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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택 / 생명의 끈끈한 힘

이선영

생명의 끈끈한 힘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 작품의 대부분은 꽃을 소재로 한 것 같지만, 오경택에게 꽃은 특정한 소재가 아니라 생명을 상징한다. 그에게 생명은 삶만큼이나 죽음이다. 죽음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는 생명은 묵직하게 다가온다. 자연 그자체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지만, 자연사에 비해 길지 않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비극적 면모가 있다. 병들거나 늙어 죽어가는 동물, 잘려 나가거나 시들어가는 식물을 맨눈으로 보는 것은 힘들다. 더구나 ‘인류세’에 접어들면서 자연은 인간이 가하는 치명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비극은 더 빈번하다. 인간중심주의는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보다 취약한 이들을 희생시킨다. 전쟁으로 치닫기도 하는 인간 간의 경쟁은 희생을 필요로 했다. 자연을 타자화 시킨 인간 또한 타자화된다. 희생, 즉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재난은 회피된다. 사라짐이나 죽음은 사회의 제도적 장치에 의해 순화되어 나타난다. 살았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음에는 삶이 없으니까, 양자의 경계는 굳건할 수도 있다.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06, oil on canvas, 45.5x53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08, oil on canvas, 100x100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이 고대철학자를 인용하듯,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현존하지 않으며, 죽음이 현존하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지상의 기쁨에 대한 가장 큰 낭비’(모파상)로 간주된다. 인류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기술적 진보를 이루도 했다. 하지만 자연으로 대변되는 실재를 부정할 수 없다. 예술은 종교만큼은 아니어도, 자연을 장기적으로 볼 수 있다. 오경택의 작품에서 꽃이 아름다운 자태 그자체로 재현된 것은 거의 없다. 오랫동안 지속된 [꽃이 피네, 꽃이 지네] 시리즈에서 보이듯, 시들어가는 모습이 더 많다. 시드는 정도가 아니라 썩은 물도 흐른다. 썩은 물은 ‘늪’이라는 또 다른 소재로 나타난다. 그는 사멸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생겨나는 무엇을 그리기라도 하는 듯하다. 일출만큼이나 일몰의 풍경 또한 아름다울 수 있음이 오경택의의 피고 지는 존재에서 발견된다. 


꽃이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을 펼친 후, 다시 접히는 과정은 물리적 법칙에 의하면 엔트로피(무질서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미적 쾌락은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전화,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에 의한다. 작가에 의하면 죽음은 ‘흩어져서 풀어지는 느낌’이다. ‘생명의 끈끈한 힘’을 강조하는 작품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꽃은 단독으로 피어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유화물감의 끈적함은 또렷하게 자기항상성을 유지하던 개체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린다. 작가는 자유로운 붓터치에 칼까지 쓰기 때문에 와해의 강도는 더 크다. 활짝 핀 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지는 모습을 보거나 상상하기 싫다. 오경택에게 꽃은 피는 만큼이나 진다. 작품 속 꽃들은 중간단계다. 핀 꽃은 이미 지는 과정을 진행한다. 여러 층의 유화물감과 긁어내기 등이 교차로 이루어져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은 시간성을 내포한다. 긁혀서 밖으로 드러난 밑층의 색은 꽃을 얼룩지게 한다.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12, oil on canvas, 112.1x162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18, oil on canvas, 80.3x116.8



꽃은 이미 수없이 피고졌을 것이다. 지면서 변형된 잎들은 층층이 쌓였을 것이며, 흙이 되어 다음의 발아와 성장, 개화를 추동했을 것이다. 식물은 이렇게 주기적으로 부활함으로서 인간에게 순환에 대한 관념을 제공했다. 꽃이 지는 것은 비극적이지 않다. 직선적 세계관은 그것을 종말로 보지만, 순환적 세계관은 또 다른 출발로 간주한다. 상처처럼 긁힌 흔적들로 가득한 꽃들은 자연의 순리를 압축한다. 작품 [꽃이 피네, 꽃이 지네](2006)에서 작가는 얼룩의 빈도와 강도가 다른 4개의 패널을 붙인 작품에서 변화에 대한 감각을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서 보여준다. 바탕에서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모호한 식물형태는 피고지는 과정을 동시에 표현한다. 영겁회귀는 무한히 되돌아오는 순환적 사상으로, 시간이라는 축으로 펼쳐지지만, 회화에서는 영겁회귀의 공간이 된다. 그의 작업 과정에서 그리기만큼이나 중요한 긁기는 지우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층을 드러내는 긁기 또는 지우기는 시각적으로는 다른 색과 형태가 그려지는 과정과 같다. 정사각형이지만 완전 직선은 아닌 화면의 가장자리 또한 변화에 대한 감각을 보여준다. 오경택의 세계에서 고정된 것은 없다. 2003년 6월 월간미술에 실린 작가 노트에는 ‘영구적인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생명을 지니든 지니지 않든 사물들은 쉼 없이 활동하는 빛의 작용과 함께 어울리고 일렁이며...색은 끝없이 소멸해 가는 삶의 순간들을 색채로 포착하여 수많은 다양한 표정들을 담아낸다’고 말한다. 이를 위한 방법론은 ‘빛에 의한 사물의 굴절 속에서 소멸하는 사물을 부서지는 색채로 포착하는 것’에 있으며, ‘끊임없이 진화해가는 자연, 그 속의 생명과 호흡하며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작품에서 물질과 비물질은 질적 차이 없이 같은 과정을 공유한다. 작품 [꽃이 피네, 꽃이 지네](2012)에서 두툼한 질그릇같은 화병 위의 꽃들 또한 그 질감이 화병 못지않다.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22, oil on canvas, 73x50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23, oil on canvas, 100x100 (1)



