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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영 / 접점의 순간

이선영

접점의 순간

  

이선영(미술평론가)

 


황지영은 일상에서 시작되는 단상과 상상이 담긴 5호 이내의 작은 화면에 담긴 108개의 작품들을 설치 형식으로 전시했다. 100호 작품들도 그 맞은 편에 걸려있지만, 108개가 모인 작품은 각각이 작품이면서도 한데 모여 또 다른 작품이 된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대표작이다. 작가는 2022-23년 사이에 제작된 이 작품 모음에 [접점의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최근 2번의 개인전 작품들을 볼 때, 작가는 이런 스타일의 작업을 해왔고, 최근 것이라 해도 선택한 것들일 것이고 그만큼 지금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108 번뇌와도 무관치 않은 숫자인 108개의 작품들은 전시장 벽 하나에 자유롭게 걸려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체의 인력에 의해 응집된 군체로 보여진다. 군체는 유기체의 방식과 다르다. 유기체가 총괄적인 관계망으로 부분과 전체 사이의 긴밀한 인과관계를 전제한다면, 군체는 느슨한 연합체를 이룬다. 일렬로 붙여진 통상적인 작품과 달리 관객이 어느 순서로 작품을 보는지는 결정되지 않는다. 




접점의 순간_가변설치_108pcs_장지에 아크릴, 과슈, 오일 파스텔, 연필, 색연필 드로잉_2022-2023



평소에 자신을 찔러오는 ‘푼크툼’같은 구석이 있는 것들을 작품화하듯이, 관객 또한 각자의 눈에 띄는 것을 중심으로 나름의 상상을 엮어 갈 것이다. 가령 펼쳐진 책, 매화의 한 부분, 번뜩이는 빛 등등이 인접 영역에 있다면, 여러 장면들이 엮이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서사가 가능할 것이다. 단편화 과정에서 대상의 스케일도 왜곡된다. 어떤 것은 크기보다 작게, 어떤 것은 크게 나타난다. 어떤 것은 세상을 보는 창의 역할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그자체가 또다른 대상으로 나타난다. 가령 화면을 가로질러 그린 리본이 마치 작은 선물상자처럼 보이는 작품이 그렇다. 그림이라는 형식은 연속적 흐름의 한 단면이라 모호한 구석이 있는데, 작가는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현실은 잘게 잘린 단편이 되었고, 단편들은 이합집산한다. 작가는 다른 전시에서 같은 구성요소를 다르게 배열할 수 있고, 관객 또한 그 작품을 여러 번 볼 기회가 생긴다면, 매번 다른 순서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열린 작품이 된다.


전형적인 장면, 즉 코드화를 피해 가는 방식의 작업이기에 이야기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무의미하게 흐르는 시공간들을 크게 크게 생략하다 보면 단편들만 남게 된다. 현실 을 대체할 만큼 대세가 된 영상의 시대를 연 사진이나 영화도 실제는 단편의 연속일 따름이다. 공간예술인 미술은 합리적인 서사로 이어질 수 있는 간격이 더 급격하게 설정된다. 기존의 신화적, 종교적, 역사적 서사를 거부하고 미술만의 독자적 언어를 구축하려 한 현대의 추상미술은 단 한 순간의 응시로 모든 것을 담고자 했다. 황지영의 [접점의 순간]은 그것이 어떤 시공간의 단편이기에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추상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추상미술에 따라오는, 또는 그것을 지지하기 위한 수많은 이론적 틀거리들이 한 때의 학습, 또는 지적 유희임임을 깨달을 만큼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선적으로 흐르는 듯한 일상적 질서의 정당성에 작가가 회의적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접점의 순간(부분)_가변설치_108pcs_장지에 아크릴, 과슈, 오일 파스텔, 연필, 색연필 드로잉_2022-2023



접점의 순간(부분)_가변설치_108pcs_장지에 아크릴, 과슈, 오일 파스텔, 연필, 색연필 드로잉_2022-2023

 


