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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우 / 사이의 시공간

이선영

사이의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성민우의 풍경 속 식물들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이름이 없지는 않지만, 대개 풀, 또는 잡초로 불리는 무명의 존재들이다. 무명이기에 존재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작가는 존재보다는 사이를 강조하면서 전시 부제에 포함시켰다. ‘존재’는 ‘있음’에 기초한 과거의 형이상학을 떨치기 위해 일군의 철학자들이 ‘실존’이라는 용어로 바꾸려고 한 관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사르뜨르의 주장에 나타나듯, 실존 또한 인간에 대한 묵직한 관념을 유지했다. 성민우가 채택하는 자연은 존재나 실존 보다 보편적이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한 ‘사이’는 과도기적인 시공간, 즉 변화에 방점이 찍힌다. 자연은 결코 멈춰 있지 않다. 작가의 관찰에 의하면 한겨울의 식물조차 그렇다. 전시 작품 중 하나에 속해 있는 풀들의 이름을 보자. ‘망초, 쑥, 고들빼기, 명아주, 여뀌, 익모초, 도깨비바늘, 달맞이, 비자루국화, 돌콩, 메꽃덩굴...’ 대부분 낯선 이름일 것이다. 




오이코스_사이 227.3×781.8㎝ 비단에 수묵과 은분 2023



하지만 작품 속에 그려진 것들은 어디선가 본,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늘 우리 곁에 있었던 그런 풀들이다. 이러한 호명의 행위(와 그와 연계되는 작품화)는 발견되는 존재들에 세세한 학명을 만들어 붙였던 분류학의 역사에 깔린 소유와 지배와도 사뭇 다른 방식이다. 가령 길고양이가 ‘땡칠이’나 ‘고동이’, ‘콩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 때의 변화에 해당된다. 얼마 전 20년 넘은 세월 갇혀 살던 철장을 벗어나, 멀리도 가지 않고 근처 숲그늘에서 20여분 쉬고 있던 사자가 지레 겁에 질린 인간들에 의해 ‘매뉴얼대로’ 사살됐을 때, 누가 붙였는지 모를 ‘사순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관리자의 실수로 잠시 자유라는 것을 맛본 그 사자의 학명이 '판테라 레오'(Panthera Leo)’이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취약(VU) 등급으로 분류된 국제적 멸종위기종으로 규정’(연합뉴스8.20 인용)된 게 알려졌다면 사태는 달라졌을까. 


사순이가 사살되기 몇 분 전 생전 처음 밟아봤을 수풀의 느낌은 어땠을까. 배고프고 다치고 죽어가는 동물에는 표정이 읽히지만 식물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하지만 안목 있는 관찰자에게 식물 또한 감정을 이입하고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이다. 식물은 동물보다는 더 간접적이다. 식물은 동물보다 거리감이 있고 그래서 더 심미적일 수 있다. 성민우의 작품들은 길가에 발에 채이는 잡초마저도 연금술적인 변화를 거쳐 우주적인 풍경이 되곤 한다. 동물의 경우 식물과 공생하는 곤충들로 나온다. 곤충은 작가가 수집해 오는 풀들에 딸려오며 작업실에서 서식하기도 한다. 작가가 곤충에 주목한 것은 그 ‘가벼움’이 좋아서였다. 작가는 작품 속에 별자리 위치에 곤충을 배치하기도 했다. 작품 속 존재들이 화려한 꽃이나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는 점에서 ‘유용’하거나 신화와 종교의 고전 중에 등장하는 유명한 소재도 아니다. 신화가 호명되었던 경우는 이전 작품 [오이코스_코레의 부케] 시리즈에서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의 아명인 ‘코레’가 있다. 




