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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 떠도는 이방인을 위한 집

이선영

떠도는 이방인을 위한 집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민지의 작품에는 풍경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잡아주는 빗방울이 늘 자리한다. 단 한방울이 떨어져도 비가 온다고 말하듯, 빗방울의 밀도는 작품마다 다르다. 화면을 손으로 쓸면 물이 떨어지고 손이 젖을 듯한 생생한 묘사지만, 그리지 않은 부분이 있는 눈속임이 깔려있다. 물방울 하나하나에 모두 존재하는 빈 부분은 재료적 차원에서 한국화에 속하는 작품에 부재한 여백이 편재하는 공간이다. 대개 수묵으로 그려진 풍경화에서는 빈 하늘이 여백 역할을 맡지만, 김민지의 작품은 그곳에도 형태들이 자리한다. 화면과 평행하게 배치된 유리창에 맺힌 것을 묘사한 것이라, 물방울은 재현이면서도 화면의 평면을 강조한다. 물방울의 반사면은 흰색으로 칠한 것이 아니다. 남겨 놓으면 종이보다 하얗게 보인다. 작품에 따라 물방울은 추상하여 하얀 구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가에 의하면 밤에 비 오는 풍경을 찍으면 비가 하얗게 나온다. 




비 오는 139km의 풍경9, 한지에 먹, 91x116cm, 2018



작품 속 물방울들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아 다녀야 하는 서러움, 작업에 몰입할 때의 땀나는 노력 등도 포함할 것이다. 빗방울이 맺혀 있는 풍경은 2016년 대학 3년 때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29세인 현재도 하고 있으니까, 20대 전체를 관통하는 시기에 걸쳐있다. 작가는 방학이자 장마철인 7-8월에 자주 이동하던 경험이 반영된 듯하다고 말한다. 작품들이 너무 비슷한 분위기로 가는 것 아닌가 염려하면서 여러 변화를 주곤 했지만, 추상적인 차원에서라도 화면에 자리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무의식에 그 형상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풍경을 쪼개고 재조합하는 실험에도 빗방울로 추정되는 형상은 빠지지 않는다. 다 칠하지 않고 빈 곳을 남겨두는 빗방울들이 품고 있는 여백은 수묵을 동양화에서 보이지 않는 중심을 차지하는 조형적 요소를 포함한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나무 판넬에 장지를 입히고, ‘옆에 있는 자연스러운 재료’인 먹으로만 작업한다. 번짐은 없다. 


작가는 ‘먹만 쓰지 방식은 채색화’라고 말한다. 옅은 색부터 계속 쌓아 올리면서 깊은 공간감을 표현한다. 유화와 달리 몇 번을 쌓아도 위로 나오지는 않고 종이 안에서 다 나온다는 점이 매력이다. 깊은 풍경 위에 펼쳐진 물방울들은 저편을 흐릿하게 하는 방해꾼이 아니라, 일종의 숨구멍같은 통로가 된다. 창밖 풍경은 대체로 좋았을 터인데,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그곳들이 어디인지는 더욱 알 수 없다. 정착하고픈 마음이 투사된 나무나 집은 비교적 또렷하게 잡힌다. 작품 제목을 통해서 출발-도착지까지의 먼 거리가 제시되곤 한다. 김민지의 대표적인 시리즈인 [비 오는 139km의 풍경]에서 ‘139’라는 숫자는 고향 인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이며, 이후 거주지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제목의 숫자는 고정됐다. 청소년기부터 타지 생활을 한 작가에게 본가가 있는 고향과의 거리가 기준점이 된 것이다. 정착할 수 없는 상황은 작가만의 특수성이기 보다는 보편적인 체험으로 다가온다. 




비 오는 139km의 풍경4, 한지에 먹,  72.7x116.8cm, 2018



비 오는 139km의 풍경6, 한지에 먹, 72.7x90.9cm, 2018



비 오는 139km의 풍경14, 한지에 먹, 22.x27.3cm, 2019



‘유목’이라는 개념은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키워드로 부족하지 않다. 자크 아탈리는 20세기에 쓴 책 [미로]에서 21세기에는 적어도 인류의 10분의 1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에 의하면 뿌리의 개념은 점차 희박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민이나 소비자 배우자 혹은 노동자가 되듯이 앞으로는 유목민이 된다. 자크 아탈리는 세 종류의 유목민을 구별한다. 하이퍼 계급 구성원인 부유한 유목민, 생존을 위해 평생 이동해야만 하는 가난한 유목민, 마지막으로 한 곳에서 정착해서 칩거하는 대다수 가상 유목민이다. 경제도 달라진다. 자크 아탈리는 유랑경제의 복귀를 선언하면서,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리고 미공개 흥행물과 환상적인 관광을 찾아 떠나는 중산층들의 가상 여행, 그 밖에 새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떠나는 특권층들의 현실적인 여행’의 예를 든다. 물론 자크 아탈리 외국인 노동자, 정치적 망명자, 자기들 땅에서 쫒겨난 농민들의 예도 든다. 


