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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별 / 상징의 세계를 횡단하는 수레바퀴

이선영

상징의 세계를 횡단하는 수레바퀴


이선영(미술평론가)

  


빈발하는 자연재해, 참혹한 전쟁, 경악할만한 범죄, 그러한 대사건들이 아니어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시키는 일상적 위기들이 편재하는 삶, 사람들은 그러한 실제적인 폭력적 상황이 많아질수록 현실 이외의 세계에서 안도감을 얻는다. 위기가 커질수록 가상세계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진다. 양자는 상대적이어서 한쪽이 강해질수록 다른 한쪽은 약해진다. 가상세계가 화려해질수록 현실은 더욱 회색빛인 것이다. 양극화가 강해지면서 양자 간의 적절한 거리 유지는 더욱 힘들다. 가상은 그 가벼운 무게 때문에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고, 그러한 실험 조건이 놀이처럼 안정적일 때 몰입이 가능하다. ‘실버스타_운명의 수레바퀴’ 전을 알리는 전시 안내 엽서에는 어디에도 본명은 없고, 대신 실버스타라는 가상적 캐릭터 및 'STAR Entertainment'로 이름 붙여진 유령회사같은 기획사가 주최자로 나와 있다. 고은별이 2015년에 창립된 ‘가상세계(인터넷)에서만 존재하는 캐릭터/배우 매니지먼트 회사’다.



실버스타_성배4_캔버스에 유채_53x41cm_2023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소속사 캐릭터/배우들의 프로필과 작품활동, 인터뷰, 뉴스, 공지사항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 입구에 붙은 메타버스 플랫폼 이미지는 가상현실과 전시장의 연동을 제안한다. 관객들이 전시를 돌고 나오는 길목에는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다. 전시장은 타로점같은 형식은 물론, 그것을 사이버 현실과 연계시킴으로서 파생되는 또 다른 도상들로 가득하다. 가상의 기획사부터 주요 도상과 캐릭터들의 특징을 요약한 알림표 등, 전시의 구성요소가 많은 만큼 규칙이 필수다. 전시물을 크게 나누면, 가상과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운용할 수 있는 타로카드와 그 이미지인 원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타로카드에는 이미지가 풍부하다. 타로점은 규칙에 기반한 놀이이기 때문에, 관련 개념어들이 벽면이나 카드 안에 제시된다. 그림 자체가 환영이지만, 고은별은 그 속성을 더 강화했다. 색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도상들의 조합이 기이한 만큼, 색감의 조율로 분위기의 통일을 꾀했다.

 

거기에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수집된 것들이 오롯이 모여있는 아늑한 통일성이 있다. 상징의 세계는 문학이나 철학 등과 겹쳐지는 서사가 있지만, 그것을 시각화하는 힘은 조형예술가의 몫이다. 이미지 없는 서사는 관념적이다. 모더니즘의 기획이 그랬듯이 이미지에서 어떤 서사도 배제하려는 시도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림과 책의 조합은 고은별이 2015년 첫개인전부터 염두에 둔 것이다. 그때 작가는 소설도 썼다. 그 전시는 캐릭터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가의 소설을 추모식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번 전시의 주요 캐릭터이기도 한 실버스타가 쓴 소설을 종이 사람이 연기한 것으로, 일종의 액자 소설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특징이다. 고은별에게 그림은 소설의 삽화가 아니었다. 이야기와 관련은 되지만 이미지 자체가 생성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가 중요하다. 작가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상호작용을 꾀했다. 그 세계가 있음직 해야 설득되며, 설득되는 만큼 힘이 발휘된다. 