오이코스_숲 193.9×521.2㎝ 비단에 수묵과 금분 2023



 오이코스-다섯번째 계절II 193.9×781.8㎝ 비단에 채색과 금분 2021



작가에 의하면 코레는 한겨울에도 멈추지 않고 발아와 생장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시간을 상징한다. 쓸모와 이윤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별하는 입장에서 잡초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작가는 이번 전시 [Oikos_사이]에서 그동안 사용해왔던 오이코스라는 키워드(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사는 곳’이라는 뜻이 있는 그리스어로 영어 접두어인 ‘eco-’에 해당한다)에 ‘사이’를 붙여 강조했다. 작가는 ‘사이가 채워지며 존재는 드러난다’고 하면서 존재와 사이의 선후 관계를 바꾼다. 유용한 가치로 뭉쳐진 큰 덩어리가 존재라면, 작가가 주목하는 풀은 존재의 사이에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 기타의 것들, 요컨대 나머지들이다. 중심이 아닌 주변이고 동일자가 아닌 타자이다. 대개 잡초라고 불리는 것들은 농사를 짓거나 정원을 가꾸는 입장에서는 제거 대상이다, 쫙 펼쳐져야 할 잔디에 한두포기라도 있다면 오점이 된다. 촘촘하게 코드화된 도시에서 잡초는 빈틈, 말 그대로 사이에서만 서식가능하다. 


허름한 담장 아래, 오래되어 금 간 바닥, 또는 어느 날 세워진 도시계획에 의해 일괄적으로 식재된 가로수 옆에서 잠시 자리할 수 있다. 도시에서 잡초는 방치와 폐허의 기표에 불과하다. 작가는 그러한 미소한 존재들에 기념비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큰 화면도 그렇고 금분, 은분을 사용하여 그것들에 후광을 부여한 것도 그렇다. 에바 헬러의 [색의 유혹]에 의하면 성인들의 머리 위에 그려지는 후광은 아우레올레(aureole)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금을 뜻하는 아우름(aurum)이 그 어원이라고 한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금은 광택 때문에 시각적으로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무거운 금속이다. 성민우의 작품에서 금색은 그 위에 칠해지는 먹의 색을 변조시킨다. 작품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게 되는 풀들은 어디선가 내리쬐는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 발광하는 듯한 느낌이다. 금의 실제적인 무거움은 상징적인 의미의 무거움으로 대치된다. 풀은 크지 않은 화면에 나타날 때도 마치 귀중한 초상처럼 화면 한가운데 안치된다. 




풀의 초상 162.2×130.3㎝ 비단에 수묵과 은분 2023



풀의 초상 162.2×130.3㎝ 비단에 수묵과 금분 2023



풀들은 폭우나 강풍 같은 거친 자연력 속에서 이러저리 몸을 뒤척인다. 풀들은 유연해서 다가오는 힘에 몸을 싣고 고난을 견뎌낸다. 계절의 변화는 풀에게 형태를 변모하게 할 뿐 무(無)나 죽음이 아니다. 우리는 늘 ‘마지막 잎새’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에 주목하지만. 매해 같은 자리에서 싹을 틔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풀만큼 희망적인 존재가 있을까. 위대함보다는 불길함에 가까운 용어로 다가오는 ‘인류세’ 시기에는 인간이 야기한 원인에 의해 식물들은 뿌리째 불타 재가 되곤 한다. 문명과 가까이 있는 풀들은 밟으면 밟히고 뽑으면 뽑히고 베어내면 잘린다. 그것들은 뭔가 더 중요한 존재를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고 간주된다. ‘민초’라는 민주주의적 사상처럼 작가는 배경을 전경화한다.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거처하는 것들을 눈높이로 일으켜 세운다. 성민우의 작품에서 풀은 졸(卒)이 아니다. 작가는 풀의 여러 가지 면면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것을 작품화하지만, 대상을 알고서 지배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재현주의에 충실하지는 않다. 