제일 마지막 부류에 대해서는 9월에 소양댐 5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물의 나라에서] 전에 출품하는 작품에 반영된다. 그것은 소양댐 때문에 생겨난 수몰민에 대한 것인데, 이주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진 수몰민과 작가의 연결고리는 이주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힘에 의한 이동. 계속 이동하는 삶에 대해 말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강제적 이동은 땀과 눈물은 물론 피도 뿌린다. 작가의 잦은 이주는 수몰민의 상황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 학창 시절을 마친 작가에게 유목은 보다 나은 작업의 기회를 찾는 이동으로 향한다. 20대 초반에 확립된 형식이 유지되는 것은 작가의 상황에 연속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특유의 먹색 때문인지 그림자처럼도 보이는 풍경들은 물방울이 맺힌 창 때문에 불투명성을 더 높인다. 작가는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 풍경을 보는 듯하지만, 결국은 심상이다. 다가오면서 멀어지는 풍경들을 향해 수시로 사진을 찍으면서 자료를 축적해 나간다.




비 오는 139km의 풍경18, 한지에 먹, 162.2x112.1cm, 2019



작은 숲, 한지에 먹, 200x140cm, 2020



하지만 풍경의 정확한 모습은 심상으로 변형되기 위한 출발, 또는 단서에 불과하다. 만약 달리는 차가 아니라 그냥 또는 우산을 쓰고 직접 비를 통과한다면 저렇듯 명상적인 분위기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비바람을 맞으며 걷는 사람은 자연과 대결하지만, 차량 속의 승객은 보다 심미적인 거리감을 가질 수 있다. 험한 바깥 날씨는 집이든 차든 실내를 평소보다 더 아늑하고 차분한 공간으로 만들 것이다. 작가는 모든 풍경을 마음속에 담고 그것을 작품으로 꺼낸다. 단지 눈에서 눈으로의 이동이 아닌, 달리는 차에 실은 육체적 체험이라는 매개가 중요하다. 김민지의 시선과 달리, 요즘 장거리 이동을 하다 보면 창밖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미디어 기기에 시선을 고정한다. 디스플레이를 스크롤 하는 손놀림은 어떤 항목도 주의 깊게 보는 것 같지 않은데, 특별히 볼 게 없어도 습관적으로 미디어 기기에 의존한다.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그것에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미디어 권력이 커지는 요인이다. 개인은 항목을 터치하는 정보소비자로 입자화된다. 곧 도래할 자율주행의 시대는 아예 차라는 거대한 스마트폰 속으로 사람들을 들여보낼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디스플레이가 거의 벽돌이나 유리창 정도로 보편적이 되면 집 또한 마찬가지가 된다. ‘윈도’라는 표현처럼 창 자체가 디스플레이가 되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창인 인터넷이 더 포터블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육안을 대체해 나간다. 작가와 풍경 사이에 드리워진 스크린인 버스의 창은 픽셀처럼 이합집산하면서 시야를 결정짓는다. 수묵, 또는 회화라는 철저히 아나로그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에게 편재하는 인공적 창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2017년부터 시작된 [비 오는 139km의 풍경] 시리즈는 수없이 왕복했을 여정에서 만난 풍경들이 사진으로 포착된 후 나중에 그림으로 옮겨진다. 




열 번째 나무, 한지에 먹, 130.3x97cm, 2020



나무, 한지에 먹, 116.8x72.7cm, 2021


 

순간을 고정시키는 사진과 회화의 공조다. 풍경이든 비든 지나가는 시점에서 포착된 것이므로 사진의 도움은 필수지만, 수많은 사진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여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가에 대한 회화적 선택은 있다. 같은 소재가 다른 거리에서 포착된 작품들은 시리즈라는 형식을 빌어 잠재적인 동감을 표현한다. 먹이라는 매체는 흐린 날의 분위기를 모노톤으로 조율하며, 멜랑콜리한 감성을 전달한다. 차가 달리는 속도에 따라 빗방울의 궤적은 달라진다. KTX같은 고속열차의 경우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의 평행으로 흐르기도 하며, 좌석 방향에 따라 빗방울 하나하나는 마치 경주들 하듯이 내달리는 것 같다. [비 오는 139km의 풍경 6](2018)은 버스 안에서 저 멀리 달리는 버스를 보는 시점이 있다. 저 안에도 관찰자 같은 처지의 승객이 있을 것이다. 이때 창은 거울이 된다. [비 오는 139km의 풍경14](2019)에서 흐린 날 짙은 녹음 속에 자리한 집은 더욱 하얗게 보인다. 