꽃이 피네, 꽃이 지네, 2023, oil on canvas, 100x100 (2)



작가는 이에 대해 ‘두툼하게 쌓아 올린 물감의 질감에서 느껴지듯이 우리의 질그릇에서 볼 수 있는 투박하고 고졸한 미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흙으로 만든 질그릇 모양으로 화분’과 변형된 꽃은 동질이상의 관계다. 정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아래를 향하는 꽃들은 힘껏 어두운 공간을 밝게 비춘다. 2022년의 작품도 고온의 열기를 거쳐 단단해진 흙인 화병만큼이나 견고해 보이는 꽃은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다. 양감의 표현을 자제한 작품은 재현이자 추상이다. [꽃이 피네, 꽃이 지네] 시리즈는 최근에 제작된 작품까지 핀 꽃이 지고 뭉개지며 해체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2023년 작품은 꽃을 이루는 요소들로 분해된 흔적들이 바탕과 한데 뒤섞여 있으며, 해체의 정도는 작품마다 다르다. 꽃으로 상징되는 생명이 형해화된 모습은 늪과 중첩된다. ‘늪’이라는 다소간 음침한 소재는 ‘거닐다’라는 동사와 결합하여 부정적 기운을 떨친다. 꽃들이 피어있는 길처럼 늪 또한 산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실제 모델은 우포늪이다. 그는 거기에서 ‘벗겨진 피부같은 내 마음’을 보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들은 매우 어두웠다. 초상을 그리면서도 긁어낸 형식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꽃이나 늪 같은 자연은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하지만, 인간은 얼굴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화상이면 자학적이고 익명적 얼굴이라면 가학적일 터이다. [늪을 거닐다](2009)는 형태와 바탕이 분별 불가능한 카오스로서 늪의 모습이다. 늪이 아니더라도 여러 층의 물감이 칼질에 의해 노출되는 그의 작품은 오래된 단층도 연상시킨다. 자연에서 혼돈의 힘을 강조하는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지구의 역사가 읽히는 중첩된 지층들을 강조한다. 미셀 세르는 이러한 지층들을 ‘세기들이 축적되어 시간의 책을 활짝 펼치는 거대한 기록부’라고 비유한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문서처럼 오래된 것, 헌책방처럼 오래된 것이다. 




늪을 거닐다, 2009, oil on canvas, 50x72 (1)



늪을 거닐다, 2009, oil on canvas, 50x72 (2)



늪을 거닐다, 2009, oil on canvas, 109.4x162.2



미셀 세르가 지층같은 자연과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저 오래된 것에 대한 취향이 아니라 ‘연결하고 접속하는 활동’에 대한 비유가 되기 때문이다. 미셀 세르는 우리가 잠겨있는 관찰환경의 공간은 카오스라고 말한다. 그는 [헤르메스]에서 ‘어떻게 우연에서 필연이 나타나는가. 어떻게 카오스에서, 다수들의 안개에서 어떤 역사와 시간, 또 어떤 역사와 시간이 도래하는가’를 묻는다. 물론 예술이 단순한 카오스는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은 카오스가 아니라 비전이나 감각을 내어주는 카오스의 구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은 조이스의 말대로 하나의 카오스적 우주론(chaosmos), 즉 구성된 카오스를 구축한다. 단층처럼 노출된 부분은 예기치 못한 것들을 연결시킨다. 오경택은 최초의 생명이 발생했다고 가정되는 걸쭉한 원시 스프같은 늪 이미지 위에 녹색 계통의 색으로 채워진 원들을 띄워 놓았다. 


색의 상징을 생각해 볼 때 생명의 입자 같은 모습이다. 큰 것도 작은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붙어있다. 입자는 이합집산을 통해 형태를 구성하거나 해체할 것이다. 코스모스는 카오스로부터 발생한다. 물론 다시 카오스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늪이라는 소재에 대해 ‘늪은 생명을 쏟아내며 다시 거두어 썩혀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 속에 스미는 우리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담담한 색으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다’(2009)고 말한다. 붉은색 원을 띄운 [늪을 거닐다](2009)는 다른 작품에서 녹색 원과 상보적이다. 늪 같은 원초적 혼돈에서 형태가 나온다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형태가 더욱 잘게 쪼개지며, 더불어 드러나는 바탕도 보다 균질화된 늪은 생명이 시작되고 되돌아가는 장소다. 작품 [흔적](2008)에서 늪의 풍경에 떠 있던 둥근 형태들도 다른 작품의 꽃들처럼 해체의 수순을 밟는다. 바탕과 구별하기 힘들만큼 닳은 형태는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재료가 될 것이다. 




