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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주 / 유동하는 차이의 계열

이선영

유동하는 차이의 계열

 

이선영(미술평론가) 



추상적 색면으로 이루어진 윤종주의 작품은 색을 빛처럼 다룬다. 구체적 형상 없이 한 개 또는 두 개, 또는 여럿이 배열된 작품들은 마치 표면이 서서히 변하는 기구나 가구처럼 시선을 사로잡는다. 의미로 곧장 연결시킬만한 형태들이 부재한 그것들은 관심 있는 시선에 대해서만 미묘한 움직임으로 응답한다. 눈을 감았을 때 얇은 눈꺼풀을 투과해서 들어오는 빛 같은 작품에서 시각성의 의미는 변화한다. 작품을 볼 때 계속 움직이는 듯한 색면은 캔버스로 설정된 공간을 채우는 물리적 재료의 속성을 초월한다. 작가는 ‘색채를 통한 공간성과 그 특유의 물질성과 형태를 실험하는 작업’으로 작품을 요약한다.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키네틱 아트 계열처럼 무슨 동력을 장치하거나 복잡하게 어른거리는 옵티컬 패턴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둥글거나 사각형의 캔버스 안에 여러 겹 담은 물감의 밀도와 분포에 따른 은은한 색감의 변화다. 


 




전시전경 All Images ©The artists, Courtesy of Prompt Project, Seoul

 


한 점 한 점의 그림을 벽에 건다기보다는, 일련의 단위 구조로 설치하는 작품들 사이에서도 움직임이 내재한다. 2023년 9월 한 달간 프람프트 프로젝트(PROMPT PROJECT)에서 진행된 윤종주의 개인전은 캔버스 하나가 구조적 단위가 되어, 물리적 조건에 따라 공간 맞춤형으로 배열된다. 전시 공간을 염두에 두고 연구된, 퍼즐이 잘 맞춰진 것 같은 안정감은 색을 빛으로 운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정사각형(들) 속의 사각형(들), 마름모, 대각선 등 화면 내부와 외부에서 구성의 안정감도 마찬가지 선택이다. 작품들 간의 간격이나 화면에서 약간의 각도 변화 같은 최소한의 형식이다.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한 형식을 감축한다는 점에서 윤종주의 작품은 ‘미니멀’하다.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캔버스들은 가로로, 또는 세로로 배열된다. 수평으로 나열한 색 면들은 사이에 간격을 약간 두기도 한다. 화면 내부에 움직임을 가지다 보니 전시장 벽 또한 일종의 여백으로 작품과 함께 작동한다. 


잘 디자인된 실내가 그자체로 작품이 될 수 있듯이, 밀도있는 평면은 보다 민감한 ‘벽’이다. 둥글거나 사각형의 캔버스는 원래의 회화적 관례와 달리, 천체적 현상을 바라보는 렌즈나 창 같은 느낌이다.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추상적 평면은 오히려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현상을 비추는 듯하다.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순수한 시각적인 공간, 아마도 절대적으로 수평과 수직으로만 만들어졌을 공간’이 추구되는 이유에 대해, ‘현대인은 휴식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에 의하여 둔감하게 되었기 때문에...’라고 풀이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이 코드화되어 간다는 것이 문제다. [감각의 논리]는 현대회화와 분석적 측면을 언급하면서, ‘종합한다는 것은 모든 형태들을 직선이나 몇몇 각들, 호나 타원형과 같이 작은 수효의 형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구성된다’(세뤼지에)는 말을 인용한다. 하지만 질 들뢰즈는 회화가 코드가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 육감적으로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cherish the time-circle,23120R003  acrylic, medium on canvas, 2023



 cherish the time-circle, 23100R001  acrylic, medium on canvas, 2023



‘애당초의 닮음도 없고 미리 전제된 코드도 없는 이 마지막 유형’을 질 들뢰즈는 ‘미학적 유사라’라고 지칭한다. 유사한 색과 형태(캔버스 형태를 말함)는 변조되면서 증식된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변조는 유사의 법칙이다. ‘변조는 단순히 명암의 변화에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색채에 의한 새로운 변조를 만들어냄으로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틀로 작용’ 한다. 고요한 울림으로 가득한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필자는 동터오는 순간을 봤을 때의 경이로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딘가 일찍 가기 위해 새벽녘 어둑할 때 출발한 길에서 동트는 모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고요한 드라마였다. 평소라면 쿨쿨 자는 시간대에 매일 그러한 경이로운 기적이 하늘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걷던 방향에서 바라본 동틀녘의 하늘에서 순간은 고정될 수 없었고 지속만이 있었다. 해가 지는 무렵 또한 마찬가지의 변화가 관찰된다. 


