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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 빛의 미로가 만들어 낸 심연

이선영

빛의 미로가 만들어 낸 심연


이선영(미술평론가)



고풍스러운 이국적 실내 풍경을 회화적 장(場)으로 변모시키면서, 창으로서의 회화를 확장시켰던 김진은 최근 5년 사이 흑/백으로 색을 대폭 감축했다. 색이 빠지거나 덮인 그의 화면은 낯설지만 그의 붓질은 여전히 활기차다. 손끝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붓질은 정적인 이미지를 넘어서 움직이는 몸의 흔적이다. 시각성보다는 촉각성이다. 그의 작품은 빛조차도 끈끈하게 흐른다. 붉은색이 낭자하던 이전의 작품이 그러했듯이, 물감과 체액과의 비유도 지속적이다. 빛의 색인 화이트로 가득한 된 화면은 환희의 궤적이다. 환희의 짧은 순간을 순간의 예술인 회화에 담고자 했다. 이전 작품인 [N_either]라는 조어법에 내재된 양가성은 이번 전시의 부제이자 모든 작품의 제목인 [안의 밖, 밖의 안]에도 적용됐다. 명암의 대조가 극대화된 두 무채색의 선택은 빛이 흘러넘치는 실내/외의 극적으로 표현한다. 책이 가득 꽂혀있는 서가라는 기본 모델은 여전하지만, 그곳은 이제 내부로서의 확실성을 잃어버렸다. 







난데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식물들은 그곳이 외부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식물은 빛을 가득 받고 있으며 그자체가 빛이다. 빛이라는 광학적 대상이 화이트 물감으로 해석되자 그 직선성을 잃고 자유롭게 구부러진다. 큰 작품이든 아니든 빛은 폭포수처럼 쏟아지거나 흘러내린다. 최근 작품에서 빛은 최초의 감탄을 상징한다. 그는 여행지 호텔에 들어섰을 때 너무 좋았지만, 하루 자고 났더니 처음의 만족이 연기처럼 사라졌던 체험을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믿었을 때 번쩍하는 최절정의 순간은 그만의 체험은 아니다. 동서고금의 많은 사람의 흠모를 받는 종교적 성인은 후광을 가지기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강하게 원하는 것은 낙폭이 크다. 기대는 실망을 낳고, 원하던 것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음에서 야기되는 불안도 크다. 오징어나 하루살이에게 빛처럼, 죽음에 이르는 욕망일 수 있다. 매 순간 도전받는 삶이라는 투기장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압도적으로 큰 가능성에 대한 욕망, 삶의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되겠나. 


욕망은 신도 동물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만의 특징일 것이며 작가는 그 지점에 작업의 닻을 내린다. 환희의 순간과 빛의 관계에 대해 김진은 영화 [큐브] 1편의 마지막 장면의 예를 든다. 큐브를 벗어난 유일한 탈주자에게 가득 쏟아진 빛은 해피엔딩의 기호로, 러닝타임 내내 가슴 졸였던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악몽같은 큐브의 세계를 탈주한 이는 바보가 유일했다. 바보는 인간적 욕망과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전략이 부족한 이를 말한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만족도 초월도 못한다면, 그저 최선을 다한 후 운을 바랄 수 밖에 없다. 김진의 작업은 극히 인간적인 욕망의 투입 및 산출과 관련된다. 삶과 예술의 끊어낼 수 없는 뿌리에 닿아있다. 천정까지 책이 가득 꽂힌 서재는 유학 시절 그 사회의 외부자일 수밖에 없던 시점이 내포된 소재다. 작품의 지속적인 무대가 되는 서재는 그 안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국외자의 엿보기 시점에서 시작됐다. 이제 그곳은 욕망했던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색이 빠지거나, 정확히는 덮이는 것은 지각과 욕망보다는 기억이나 흔적의 표현이다. 그 어느 것이든 잡을 수 없었던 시공간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내 풍경을 치열하게 그렸던 시간들은 빛의 경험으로 재해석되어 이어진다. 요즘 작품에서 더 그렇지만 서재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30-40대의 그가 자극을 받고 분발했던 기억의 시공간으로 남아있다. 공간에 투사된 욕망은 자리잡기와 관련된다.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그림은 아직 또는 영원히 미지의 영역에 있다. 쏟아부은 열정만큼이나 공허감도 크다. 하지만 작업은 청년기든 중년기든 현실적 계산의 산물은 아니다. 계산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작업 이후의 일이다. 세속적 이익에 대한 계산은 더욱 아니다. 작업에 계산적 요소가 끼어드는 순간, 작업은 그자체가 맹목적이거나 부조리한 무엇으로 다가올 것이다. 작업을 포함한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넓은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은 작품들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없는 여러 상황 변화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작업해왔음을 알려준다. 불혹이니 뭐니 하는 세대별 유형화가 있지만, 김진은 나이가 들수록 고민은 더 많아지며, 작업에 대해 더 날카로워지고 혹독해졌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림은 여전히 투쟁이다. 흰 캔버스 앞에서 스케치할 때부터 관조적 자세는 사라지고, 거의 검투사처럼 붓을 칼처럼 다룬다. 그의 작품은 절제된 형식보다는 내용과 관련된다. 자신이 가고 있지 않은 길을 실험하기 위해 3D 프린터를 활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작업에 매체의 실험을 적용하기 위해 블랙을 네가티브로, 화이트를 포지티브로 전환하여 3D 프린트로 출력한 것이다. 3D 프린터를 활용한 출력을 판화 개념으로 본다면 여전히 열린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그가 재현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과 아직은 기계보다 몸이 더 빠르다는 점이 관건이다. 