실버스타킹덤 월드_제페토 메타버스 플랫폼_가변크기_2021~2023



 실버스타_운명의 수레바퀴展_광명시민회관 전시실_2023


이번 전시는 타로카드만 집중했다. 작가가 보기에 타로카드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긴 상징이다. 타로카드가 상징의 세계라는 점에 끌린 작가는 그 형식을 활용하여 가상 캐릭터로 인생을 이야기한다. 모든 이미지는 그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상징과 상징이 조합되어 또 다른 서사가 파생된다. 많은 구체적 도상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상징적 상상력을 중시한다. 상징들은 서로를 반사하면서 의미를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우주이다. 질베르 뒤랑이 [상징적 상상력]에서 우리는 항상 양극으로 나누어진 상징적 여건들에 이르게 되는데, 상징적 상상력의 내용, 즉 상상적인 것은 상호 대립적인 두 개의 힘에 의해 조직화된 광할한 분야로 인식된다고 말한다. 고은별의 상징적 우주에는 명시적인 또는 잠재적인 긴장과 투쟁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검이나 승리의 컵 등이고, 작가가 애호하는 캐릭터인 종이사람이나 바나나껍질은 크고 작은 상처에 취약하여 연민을 자아낸다. 


물질적, 생물학적 조건에서 연상되는 상징이다. 질베르 뒤랑의 가설에 의하면 상징에 대해 심리학적이고 심리 사회학적인 분류로 나눌 수 있는 세 개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분열형태적, 종합적, 신비적’이다. 가령 고은별의 작품에서 검, 컵, 지팡이 등의 도상은 여럿으로(분열적) 불어나면서 서사를 진행한다. 종이사람이나 바나나껍질도 마찬가지다. 그 캐릭터들은 무한 복제될 수 있는 피상적 존재감이 강조된다. 각 캐릭터들은 동종끼리, 또는 찬조 출연을 통해(종합적) 합쳐진다. 하지만 작품의 의미는 열려(신비적) 있다. 보는 것 뿐 아니라 수행성도 중시해서, 다음 전시 때는 작가가 타로점을 봐주는 타로마스터가 되어 퍼포먼스 형식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작가는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혼동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가상공간을 플랫폼 삼아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넘나들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미 메타버스에 작가의 아바타도 대기 중이어서, 가상세계에서의 참여자를 대상으로 한 타로점 계획도 있다. 







 실버스타_운명의 수레바퀴展_광명시민회관 전시실_2023


메타버스에서는 유명인이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기도 하는 등의 이벤트도 벌어지곤 한다. 작가는 ‘메타버스라는 가상공간 플랫폼을 활용한 작업을 통해, 팬데믹 이후 도래하게 될 아바타로 살아가는 디지털 지구(메타버스 세상)에서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해 나갈지를 고민’한다. 이번에는 오프라인 전시를 둘러본 관객이 출구에 있는 상자 안의 타로카드를 뽑는 참여가 가능하다. 작가의 아바타에 해당되는 실버스타를 비롯해서, 서사를 이끄는 주요 등장인물들은 캐릭터다. 환영의 세계에도 생로병사를 포함한 다사다난한 일들이 있지만, 허구라는 점에서 안심이다. 언제든 그만두면 둘 수 있고, 주체가 그것에 부여하는 게임의 규칙에 충실하다면 항상성과 변화가 보장된다. 아이의 놀이부터 예술에 이르는 대안의 세계는 직접적 현실을 피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형성한다. 가상세계의 편재 또한 이러한 완충지대를 만들며, 소비자/대중의 시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소소한 놀이부터 기업화된 게임, 흔히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말해지는 정치경제학에서의 도박적 요소가 일상에 편재하는 스마트 기술에 힘입어 대안의 세계를 이루는 목록을 더 세밀화한다. 가상의 비중이 너무 커지면 대안 세계로서의 역할이 줄어들 수 있다. 가상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이 가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배가 고프거나 아플 때 누구도 그것을 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 대부분의 일상적 현실은 매개를 통해 접해진다. 대표적인 것은 상품이지만, 놀이나 예술은 상품과 완전히 겹쳐지는 세계는 아니고 나름의 자율성을 가진다. 놀이의 시공간처럼 예술도 그 자율성을 지킬 수 있어야 자유로운 창조가 가능하다. 한편 실제로 피 흘리고 죽는 파국적인 현실을 뉴스를 통해서만 접하다 보면 폭력에 둔감해지고, 그것은 더 강한 폭력적 현실로 되돌아오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촘촘한 그물망으로 엮인 세계는 어디선가의 파국이 ‘나비효과’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만든다. 







