공격적인 행위로서의 욕도 있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이 주목하는 욕은 주로 내부에 가시를 숨기고 있는 거짓된 모습이다. 이 전시의 부제처럼 동음이의어로 뒤집어지는 청혼의 메시지처럼 말이다. 무엇보다도 욕은 언어적 문제다. 기획자는 ‘농가성진’(말이 씨가 된다), ‘설망어검’(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말로 남을 해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등, 말과 관련된 몇 가지 한자 숙어를 참여작가들에게 제시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언어는 거짓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언어는 대상과의 관계뿐 아니라,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罵詈’나 ‘marry’는 각 문화권에서 의미하는 바가 있지만, 한국처럼 세계화 시대를 더욱 급격하게 맞은 국가에게 분열의 빈도나 강도는 세다. 체면을 중시하는 전통적 관념은 물질주의와 결합해 위선적인 문화를 낳았다.




김정인, S. Beach, acrylic, pencil and pen drawing on canvas, 45x45cm (2023)



지정학적 위치에 의거한 외부적 정치 요인의 압박 또한 분열을 가속했다. 이 전시에서 주목하는 욕은 메시지이면서도 ‘수행성’(존 오스틴)을 가진다. 상대를 향해 큰 소리로 욕할 때 그것은 그 자체가 힘의 실행이 되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말과 글은 어떻게 기능을 수행할까를 묻는다. 그의 답은 그것이 다시금 몸짓이 되는 것에 있다. 그것은 ‘논리적이고 논술적인 의도는 축소되거나 종속될 것이고, 언어와 논리의 분절이 아직 완전히 냉각시키지 못한 절규를, 즉 모든 말 속에 잔존하는 억눌린 몸짓, 개념과 반복의 보편성이 거부하기를 그치지 않은 유일하고 대체 불가한 움직임’(데리다)이다. 데리다는 특히 의성어를 중시했던 아르토의 ‘잔혹예술론’에 주목하는데, 그것은 ‘모방적 언어도 명사의 창조도 아닌 단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순간의 초입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와 차이]는 ‘모든 폭력은 개념의 폭력이다’라는 레비나스의 말을 인용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개념의 폭력을 거치지 않는 문장은 없다. 폭력은 분절과 함께 출현하기 때문이다. 시각 예술 또한 언어적 조건과 밀접하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언어의 기본속성인 분절화가 야기하는 거짓이나 폭력에 주목한다. 물론 인간의 언어를 벗어날 수 없기에, 이들의 대안적 언어 또한 분절화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착이나 환원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형가능성이다. 욕은 말이자 행동이고, 말에는 분열적 속성에 의해 거짓의 가능성이 있다. 이 전시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조형적 언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일상 문화의 다양한 소재를 동원하여 짚어본다. 인간이 태생부터 속할 수밖에 없는 상징적 우주는 일찍이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주목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사회란 ‘상징적 체계들의 결합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 첫 등급은 언어, 혼인규칙, 경제관계, 예술 그리고 종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형적 언어인 시각 예술 또한 상징적 우주에 속해 있으며, 제도화는 이에 따르는 부속물에 불과하다. 상징계는 그것이 선택의 여지 없이 강제적이라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언어적 주체는 태생부터 분열적 조건을 가진다. 언어 자체가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기호는 곧 기표와 기의로 연이어 분리되기 때문이다. 코드화된 사회는 아예 번거로운 현실로부터 코드를 떼어내려고 하며 자체의 논리대로 공전한다. 예술은 오랫동안 현실에 대한 환영(illusion)이었다는 점에서 거짓의 요건을 공유한다. 예술이 언어를 거부하고 물그자체가 되려고 했던 현대미술의 사조는 그저 문예사조사의 한 단락으로 끝났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언어와 현실의 관계다.  