최근 몇 년간의 흑/백 버전은 흔적의 느낌을 더해준다. 빛은 색보다 더 순간적이다. 화이트로 표현된 빛이 많을 경우 화면은 거의 추상화다. 그곳 또는 그것이 어디인지 모호하다. 빛이  많을 때는 깜깜할 때와 마찬가지로 잘 안 보인다. 김진은 고전주의 시대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화이트와 블랙을 베이스에 깔고 그 위에 색을 계속 얹다가, 가장 빛나야 하는 부분에 화이트가 찍힘을 본다. 그의 작품에서 화이트가 빛이 된 이유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흰색은 많이 생산되는 색으로 언제나 다른 물감보다 큰 튜브에 담아 판다고 지적하면서 흰색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에 의하며 흰색은 다른 색의 혼합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색이다. 흰색은 순수함과 완벽함은 빛과 비교될 만하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흰색은 빛의 모든 색을 합한 것으로 물리학적, 광학적 의미에서 단순한 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흰색은 시작이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많은 언어에서 하양과 검정은 밝음과 어두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겨난 이름이다. 빛은 그 출발점이 하늘이라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의미를 내포해왔다. 토마스 플린은 [푸코와 시각의 붕괴]에서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인식론에 대해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적 서구에서 창조된 완벽함의 정점은 ‘축복을 내리는 시각’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순결한 마음이 ‘신을 볼 것이다’(마태복음)라는 성경의 약속에 뿌리를 둔다. 빛은 종교가 약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지상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중인 사람들에게 희망과 만족의 기호로 남아있다. 빛으로 가득한 김진의 화면은 순수추상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추상화가 극대화될 때에도 희미하게나마 골격은 남아있다. 골격이 있기에 바닥의 비어있음이 드러난다. 하얀 물감 뒤의 검은 영역도 급작스러운 명암의 반전 때문에 실체가 모호하다. 이 어두운 공간은 표면의 밝은 부유물을 떠돌게 하는 깊은 흐름이다. 











조은숙 갤러리 전시전경



창 부분으로 추정되는 영역이 더 밝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빛 부분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너무 밝은 빛은 어둠만큼이나 시야를 차단한다. 그의 작품은 빛의 미로가 만들어 낸 심연이다. 누군가는 김진의 근래 작품에서 모노크롬을 볼 수도 있지만, 그는 대상만큼이나 추상에 경도되지 않는다. 서재는 여러모로 상징적인 장소로 여전히 그의 작품에 보이는/보이지 않는 골격을 이룬다. 3차원 공간감을 유지함으로서 안과 밖 사이의 유희가 가능하다. ‘안의 밖, 밖의 안 안과 밖’이라는 공간에 대한 의식은 치유를 주제로 한 기획전에 출품한 가로 9미터 세로 3미터 대작에서 먼저 구체화 된 바 있다. 작가는 부산의 숲 산책길을 거닐면서 밖인데도 안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슬비와 바람이 피부에 닿는 순간 밖임을 깨달으면서, 안/팎이 모호해지는 순간에서 치유를 경험했다. 하나 됨의 체험이 치유일 수 있는 것은 대개 상처가 대립과 대결에서 오기 때문이다. 