실버스타_운명의 수레바퀴展_광명시민회관 전시실_2023


타로는 상당 부분 갈 길이 정해져 있는 관료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궁금한 개인의 운명에 대해 게임의 형식으로나마 실험할 수 있는 소재다. 타로카드에 그려진 이미지는 작가에 의해 완전히 개작된다. 타로의 뼈대만 가져온 셈이지만, 그림이라는 묵직한 형식을 덜어내는 한판 놀이같은 분위기를 주기에 충분하다. 카드 패가 새로 깔릴 때마다 이전의 지지부진한 상황은 또 다른 출발점에 놓인다. 놀이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처한 위기, 심지어 죽음마저도 큰 부담이 없다. 가령 [검]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바나나 껍질도 잃어버리고 알맹이는 토막나고 칼에 찔리고 말았다...’고 탄식하지만 그조차도 향유할 수 있다. 그것은 비윤리성이나 무감각은 아니고, 놀이 수행자가 그것이 허구임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작가는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예를 든다. ‘소녀는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가 죽기 전, 성냥개비의 불꽃으로 환영을 보며 행복하게 죽어간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고 현실을 위로하는 마법과도 같은 판타지. 나에게는 성냥개비의 불꽃같은 환영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건조한 실증주의의 세계를 벗어나면서 동화나 어른들의 동화라고 할 수 있는 신화가 펼쳐진다. 신화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장이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징으로 엮여 있다. 시각예술가로서는 시각적 유비가 활용된다. 철학조차도 상징의 형식으로 본 에른스트 카시러는 [르네상스의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신화는 사물들의 모든 단순한 유사성 또는 우연한 동시성, 공간에서의 인접성과 시간 속에서의 스침만으로도 사물들을 결과의 마술적 통합으로 묶어내기에 충분하다고 말한다. 신화적 이해의 특징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독립적인 요소 사이에 생기는 닮음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에른스트 카시러에 의하면 모든 유사성은 본질의 동일성을 표현한다. 신화가 복합적 전체로 어떤 사물을 다른 하나의 사물에서 생기게 한다면, 과학에서의 인과는 더 이상 그러한 직접적인 사물 관계로 이해하지 않는다. 현대는 과학만이 유일하게 객관성의 지표가 되지만, 그것은 보다 광범한 인간의 인식체계의 일부일 따름이다. 



말,말,말_시트지, 가변크기, 2023


과학과 신화는 늘 상호작용을 했다. 과학이 기술을 통해 대중화될 때 신화는 되돌아온다. 하나의 진리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다가(多價)성을 활용하여 의미를 늘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고은별이 전시장에 분류해준 몇 가지 캐릭터나 전형적인 상징들이 제시되곤 하지만, 그 항목들의 조합으로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가 파생될 수 있다. 타로라는 형식은 몇몇 관념이나 이미지로의 환원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가 발생하고 파생되는 장치다. 2010년부터 작품에 등장하던 캐릭터는 현재 9개로, 이야기가 가지를 쳐 나가면서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 전시의 주인공이기도 한 9개의 캐릭터는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에 그들의 프로필을 정리하여 쇼케이스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각 캐릭터의 성격 규정은 물론, 그것들이 출연한 작품 목록까지 세세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작가는 일종의 감독이 되어 한 화폭에도 다른 작품의 주인공급을 등장시켜 복합적 이야기를 만든다. 


종이사람이나 바나나 껍질을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의 특징은 하찮음이다. 대중문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슈퍼 히어로인 것과 비교된다. 현실에서는 잘난 존재만이 승자이고 주목받기에 허구에서나마 무게중심을 달리하는 것이다. 강자들이 휘어잡는 무대는 많은 패자를 낳는 가혹한 현실로 게임수행자들은 이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대안의 세계를 구축한다. 시트지로 벽에 붙인 [말,말,말]에는 주요 캐릭터들의 어록들--‘최선을 다하면 죽는 것이여’(파란 유령). ‘안되는 걸 되게 하라니, 안되는 건 할 수 없는 거여’(갈라파고스 거북). ‘순간의 마법을 즐겨’(멍게 새끼), ‘내가 너무 잘하고 싶은 걸 내가 못할 때 너무 슬픈 거같아. 잘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너무 슬퍼...’(실퍼스타)--들을 읽어보면 상실감에 젖은 젊은이들의 사고가 드러난다. 거기에는 단기적인 목표를 위한 도구적 수단에 내몰리는 다수가 처한 가혹한 현실(거의 운명의 수레바퀴로 다가오는)에 대한 위로의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CUP, 캔버스에 유채, 53x41cm,10pcs, 2016~2023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PENTACLE, 캔버스에 유채, 53x41cm, 10pcs, 2016~2023