집에서 출발했거나 집으로 가고 있을 작가에게 집은 피곤한 이동의 종착지다. [비 오는 139km의 풍경33](2020)에서 화면을 관통하여 굵게 흘러내리는 빗줄기는 창밖 나무들의 기둥과 조응한다. 빗방울이 맺힌 버스의 창과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때에 따라 눈에 띄는 것이 다르다. 나무는 풍경 속의 하나였는데, 최근 단독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작품 [나무](2021)는 이동을 많이 하는 작가에게 뿌리내림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투사된다. 작가와 대상 사이에 창이 있다. 이 스크린은 그자체도 대상이긴 하지만, 후경이 변수라면 창은 상수가 된다. 물론 김민지의 작품에서 창은 투명하지 않다. 빗방울로 인해 늘 뿌옇다. 또한 빗방울은 결코 반복됨이 없다. 청소년기부터 장거리 이동을 해왔던 작가에게 감수성 예민했던 시절에 진하게 다가왔던 풍경은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원초적 장면이 되었다. 지나가는 풍경과 그때그때 달라지는 창(스크린)의 물방울은 반복과 차이의 유희가 일어나는 장이다. 




개인전 나 더하기 나 전시전경, 인천도시역사관, 2021



광주화루전 전시전경, 2022



개인전 ○●나무에 부는 바람 전시전경, 갤러리 밈, 2022



김민지의 작품에서 나무는 정착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작품 [열 번째 나무](2020)는 빗방울의 크기가 커서 창밖의 대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보인다. 나무는 그로테스크하게 관객을 마주 본다. 작가는 [앉은 나무](2022)에서 계속 서 있기만 할 나무를 앉혀놓았다. 정착에 편안함을 더해주었다. 현실과 달리 상상에서 덤은 무한하다. 비를 통과하면서 봤던 나무라 빗방울에 대한 추상적인 흔적을 화면에 남겼다. 작품 [작은 숲](2020)에서는 거의 안 보일 정도의 빗방울이 흐릿한 나무숲의 둥근 실루엣과 어우러진다. 창밖 풍경을 풍경화를 넘어서 좀 더 역동적인 설치의 방식으로 변주하기 위해 작가는 화면을 여럿으로 쪼갰다. 개인전 ‘나 더하기 나’(인천도시역사관, 2021)에서 작가는 같은 크기의 화면 여러 개가 합쳐져서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빗방울 하나가 크게 확대된 화면이 풍경의 부분들과 나란히 배열된다. ‘광주화루’ 전(2022)에서도 정사각형 화면은 사각형 속의 사각형을 넘어서 설치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배치된다. 


작업실에서 아직 진행 중인 [작은 집](2023)은 정사각형 화면에 여러 장면의 단면들이 담겨있다. 그것들은 가변적으로 헤쳐모여 또 다른 풍경을 만드는데, 일정 거리를 두고 보면 작은 그림들은 집이 된다. 비스듬한 산등성이는 뾰족한 지붕이 되고, 가드레일이 있는 풍경은 베란다의 펜스가 되는 식이다. 문 부분은 비워둘 예정이다. 작가가 이동하면서 창밖을 보았을 때의 절실한 희망은 집이었을 것이기에 장면 하나하나는 집의 구성요소가 된다. 20여 개의 그림으로 집을 지은 셈이다. 청소년기부터의 잦은 이동은 이주에 대한 걱정이 없는 집을 갖는 희망을 키우게 했고, 그 목표를 [작은 집]에 투사했다. 집은 나무보다 더 구체적이다. 작가에 의하면 ‘[작은 집]을 이루는 각각의 네모 칸은 주거지와 고향을 이동하는 중 마주한 풍경의 조각으로, 하나의 벽돌처럼 쌓아가듯 조립하여’ 만든 것이다. ‘이동하는 삶을 사는 순간의 심상들이 담긴 감정적 풍경이 축적되어’ 작은 집의 형태를 갖춘다. 




앉은 나무, 한지에 먹, 각 72.7x53cm, 2022



 작업실 전경, 작은 집, 2023



[작은 집]은 유목민의 집처럼 가변적이다. 작가가 설정한 구성단위로 이합집산하는 풍경은 유목적 정체성을 나타낸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유목적 정체성]에서 말하듯이, 흔적들의 일람표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유목민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그것은 변화 중인 풍경 속에서 내가 있었던 장소들의 자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로지 브라이도티에 의하면 더 오랜 여행을 참아낼 수 있는 존재인 유목민은 쉽사리 동화되지 않는다. 유목적 의식은 여하한 류의 정체성도 영구적인 것으로 취하지 않으며, 오직 통과해 지나갈 뿐이다. 김민지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이동으로 고향에서조차 주변인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유목적 정체성’ 즉, ‘누구도 자기 집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로지 브라이도티)이다. 여기에 그 유목민이 마침 늘 변화를 요구받는 현대 예술가라면? 최근 작품에서 하나의 정감으로 물든 풍경이 이합집산하는 풍경 쪽으로 변화하는 것은 유목이 상호연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출전; 예술소통공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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