도시의 스카이 라인에 걸쳐진 저문 태양의 붉은 기운이 아직 짙푸른 부분이 남아있는 창공으로 광범위한 전이의 지대를 형성하곤 한다. 윤종주의 작품은 자연을 재현함 없이 자연의 과정을 담아낸다. 미술사에는 해돋이나 빛을 가득 머금은 자연물의 인상을 재현하는 근대 화파들의 혁신적인 미감이 높이 평가된다. 윤종주의 작품에서 붓터치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시간의 차이를 두고 거듭해서 도포한 여러 색의 물감층이 만들어낸 복합적 효과다. 물질이 곧 에너지라면, 차이는 어딘가 차곡차곡 쟁여진 후 에너지가 되어 조금씩 방출된다. 현대미술의 이론적 담론에 영향을 준 언어학은 차이적 관계를 강조한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분석철학자들의 가설을 따라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단어의 관계가 아니라, 전체 문장 구조로서의 언어에 대한 단어의 관계라고 지적한다. 단어들은 사물과의 유사성으로 의미를 얻는 게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로 인해 얻게 된다는 것은 색에도 적용된다. 




 cherish the time-promnade, 23200001, 25x150(x6),30x150(x5)cm, acrylic, medium on canvas, 2023



윤종주의 작품에서 색은 지시 대상과 관련된 색도 아니고, 코드화된 색채도 아니라 이전의 층과 차이를 가진 또 다른 층에 의해서이다. 추상미술은 물론 재현도 마찬가지다. 줄리언 벨에 의하면 ‘재현이란 그 안에서 경험이 발생하는 공간 배열, 곧 어떤 형성, 모형, 추상적인 기하학이다. 그 안에서 너와 나와 같은 주체와 이것과 저것과 같은 대상이 존재하며 그러한 배열 안에서 이들 개념은 공간에 대한 효과나 차이로 존재한다. 그러나 재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하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지엽적인 차이의 드러남만이 존재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윤종주의 작품들은 차이적 관계만이 지속되는 색채의 장이다. 관객이 둥근 화면의 가장자리를 서서히 따라가는 동안 색은 어느덧 변화하고, 가장자리 안쪽의 면으로 시선을 옮길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작품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오직 실제 작품 앞에서만 가능한 시공간의 추이가 작품의 핵심이다. 


모든 것이 코드화된 정보로 대체되는 현대사회에서 끝까지 자신의 현존을 주장하는 것이 있다. 현대회화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마다 주조 색은 있지만 시점에 따라 변화하기에 특정할 수 없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 된다. 굳이 이름이 있다면 ‘자연의 색’, ‘시간의 색’이다. 현대미술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마네도 ‘자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자연과의 연결을 끊어내고 자신을 반영하기만을 원한다. 이러한 경향은 형식주의로 비판되었지만, 분업화의 흐름과 더불어 ‘오직 매체의 명령, 즉 그림면의 평면화와 순수한 채색’(그린버그)이 강조되었다. 모더니즘의 논리에 의하면 ‘회화 매체를 형성하는 여러 조건들, 즉 평평한 화면이나 캔버스의 형태, 그리고 물감의 성질이 만들어내는 평면성이라는 요소는 회화예술에 있어서 유일한 특징’(그린버그)이다. 그린버그는 [Modernist Painting]에서 칸트와 더불어 비롯된 자기 비판적인 태도의 심화와 과장이 바로 모더니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cherish the time-promnade, 23050001, 15x90(x7)cm, acrylic, medium on canvas, 2023



그린버그가 주장하고 기대했듯이, 순수성과 자율성은 예술의 질을 보증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무엇이 그 그림 속에 있는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것이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그린버그)는 결론은 결국 예술의 위기를 초래한다. 시간을 염두에 두는 윤종주의 작품에서 기호는 자율적이지 않다.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흐름이 강조하듯 기호의 의미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의 대화에 의해 의미가 획득되기 때문이다. ‘cherish the time (시간은 머금다)’는 윤종주의 주제는 2010년부터 시작된 작품들은 ‘서로를 천천히 끌어당기고 다가가는 유동성을 나타내며 공간 속에 탄력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변화한다. 작품 제목에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이유는 시간의 추이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순간적 시각의 완전성을 위해 시간성을 억압했던 모더니즘이 지속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을 때 회화는 지양되었다. 