‘자격지심이 많고 소심한’ 성격의 종이사람을 비롯한 여러 캐릭터들의 활동을 타로카드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로카드는 메이저/마이너로 나뉘어 있으며 종류도 많다. 타로카드와 그림의 접점은 상징에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상징의 어원은 희랍어 ‘symballein(짜맞추다)’에서 온 것으로, 어떤 것을 대신하는 기호로 정의된다. 고은별의 작품은 시각성을 넘어서 의미의 퍼즐을 맞춰보는 놀이를 제안한다. 어떤 의미도 결정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게임 형식의 복잡한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나가는 이미지는 계속될 수 있다. 의미가 불확실하나 지나치게 확정적인 현실에 비한다면 퍼즐 맞추기는 성취감을 준다. 전시장 초입의 [실버스타와 9명의 캐릭터들이 연출한 미장센]은 일종의 해설판으로,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허구적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들’의 방향타 역할을 한다. major arcana/ minor arcana로 나뉘어 있는 미스테리는 이후 세부 항목으로 나열된다. 


‘major arcana’라는 항목에 [위대한 미스테리]라는 제목으로 걸린 53x41cm 크기의 22점의 유화에는 주요 캐릭터들 이외의 도상들도 많이 등장한다. 전시 부제와 관련된 수레바퀴 등. 신비, 불가사의, 기적 등등의 이미지가 있지만, 특별한 순서는 없다. 이러한 임의적 배열은 상징적 도상이기에 이야기가 한정될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고은별의 캐릭터는 매우 구체적인 편이지만 그것들의 조합에서 파생되는 의미까지 명확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움베르토 에코가 [해석의 한계]에서 정의한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이 존재한다. 도상과 도상이 상호적으로 결합하는 융합적 관계를 전제하는 세계는 유래가 깊다. 움베르토 에코에 의하면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은 중세에는 은밀한 방식으로 발전하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한층 더 폭넓은 신비주의의 흐름 속에 흡수되고, 그 후 갈릴레이의 물리 역학 시대를 굳건히 견디어낸 후 19세기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낭만주의 미학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SWORD, 캔버스에 유채, 53x41cm, 10pcs, 2016~2023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WAND, 캔버스에 유채, 53x41cm, 10pcs, 2016~2023


[해석의 한계]에 의하면, 신비의 지식에서 우주는 모든 것이 다른 것들을 의미하고 다른 것들에 반사되는 엄청난 유리의 방으로 인식된다. 언어가 모호하고 다의적일수록 해석은 무한해진다. 연쇄가 무한하게 지속되는 상징적 우주에서 궁극의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에코는 신비주의적 사고가 현실 세계의 무대를 언어적 현상으로 변형시키는 동시에, 언어로부터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빼앗는다고 말한다. 신비주의자는 침묵한다. 하지만 ‘신비주의의 텅 빈 비밀’(에코)과 침묵은 피상적인 소통의 세계에 대한 예술적 대응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의 소통이라는 것이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현대인은 고대든 중세든 근대든 그 연원을 가릴 것 없이 의미로 가득했던 상징적 우주를 호출하려는 것이다. 전시장에는 타로카드 이미지와 상관없이 캐릭터들이 주인공이 된 자유로운 그림도 곳곳에 걸려있다. 유화 작품 [실버스타_성배4](2023)에는 ‘minor arcana’의 한 항목을 차지하는 컵들도 등장한다. 