물론 작가의 작업실에는 그리는데 참조하는 마른 풀더미들이 여기저기 산재한다. 현대미술 작가에게도 실제는 상상보다 중요하다. 사실, 인간이 상상한 것들은 모두 자연에 있다.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을 포함하지만, 예술의 구성적 힘을 발휘한다. 풍경은 일견 자연스럽지만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작가는 적극적으로 구성하지만, 소재를 완전히 분해해서 조형적으로 끼워 맞추는 식의 무리수도 두지 않는다. 실제 자연은 한 지역에도 여러 종류의 식물이 공존한다. 산 것과 죽은 것이 함께 하기도 한다. 가로 길이가 거의 8미터가 가까운 작품 [Oikos_사이](2023)는 수묵화지만 비단에 은분과 금분이라는 재료는 화면 전체를 잔잔한 빛을 머물게 한다. 은빛으로 칠해진 비단 위에 먹으로 그려진 작품 속 식물은 특정 광원에 의해 비춰지는 재현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천상으로부터 무상으로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인 빛을 붙잡아 다른 생명에게 필요한 물질로 전환시키는 기제를 내포한다. 




 풀의 초상 162.2×130.3㎝ 비단에 수묵과 은분 2023



 풀의 초상 116.8×91.0㎝ 비단에 수묵과 금분  2022



광합성을 비롯해 식물에게 일어나는 과정들은 존재보다는 사이에 방점을 찍을 때 더욱 공감된다. 변화가 일어나는 ‘사이’의 시공간은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패널을 이어 붙여서 더 길게도 확장될 수 있는 그림은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며 풀밭 길을 좋아하는 이가 무한정 걷고 싶었을 거리를 전시장에서 소화할 수 있는 규모만큼 축소했을 따름이다. 이동하면서 보는 관찰자의 입장을 고려해, 단순한 그림 걸기를 넘어서 연극적인 설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어떤 부분을 봐도 시선을 붙잡아 두는 화면의 밀도를 생각할 때 짧은 ‘거리’는 아니다. 작품 [오이코스_숲](2023) 또한 가로 길이가 5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금분이 사용되어 화려하다. 이 작품에는 최근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생장과 번식을 멈춘 겨울 풀’이 담겨있다. 작가는 ‘생장을 멈추고 줄기와 잎의 수분이 다 빠져버린 겨울 풀은 더 견고하고 강건하게 자신의 형상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겨울이어도 대낮의 빛을 한껏 받은 풀(쑥과 억새, 익모초와 도깨비바늘, 명아주, 바랭이, 환삼덩굴 등)의 질긴 부분들은 황금물결을 이룬다. 


자줏빛 배경은 금빛 형상들을 강조한다. 8미터 가까운 작품 [오이코스_다섯번째 계절II]는 202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그것은 ‘황금빛 겨울 풀과 푸른색 풀벌레들로 사계절의 별자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쓸쓸한 겨울 풀밭을 우주적 풍경으로 승화한다. 대부분 일년생일 풀은 한겨울에 지푸라기 같은 껍데기만 남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풀벌레 또한 땅속 깊은 곳에서 다음 해를 기약할 것이다. 지상에서 보는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별자리는 상대적인 항구성을 가진다. 붉은색 배경 때문에 더욱 빛나는 황금색 풀은 예술작품을 통해 영원함을 상징하는 일종의 표본이 되었다. 그자체가 연금술같은 신비한 생명체는 시각의 연금술로 재탄생한다. 에바 헬러는 돌에서 금을 얻을 수 있다고 굳게 믿은 연금술사들이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의 원칙에 따라 주로 금색의 재료를 가지고 실험했다고 전한다. ‘현자의 돌’, 즉 ‘일상적인 물질이 금으로 변화하는 비밀스런 과정’(에바 헬러)은 하찮은 풀이나 곤충이 우주적 광경의 주인공이 되는 성민우의 방식과 다를 바 없다. 