어릴 때 그림을 시작했지만, 근 40세가 돼서 다시 작업에 몰입하게 된 삶의 간격 또한 일상적 삶이나 제도로서의 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갖게 했다. 작가의 간략한 연대기를 살펴보면, 5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6세에 미술유치원을 다녔으며, 미대 입시도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유명 작가의 화실에 다녔고 고향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로 유학했다. 유명 미대를 졸업했지만, 20대에 작가가 되기 위한 여러 이력 쌓기를 포기하고 27세에 낙향한다. 그 사이에 여성으로서 결혼과 육아라는 기간도 있지만 다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 함에 있어 간격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작가는 본격적으로 다시 작업하기 시작한 시기를 2017년으로 특정한다. 마흔이 넘은 2020년에야 첫 개인전을 했다. 이번 전시인 ‘2023 뉴페이스 인 김해’의 작가로 선정됨으로서 작가로서 가속도를 더 붙일 수 있는 시기에 진입한 셈이다. 재능을 살리는 것도 좋지만 조기교육이 예술 친화적이지 못한 여러 제도들과 부딪혀 조기 실망을 낳게 되는 경우가 있다 보면 그러한 괴리는 황지영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현실에 긴급하게 반응하는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방향은 다르게, 현실과의 거리두기는 작업에 깊이 스며든다. 외부로부터의 명분이 아니라, 딱 다가오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깃거리가 되는 이미지를 계속 쌓아 올리는 과정에 있다. 큰 작업은 필연성이 다가올 때만 시도된다. 주체와 이념, 역사와 진보 등이 주요 화두였던 근대의 거대 서사가 포스트 모던 국면에서 비판될 때 소소한 일상은 새로이 주목받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현대를 생각한다-이미지와 스타일의 시대]에서 일상생활이나 일상과 같은 표현은 사람들이 딱히 무어라 말해야 될지 모를 때, 일종의 만사형통어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일상은 스타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떤 순간에 있어서 전 사회적 관계의 원인이며 결과인, 포괄적이고 전체를 에워싸는 어떤 것이다. 미셀 마페졸리는 이미지가 현재와 일상 속에서의 경험을 강조하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태고의 시간에 연결시킨다고 말한다. 




접점의 순간(부분)_가변설치_108pcs_장지에 아크릴, 과슈, 오일 파스텔, 연필, 색연필 드로잉_2022-2023



접점의 순간(부분)_가변설치_108pcs_장지에 아크릴, 과슈, 오일 파스텔, 연필, 색연필 드로잉_2022-2023



요컨대 이미지는 주어진 환경에 의하여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이 환경을 빚어내는 것이다. 모두가 주목할 만한 중요한 서사를 향해 집약되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대작을 기준으로 한다면, 황지영의 작품 부스러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편들은 자유롭게 결합하면서 또 다른 서사를 만든다. 작은 것들은 유연하다. 작은 작품들도 맞은 편 벽에 걸린 것처럼 100호 크기로 확대될 수 있다. 현재는 108개지만, 그것은 더 많은 작품들로부터 선택된 것이고 배치 또한 매번 달라질 수 있다. 위트있는 장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캔버스보다는 종이가 더 친숙하다. 크기가 다른 작은 작품들이 한데 모여 있을수록 나름의 통일성이 중요한데, 스며들어 나오는 장지의 매체적 특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판넬에 장지 붙여 아크릴, 과슈, 파스텔, 연필 등으로 작업했다. 


작은 크기에 담는 만큼 시적인 함축을 추구한다. 보고 느낀 것에 바탕하면서, 은유의 어법을 구사한다, 많은 작품이 모여있는 [접점의 순간]은 각각의 장면만큼이나 설치방식에서 야기되는 불연속적 간극이 중요하다. 이 간극에서 도약과 비약이 일어난다. 동시에 단절은 연결을 끌어낸다. 간극들은 단지 벽이 중성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치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띄어쓰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띄어쓰기가 되지 않은 문장을 읽기는 힘들다. 공백은 중요하다. 의미의 공백처럼 다가오는 영역에 대해 현대 소설가들은 주목했다. ‘새로운 소설’을 주창한 알랭 로브그리예의 [누보 레알리즘]은 ‘금지된 구덩이, 중심의 공동(空洞), 공백을 텍스트 전체의 생성자’로 간주한다. 이렇게 간격을 두는 것은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낯설게 한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우주의 현실을 이루는 유일한 세부 사항들이 단지 기존의 의미들의 계속성 속에 뚫린 구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공백과 균열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접점의 순간(간절한 마음은 가끔 허망하다)_장지에 아크릴, 과슈_2023