‘알맹이가 없어도 난 기죽지 않아. 나에겐 화려한 호피 무늬 바나나 껍질이 있거든’이라고 말했던 바나나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철푸덕 주저앉은 사람의 자세다. 만화의 말풍선 자리에 꼬인 선들은 주인공이 처해진 난감한 상황을 설명한다. 파란 바나나는 익기도 전에 잘려서 요리되는 모습이다. ‘minor arcana’라는 제목으로 성배(컵), 완드(지팡이), 펜타클(금화), 소드(검) 등 주요 상징적 도상이 항목별로 53x41cm 크기의 유화 작품이 10개씩 열을 맞춰 전시장 벽면에 걸린 작품들은 카드패를 배열하듯이 규칙적이다. 각 시리즈 별로 2016년부터 올해까지 그려진 10개의 그림에서 이야기를 엮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작가는 최초의 단서만 제시한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 시리즈는 컵부터 시작된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CUP] 시리즈에는 컵과 관련된 상황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만든다. ‘물’, ‘감정과 사랑, 꿈, 대인관계’ 무엇인가 담는 컵이 상징할 수 있는 관념들이 글과 이미지로 예시된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SWORD, 캔버스에 유채, 53x41cm, 10pcs, 2016~2023


종이사람 셋과 마주한 컵 세 개는 사람을 그릇의 모양과 크기로 비유하는 예를 떠올린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PENTACLE] 시리즈에서는 금화와 관련된 상황들이 나열된다. 돈과 관련된 도상들의 조합은 ‘땅’, ‘욕망과 현실, 경험, 재산, 지위’ 등으로 해석된다. 돈이 왜 땅인지는 한국적 상황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자원이 부족한 좁은 땅에서 인간들끼리 게임하면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던 유력한 원천이 바로 땅이었기 때문이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SWORD] 시리즈에서 검은 ‘바람’, ‘이성과 진실, 갈등, 고통, 이별’ 등으로 해석된다. 부드러운 바나나는 칼과 관련된 잔혹한 상황에 희생물로 등장한다. 칼같이 자르는 것은 이성과 고통을 동시에 낳을 것이다. [타로 마이너 아르카나_WAND] 시리즈에서 곧게 서 있는 지팡이는 ‘불’, ‘지성과 직관, 모험, 야망, 정열, 용기’ 전능함과 관련된 의미들에 둘러싸여 있다. 관객도 한 장 뽑아 가져갈 수 있는 타로카드에는 상징적 도상의 여러 의미가 함께 적혀있다. 


신화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유형들이다. ‘광대(낙천적인 보헤미안), 마법사(창조적인 예술가), 고위 여사제(미스테리), 여왕(물질적 풍요), 황제(강한 리더쉽), 교황(조언자), 연인(매혹적인 사랑)...운명의 수레바퀴(다채로운 운명) 등. 고은별의 상징적 우주가 의미를 발생시키고 파생시키는 방식은 유비(analogy)적 사고에 기댄다.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유비의 모델은 본래 대상의 추상적 구조 또는 관계의 체계를 재현한다고 말한다. 가령 연금술의 담화는 보편적 융합성과 유사함의 개념에 의거한다. 신비주의적 사고에서는 형태의 유추에서 기능의 유추로 넘어간다. 무한한 연상의 얽힘 속에서 의미의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표류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던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인용한다; ‘유사함은 결코 안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으며, 또 다른 유사함을 가리킬 때만 정착된다...연약한 유추가 증명되고 확실시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주파해야만 한다’(미셀 푸코) 



(참고; 타로카드 텍스트)


이렇게 표현의 질서와 코스모스의 질서를 일치시키려는 형이상학의 한복판에서 해체와 무한한 표류의 무대가 펼쳐진다. 움베르토 에코에 의하면 신비주의적 표류의 대표적인 특징은 시니피에에서 시니피에로 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연결고리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로 미끄러지는, 제어될 수 없는 온갖 수단 방법에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존재는 상호지시적이고 미로식의 거미줄과도 같은 조직망을 통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도록 작용한다. [해석의 한계]는 이러한 유비의 우주에서 행해지는 기호들과 사물들의 미로식 여행은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제외하면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상징은 보다 강력하다. 인간과 관념을 결정하는 언어가 그것이다. 각 사회에는 유력한 언어가 있으며, 그것은 권력의 이면이다. 현대의 작가에게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어가는 지배적인 상징계에 저항한다. 무한한 표류의 놀이를 행해지는 세계는 예술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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