숲에서 체험한 안/팎의 구별이 없는 공간에 비한다면, 사회는 온갖 구별로 가득하지 않은가. 사회에서의 상처가 자연에서 치유될 수 있는 시/지점을 작품으로 끌어왔다. 실내의 안과 밖은 바깥의 상징인 식물과 빛의 과잉으로 해체된다. 질 들뢰즈는 [주름]에서 안과 밖 사이의 위상에 대해 ‘바깥은 고정된 경계가 아니라 연동 운동에 의해 안을 구성하는 주름과 습곡들에 의해 자극받는 움직이는 물질이다; 안은 바깥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정확히 바깥의 안쪽이다’라고 규정한 바 있다. 어느 한 쪽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주름이 접히고 펼쳐지는 듯한 하나의 판으로서의 세계다. 여기에서 안과 밖의 관계는 뫼비우스 띠처럼 유동적이다. 들뢰즈의 이론적 구도에서 중요한 것은 이원론이 아니라 하나이며, 둘 중의 하나가 아닌 바로 다양성과 연결되는 하나다. 들뢰즈는 그러한 사유를 바로크 시대의 철학가 라이프니츠에서 본다. 













[주름]에 의하면 라이프니츠 철학의 원리는 모든 원리가 한데 다시 접혀지는 하나의 극과 반대로 모든 원리가 각자의 구역을 구별하면서 모두 펼쳐지는 다른 하나의 극을 말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단 하나의 유일한 심연 밖에는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정도에 따라 구별된다. 모든 것은 방식의 양태에 따라 다르다. 들뢰즈는 어떠한 철학도 단 하나의 유일한 세계의 긍정, 그리고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의 긍정을 이토록 멀리까지 밀고 나아가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세계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면서 독특점들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로 압축되어 있고 접혀있고 포괄되어 있는 이 요소들은 세계가 넓혀지고 늘어나게 되는 역량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최소한 바닥 위에 떠 있는 큰 세계, 하나의 장면 또는 거대한 고원이다. 김진의 작품에서 검은 심연 위에 떠서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하얀 선들은 마치 들뢰즈가 비유한 고원들과 비유된다. 


‘생성은 하나의 상승, 고양이다’(질 들뢰즈) 김진의 작품에서 그러한 고원들은 추상적인 선으로 표현된다. 들뢰즈는 또 다른 저서 [천개의 고원]에서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태도 제한하지 않고 계속 방향을 바꾸는 선. 추상적인 선’을 말한다. 그것은 완전한 추상적 선을 구사한 잭슨 폴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다방향적이며 안과 바깥도, 형태나 배경도 갖지 않은 이 선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으며 아무런 윤곽도 그리지 않으며, 얼룩과 점들 사이를 통과해 매끈한 공간을 채우며, 촉지적인 시각적 질료를 뒤섞고 있다’(들뢰즈)는 점은 비슷하다. 추상적인 선들은 자연물인 식물과 인공물인 책은 구별을 와해시키곤 한다. 밖의 식물이 안을 점령할 때 안팎의 구별 또한 그렇다. 서재와 무성한 식물이 공존함으로서 생겨나는 낙차는 낯섦을 통해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요소다. 책이나 식물이나 빛과 관련된다. 하나는 계몽, 다른 하나는 광합성이다. 








서재라는 공간을 기준으로 할 때 다소간 어지러운 화면은 식물이나 책의 체계적 요소보다는 무작위적인 연결의 요소를 강조한다. 나무의 모델이 아닌 리좀의 모델이다. 안과 밖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는 융통성 있는 공간 또한 리좀적이다. 하지만 나무든 리좀이든 땅에 뿌리를 둔다. 아무리 추상의 정도가 강해도 위와 아래가 구별된다. 2019년 이 전시장에서 드로잉 작품 만으로도 전시를 해왔던 김진의 작품에서 선적인 요소는 서가에 가득 꽂힌 책이나 식물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감을 부여할 색은 대폭 삭감되었지만, 중력은 여전히 작동한다. 무엇인가 배우러 간 청년 예술가를 기죽인 엄청난 책들, 그곳의 내부자가 되는 일은 얼마나 힘든 과제였을까. 그러나 그곳이 이제 늙은 제국의 쇠락한 면모가 드러나고 그가 고국에 왔다고 해서 또 내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 예술가의, 아니 현대인의 조건과 맞딱뜨리며 경계의 시공간에 주목하게 된다. 김진의 작품은 이것도 저것도, 이곳도 저곳도 아닌, 부정 어법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의 시공간에서 무엇인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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