 풀의 초상 116.8×91.0㎝ 비단에 수묵과 금분  2022



오이코스_부케 116.8×91.0㎝ 비단에 채색과 금분  2022 



연금술 뿐 아니라 미술의 역사에서도 금(색)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바 헬러는 중세 회화에서 금은 천상의 빛을 상징하여, 1500년까지 성스러운 주제는 늘 금 바탕에 그렸다. 평범한 풀이 성화(聖畫)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그러한 동서고금의 전범이 있기 때문이다. 풀벌레 500여마리가 각 계절 별자리에 위치하는 작품은 우주적 풍경을 이룬다. 벌레 또한 식물처럼 변형(변태)하며,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겨울에도 ‘살아있다’ 작품 속 동식물의 잠재적인 변모는 ‘멈춰진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성민우)를 표현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에 벌레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풀의 초상]은 금분과 은분 바탕에 수묵으로 드로잉 한 후 채색으로 배경을 칠한 연작이다. 작품 [풀의 초상](2023)은 성인 여성의 키만큼의 높이에 풀을 마주하게 했다. 어두운 바탕색과 대비되는 은분을 사용한 풀 꽃다발은 마치 자개처럼 은은하게 빛난다. 심연 속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빛줄기는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는 풀에 대한 최상의 찬가가 아닐까. 


작가는 이와 관련된 노트에서 ‘풀처럼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에너지를 크게 발산시키는 생명체가 또 있을까’라고 묻는다. 작가의 관찰에 의하면 한여름 한두달 사이에 풀은 크게는 2~3m의 높이로 자라난다. 작가는 풀에서 ‘놀라운 생장의 속도와 수많은 씨앗들’을 본다. 자연이 준 시간을 최대한 부지런히 살아내는 풀들은 때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인간의 삶보다 더 치열한 것은 아닌가. 162.2×130.3㎝의 같은 크기로 제작된 [풀의 초상](2023) 시리즈는 마치 해와 달처럼 황금색과 은색의 색감들이 특징이다. ‘풀의 초상’은 다발을 위에서 바라본 듯 방사형 구도를 가진다. 금분으로 작업한 초상은 태양같은 느낌이다. 둥근 태양도 더 자세하게는 분출하는 화염의 줄기들이 보이듯이, 섬유질만 남은 겨울풀의 빳빳한 선들은 힘찬 발광의 과정을 표현한다. 작가는 풀의 초상에서 부케를 중첩시킨다. 그것은 풀반지처럼 가난한 연인끼리의 소박한 선물로 다가온다. 




 오이코스_부케 116.8×91.0㎝ 비단에 채색과 금분  2022



작가는 ‘풀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는 신부의 아름다운 꽃부케 처럼 부드럽고 달콤하진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작은 꽃과 무수한 씨앗, 뾰족하고 거친 이파리들은 부케를 쥔 손을 아프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부부의 연은 결코 화려한 꽃다발 같지 않다는 메시지다. [풀의 초상](2022) 시리즈는 다른 크기로도 제작되었고 다양한 색의 바탕 한가운데 서서 관객에게 환한 얼굴을 내보인다. 비단에 채색하고 금분을 칠한 [오이코스_부케](2022) 시리즈는 같은 크기의 화면을 통해 한 얼굴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노톤의 강력한 배경 색은 풀이라는 미소한 존재의 실루엣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드러낸다. 성민우는 [OIKOS_begin again](2022년, 갤러리 에이블)전의 작가노트에서 [오이코스_부케] 시리즈에 대해 말한다; ‘모든 생명체의 삶은 화사한 꽃부케보다 거친 풀부케와 더 많이 닮아있다. 흔한 풀의 씨앗 하나가 겪게 되는 발아와 생장, 번식과 멈춤의 과정은 모든 생명체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설명한다’ 


부케 시리즈는 계절의 풀을 한 다발로 표현한다. 풀로 만든 부케는 그 지역과 그 공간에서 만나는 풀로만 구성한다. 그 시공간을 담는다. 보통 10개 안팎의 종류가 한다발을 이루는, 많게는 20여 개까지도 간다. 그 계절에 작가의 눈에 띄는 식물이며, 꽃이 많이 포함될 경우 화려해진다. 이전 작품에는 사계절도 포함했다. 한 화면에 시간을 접어 넣은 회화의 고전적인 방식이다. 둥근 다발은 순환하는 꽃의 생태를 나타낸다. 화려한 꽃이 아닌 풀로 만든 부케는 결혼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걷어낸다. 풀로 만든 부케는 거칠고 가시가 많다. 성민우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수묵 드로잉이다. 밑그림은 거의 없고 마치 식물이 성장하듯이 한번에 그린다. 색이 마르지 않게 쉬지 않고 계속 그려야 해서 작업의 강도가 높다. 종이를 배접한 캔버스에 다시 비단을 배접해서 만든 비단 캔버스를 사용한다. 자체 제작된 캔버스와 밑 작업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풀의 초상 116.8㎝×91㎝ 비단에 수묵과 은분 2023