접점의 순간(나의 첫 페이지)_장지에 아크릴, 과슈_2023



그에 의하면 글쓰기는 독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결핍에서 결핍으로 이어지는 작업이다. ‘텍스트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 짜임새 속에서 오고 가며 짜이는 구멍들, 바로 그것’(알랭 로브그리예)에 의한다. 소설 연구가와 마찬가지로 사회학자도 비슷한 취지의 말--‘이미지는 결코 현실의 복사판이 아니며 모든 현실이 속해 있는 하부구조의 반영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밑이 뚫려있는 구멍과도 같은 것이며 눈을 멀게 할 수 있는 검은 태양이다’(미셸 마페졸리)--을 하는데, 그들 모두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대라는 시대정신을 중시하는 저자들이다. 한편 황지영의 모태 언어가 동양화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동양화의 중요한 요소인 여백이 그 간격들과 중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기나 비망록처럼 ‘글 쓰듯, 노래하듯 ’그려온 시간들이다. 깨어있는 정신과 감성으로 잔잔하게 해온 실행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 황지영에게는 언어와 이미지 간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어떤 장면을 보고 생각나는 말이 또 다른 이미지로 꼬리를 물곤 한다. 황지영은 2020년 개인전 [저, 여기 있습니다]의 작가 노트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들. 아주 하찮아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나의 마음에 콕 들어와 박히는 그 무엇. 어젯밤 몰래 눈물을 닦은 휴지, 시들어가는 화분, 하얀 세면대, 달리는 고속도로, 화환을 실은 트럭, 점점 사라지는 아빠. 일부러 숨으려고 한 건 아닌데 예민한 손톱만 뜯고 있었다. 이를테면 별 볼 일 없는 말장난, 어쩌면 단단히 벼른 말투. 쉽게 뱉은 말은 너무 가벼워.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의미심장한 것들....’이라고 쓴다. 작가의 말은 그자체로 작품으로 옮겨질만한 시각적 상상력이 내재한다. 가령 당시 출품된 작품 [감정의 세면대]는 한 화면에 세면대 하나만 가득 그려진 것이었다. 장지에 채색으로 그려진 작품이 자아내는 뿌연 분위기가 감정의 색조를 드러낸다. ‘감정의 세면대’라는 시적 표현은 이미지로 번역된다. 




접점의 순간(아무리 눌러도 소용없어요, 고장이거든요)_장지에 아크릴, 과슈_2023



접점의 순간(조각난 마음)_장지에 아크릴, 과슈_2023



이러한 번역은 동어반복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100호 사이즈로 크게 걸린 작품 [빛나는 목덜미]는 축구선수인 중학생 아들의 목덜미를 그린 것이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쉽지 않은 특이한 일이라는 점은 축구나 미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옆의 기하학적 이미지만큼이나 단순하게 표현된 소년의 목덜미에서 체액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다. 아들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에 대한 공감은 (다른작품에 비해)기념비적인 크기로 표현됐다. 그 옆에 걸린 [흔들리는 마음]은 둥근 추가 평행으로 흔들리는 듯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마음’과 달리 기하학적인 표현이다. 옆 작품과 색으로 연결되면서 누군가에게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할 것이다. 황지영의 작품에서 제목은 상당 부분 이미지와 연관된다. 말과 이미지의 연동 및 시너지 효과를 생각한다. 작가는 단어나 문장을 먼저 생각하고 이미지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명한 순서는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제목을 붙이는 작가도 많다. 


회화적이기 보다는 외곽선이 뚜렷한 많은 작품에서 언어적 상상력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얼룩 보다 선은 보다 분명하게 말한다. 열린 문틈으로 빛이 보이는 [너의 방]은 밖에서 안을 보는 시점이며 상대와 소통하고픈 마음이 전달된다. 이러한 문은 가족 등 매우 가까운 사이에 있다. 작가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다시 시작한 것도 2017년에 돌아가신 부친이 남긴 말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 작품에 자주 보이는 아들 관련 소재도 작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번 전시의 부제 [우린 언제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상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가 주변의 관계망들을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셸 마페졸리에 의하면 ‘이미지의 주술적인 힘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힘이며 사람들 간의 끈적끈적한 관계, 즉 매혹을 불리 일으키는 힘’이다. 미셀 마페졸리는 미술보다 더 보편적인 종교의 예를 든다. 그에 의하면 미학적 인간(Homo aestheticus)과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은 함께하기와 공감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빛나는 목덜미_162.2x130.3cm_장지에 아크릴, 과슈_2023



흔들리는 마음_162.2x130.3cm_장지에 아크릴, 과슈, 연필_2023



너의 방_162.2x130.3cm_장지에 아크릴, 과슈_2023



양자는 모두 연결하고 관계를 맺는 기쁨에 기반한다. 미셀 마페졸리에 의하면 ‘연결(신뢰를 통한)(reliance)’은 우리가 타인과 함께 나누는 이미지를 둘러싸며 이루어진다. 타인과 연결하려는 충동은 논리적이지도 아니며 합리적이지도 않은 신비스러운 결합이다. 예술은 구성을 통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구성하다라는 동사에는 ‘사람들이 협의하고 실제적 상징적 영역을 경계지우며 그럼으로서 접촉하게 되는 것’(미셀 마페졸리)을 의미한다. 유사 이래 여성은 유아독존적인 주체가 아니라, 관계와 소통을 중시해왔다. 가령 아이와 여성의 관계는 모태부터 긴밀하다. 자기 안의 타자인 아이는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 원형적 모델이 된다. 예술 또한 그러한 유연성이 필요하다. 본질과 관념보다는 맥락과 상황을 더 중시하는 황지영의 작품들은 그 하나하나가 단어가 되어 문장이라는 맥락을 만들고, 다양한 상황에서 한 말들은 다양하게 울릴 것이다.


출전; 윤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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