김철환, Boom 뚱이, 캔버스에 아크릴, 플라스틱, 92 x 73cm (2023)



최민경, 뱀과 사다리, 디지털 프린팅, 200 x 270cm (2023)



김정인의 작품 [Liar, Liar]는 거짓말을 일삼는 존재의 이미지에 눈동자를 없애고 얼굴을 까맣게 칠했다. 거짓말의 목적인 자신을 돋보이려는 속내는 왕족의 의상과 왕관을 활용했다. 거짓이 말과 연결됨은 노랑 바탕에 낙서처럼 씌여진 단어들을 통해서도 재차 강조된다. 또 하나 주목될 점은 거짓을 감추기 위해 거짓들이 무한 재생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품 [S. Beach]는 거짓말과 상호감시의 관계를 말한다. 진실할 수 없는 조건은 감시를 넘어서 스스로 검열하는 단계다. 참새떼처럼 똑같이 보이는 개체들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환상 또한 깨뜨린다. 김정인의 작품에서 감시당하는 개체들은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본다. 대중개인주의는 같은 것을 욕망하는 소비자를 말한다. 캐릭터를 차용한 김철환의 작품은 배경에 ‘BOOM!’이라는 단어를 가득 채웠다. 작가에 의하면 이 단어는 ‘폭약의 반응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인지과정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코드화되어 인터넷으로 수렴되는 소통상황에서 정보소비자들은 정보의 범람 속에서 놀라운 것에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팝콘 브레인’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을 지경이다. 뇌가 최소화되고 배불뚝인 당근 모양의 캐릭터는 사고의 축소화와 소화불량의 상태를 말한다. 


김철환이 그림 속 도상 일부를 흐릿하게 처리한 것은 자극적인 정보들이 확실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팝콘처럼 부풀려지고 무의식중에 소비하게끔 코드화된 정보이자 상품들은 비만처럼 인간을 좀먹을 것이다. 최민경의 작품 [뱀과 사다리]는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옮겨 아래 칸으로 내려앉거나 위로 올라가서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면 이기는 오래된 게임을 차용한다. 디지털 프린트로 된 작품은 관객이 참여할 수 있고 가져갈 수도 있다. 추락을 상징하는 뱀은 어둡거나 화난 얼굴로 귀결되고, 그 반대는 스마일이다. 장난감이 변변치 않았던 50여년 전에도 있던 놀이판이 반가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상과 벌의 기준이 모호하다. 인류학적 입장에서 놀이를 연구했던 로제 카유와의 분류에 의하면 우연 놀이(알레아)인 셈인데, 주어진 목표에만 매진하는 이에게 우연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현대의 시스템이 점점 더 공고해지면서 우연이 아니면 변화의 기회가 없다. 물론 변화에 대한 가치판단도 각자 다르겠지만 말이다. 민주의 작품은 기억 속의 집이 사라진 것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버려진 것들에 대해 집착하게 된 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재개발 공화국에서 이러한 경험이 개인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작품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민주,땅따먹기_팔현, 혼합재료, 가변크기(2023)



고의선, 그냥 나의 위로에요, 크래프트 종이봉투, 차 티백, 디지털 프린트, 각 17x11.5cm (2023)



작가는 대구의 대표 습지들이 골프, 캠핑, 자전거 보도교를 위해 파괴되는 현장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으로 기록하고 이를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작품 [땅따먹기; 23 팔현]은 야생의 자연을 ‘문명화’하려는 진보에 대한 거부일까. 작가는 장기적인 비전이 결여된 발전주의가 결국 ‘문명’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걸쭉한 밀양 아리랑 노래가사에 실어 전달한다. 민주가 재구성한 자연과 문명의 풍경은 부드러운 다양성과 날 선 획일성의 대조를 말한다. 고의선의 [그냥 나의 위로에요]는 이 전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관객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다. 누런 종이봉투 안에 차 티백과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의 디지털 프린트가 들어있다. 이 선물을 가져가는 관객은 달콤한 향이 나는 차를 마시면서 그림과 소설에서 차용된 삶의 위로가 될 만한 문구를 음미할 수 있다. 작가는 지금은 전자메일에 의해 사라지다시피한 편지의 형식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준비된 소통을 기대한다. 차 한잔을 포함한 간접적 소통은 대면이든 아니든 건성건성 하는 일반적 소통에 대한 대안이다. 봉투에 ‘please be nice to me’이라는 문구는 대중적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작품이 다소간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괴감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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