색과의 대비를 통해 먹 드로잉이 보다 분명해진다. 점으로 씨앗을, 선으로 줄기를 그리고 배경을 나중에 칠한다. 이번 전시의 수감색(쪽빛 짙은 깊이 있는 푸른색) 바탕은 풀에 우주적인 차원을 부여한다. 검정이 끝이라는 느낌(마찬가지 맥락에서 전적인 시작인 흰색도 지양된다)이라면, 수감색은 변화에 대한 잠재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 먹자체가 하나의 색으로 환원될 수 없는데, 성민우는 바탕색과의 대비를 통해서 작품마다 다른 빛의 먹을 구사한다. 수묵이지만, 금분이나 은분 위에 칠하므로 진주빛이 돈다. 먹색과 어울리는 채색을 조색하는 것이 포인트다. 이번 전시에서는 중국의 청록산수나 불교의 탱화를 참조하여 벽돌색, 옥색, 보라색 등이 활용되어 밝고 장식적인 느낌이 강화됐다. 한국 고유의 ‘이금기법’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한 작가는 작품에 금분, 은분을 사용한 계기가 미소한 존재를 귀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실제로 겨울의 들판을 보면 반짝거리는 느낌이 있다.

 

성민우의 조형어법은 전통이나 상징을 넘어서 관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장식적인 화려함은 맥락에 따라서 중요한 의미와 상징이 될 수 있다. 20년 가까이 풀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풀이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사는 강건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삶은 관찰할수록 경이롭다. 작가에 의하면 ‘풀은 자식만큼 예쁘지만 보살핌이 필요 없다’ 그래서 좋다.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선 보살핌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간주되었다. 여성은 출산과 육아 때문에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도 여전히 자연에 묶여 있다고 생각된다. 자연은 운명일까. 보다 깊은 진리일까. 페미니즘을 비롯한 여러 대안의 운동이 있지만 여성-자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다. 단지 점차 자연과 대립 관계에 놓인 인간중심주의가 하나의 성만을 주체로 간주한다면, 여성과 자연이라는 타자와의 유대관계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성민우의 작품에서 풀은 여성/작가로서의 자의식이 투사되어 있다.


 


풀의 초상 116.8㎝×91㎝ 비단에 수묵과 금분 2023



풀은 여러 차원에서 타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자화상을 며느리배꼽 꽃으로 그리기도 했다. 부케에 대한 소재를 끌어들일 때도 바랭이풀처럼 씨앗과 줄기에 가시가 많은 풀로 표현했다. 단독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걸치는, 관계성을 중시해야 하는 여성을 덩굴풀로 상징하기도 했다. 풀로 소재가 중심 이동한 것은 결혼 후 자유로운 이동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성민우의 첫 개인전은 [나무]였지만, 결혼 이후에는 나무가 있는 산이 아닌 들판의 풀이 된 것이다. 작가는 풀에서 많은 형태와 의미를 끌어내면서 2014년 [일년생]을 출판하기도 했다. 2007년 언니의 사고를 겪고 나서 전형적인 여성의 삶에 대해 더욱 곱씹게 되었고, [그녀를 위한 부케]를 그렸다. 2021년 테미창작세터 입주를 계기로, 민초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니 이주 여성들의 삶도 눈에 띄었다. 작가는 이주 귀화한 여성을 환삼덩굴, 박주가리, 메꽃, 살갈퀴, 며느리 배꼽 같은 풀로 표현했다. 한 작가의 꾸준한 탐구는 잡초(雜草)가 개인, 사회, 자연, 우주 등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전; 2023 아트허브 비평지원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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