우리들 이야기, 2022, oil on canvas, mixed media, 70x40 (1)



우리들 이야기, 2022, oil on canvas, mixed media, 70x40 (2)



피고지는 꽃이든 늪이든 예술작품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비유다. 작품 [꽃이 피네, 꽃이 지네](2018)는 다른 작품에 비해 꽃대가 강조된 모습으로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푸른 배경은 지상의 이 작은 존재들에 기념비적인 차원을 부여한다. [우리들 이야기](2022)는 꽃이나 늪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도시를 표현한다, 작품 소재가 된 산동네는 자생적이긴 해도 건축적 풍경인지라 선들이 있다. 그는 칠해지고 긁힌 작은 조각들을 꼴라주 하여 산동네 풍경을 만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진 인공구조물이 아니라, 삶의 굴곡 선을 따라 자라난 장소다. 그곳은 문명과 자연의 중간 지대다. 이 시리즈는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있는 만큼 다양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 이야기] 시리즈의 실제 모델은 오랜 달동네인 감천마을이다. 작가가 직접 수집한 낡은 판자들을 손봐서 붙인 마을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삶의 흔적들이자 ‘기억 되어야할 아름다움’이다. 


그가 작품으로 재구축한 오래된 마을은 자연화되고 있는 문명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경택의 복합적인 작업 방식은 자연이든 문명이든 오래된 것, 또는 변화과정인 것을 표현하기에 적절하게 진화됐다. 수집한 재료를 포함한 여러 재료로 손수 캔버스를 제작하는 그는 판넬에 캔버스 천 씌워서 유화로 10단계 이상을 쌓은 후 커터칼로 긁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여러 층의 물감이 깔려있는 그의 작품은 묵직하며, 물감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애써 도포된 물감을 다시 긁으면서 숨어있던 내부의 색이 나오게 된다. 시간 차이를 두고 여러 겹 칠한 두터운 물감층이 제대로 말라야 긁기가 가능하므로 여러 개를 놓고 동시에 작업하며 잘 기다려야 한다. 작가는 이 과정에 대해 ‘오랜 시간의 기다림과 겹 칠로 서로 다른 물감층이 형성되고 그것은 인간 삶의 세월과 축적된 흔적을 투영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유화의 부드러움과 거친 표현이 공존하게 된다. 칼로 긁어낸 화면은 여러 층의 색이 눈에서 섞여서 중간색으로 보인다. 밑판이 필요한 것은 긁는 과정 때문이다. 




흔적, 2008, oil on canvas, 100x100



그렇게 액자 없이 두꺼운 틀로 작품은 완성된다. 어떤 장면도 빈티지한 느낌으로 마무리시키는 긁기 작업은 단지 시각적인 효과를 넘어서 일종의 여백같이 작용한다. 그는 이에 대해 ‘여백은 트임과 창조를 기약해주는 살아있는 공간을 의미하며, 물감을 쌓아서 긁고 남긴 면을 통해 자연이 순환하는 에너지를 틈에서 찾는다’고 한다. 자연의 생멸 과정에 주목하는 오경택의 작품은 이합집산하는 입자의 운동이 담겨있는데, 이때 여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말을 빌어 원자론자들에게 빈공간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말한다. 모든 것이 꽉 차 있다면 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고대 원자론]은 안티페리스타시스, 즉 꽉 찬 공간에서 줄지어 일어나는 순간적인 대체 순환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과는 명백히 대립하는 고대 원자론의 세계에서 빈 공간의 위상을 강조한다. 


물질 입자들이 추는 끊임없는 춤은 원자들이 운동하는 공간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계들은 이제는 사라진, 영원히 분해된 세계들에서 흘러나온 잔해들로부터’ 형성된다. 장 살렘은 원자론의 논제들이 관념론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인 경험의 지반 위에 서 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그것은 ‘운동의 경험, 침투 및 상호 투과의 경험, 만물의 마모와 침식,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존재들이 어쩔 수 없이 흙과 먼지로 되돌아가는 경험’에 바탕한다. 영원의 필연성을 믿는 형이상학이 원자론을 금기시한 이유다. 영원 또한 상대화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오경택의 유화물감이 차곡차곡 쌓이는 선형적 시간을 흩트리는 긁기 작업은 변화가 가능한 숨통이다. 이러한 불연속의 도입은 숙명이나 결정론을 벗어나는 자유의 영역으로 열려있다. 죽음을 배제한 삶이 아니라 죽음까지 포함하는, 삶에 바탕하는 예술은 보다 많은 변형에 열려있다. 


출전; 천안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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