관념보다 체험에 방점이 찍히면서, 시각성에의 한정이 아닌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설치미술이 주도적이 되었다.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근거한 시각성은 관념에 호소하지만, 이분법의 와해는 현존의 감각을 중시한다. 평평한 표면으로 귀결되는, 순간에 고정된 현재는 개념적으로는 명증하지만, 시각만을 물신화한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근대미술을 연 마네, 모네, 세잔의 공통점으로, 그들이 모두 그림에서 공간적인 깊이감을 피하고 평평하게 보이려고 애썼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평평한 표면이었으며, 후에는 일정한 질서에 의해 배열된 색들로 덮인 표면이라고 정의되었다. [모던 유럽아트]는 ‘빛을 머금은 색을 평면적으로 명암 없이 칠해 동시대 화가들이 모색하던 표면과 공간의 조화를 이룩한’ 마티스를 높이 평가한다. 모더니즘 초기만 해도 시간에 대한 감각은 있었던 것이다. 모든 유파는 발생기의 유연성이 사라지면서 결국은 경직된 미학적 이데올로기로 남는다.


 






전시전경



[모던 유럽아트]는 세잔과 모네가 베르그송이 주장했던 바대로, 우리는 시간 내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만 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요컨대 관찰자의 변화하는 의식에 대한 고려이다. 최대한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모더니즘은 지속보다는 순간을 전제하면서 작품의 서사나 의미, 몸적 체험까지도 과도하게 의미가 부여된 시각에 양보한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은 회화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20세기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회화는 죽었다’라는 구호를 되풀이한 정황과 서로 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표면에 채색된 표시를 만들어내는 회화 작업의 관행은 계속되었다. 줄리언 벨은 만약 어떤 새로운 용어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물감에서 가장 먼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각성이 경험의 지속성에서 분리된 것이 문제다. 


줄리언 벨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소개하면서, 모더니즘이 전제하는 ‘그자체로서의 그림을 응시할 수 있는 순수한 지각의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줄리언 벨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회화에 적용하면서, ‘순수 구조를 기진 순수 해석체의 고정된 상호작용이라는 재현의 전체 개념에서 탈피하여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용법으로서의 재현개념을 지향’한다. 회화에 대한 순수하고 고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삶과의 혼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근대미술이 미술 이외의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동시에 차단한 것은 시간성이다. 순간의 순수함을 믿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순간의 미학]에서 염려했듯이, 시간은 불순한 것을 끌어들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 시각, 또는 관념은 계속 도전받았다. 윤종주의 작품에서는 회화로서의 자족성을 잃지 않은 채 지속되려 한다. 한 작품에서도 지속이 있고 설치적인 방식으로 배열한 작품들 사이에도 지속이 있다. 




전시전경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지속에 음악적 감각 또한 부여했다. 한편 화면들은 오브제처럼도 운용되기 때문에, 순간을 넘어 지속하려는 미니멀리즘의 핵심에 자리한다. 지속은 설치의 방식 뿐 아니라, 작가가 이미 시간을 캔버스 모양새로 확정된 공간 안에 차곡차곡 쟁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공간화된 시간의 층들은 완전히 덮이거나 사라지지 않은 채 차이의 흔적을 암시한다. 원과 사각형을 기본으로 여러 변주가 있는 캔버스의 가장자리는 차이가 시작되는 곳이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보면 붉은 기운이 강했다가 어느덧 푸른 기운이 강해지고 하는 식이다. 작품에 따라서 색의 영역들에 차이가 있다. 화면 가장자리 색의 여파가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어디쯤에서 맞은편의 다른 색의 영역으로 은근슬쩍 변화한다. 많은 색의 층위가 만들어내는 화면에서 경계는 없다. 시점과 종점은 다른데 전이의 과정에는 명확한 단계가 없다. 


공기가 점진적으로 섞이듯이 달라지는 과정에 의해 반복될 수 없는 차이의 계열이 생겨난다. 캔버스에 물감이라는 고체나 액체적 대상으로 기체같은 양상을 표현하는 셈이다. 마술같은 색채의 운용이다. 질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말했듯이, 명암에 의한 가치적인 관계를 색조의 관계로 대체하려고 하는 화가들, 그리고 순수한 색의 관계를 가지고 형뿐만 아니라 그림자와 빛 그리고 시간을 주려고 하는 화가들을 색채주의자라고 한다면, 윤종주는 색채주의자다. 작품에 색채를 중심에 놓은 것은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유사의 언어처럼 계속된다. 질 들뢰즈는 이렇게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형태를 변조라고 말한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빛은 시간이고 색은 공간이다. [감각의 논리]에서는 세잔에게서 이러한 색채의 변조를 본다. 세잔의 작업에서 색채의 변조는 ‘유사들의 조화’(슈브뢸)이다. 그렇게 ‘기하학은 감각적으로 되고 감각들은 명확하고 지속적으로 된다’(질 들뢰즈) 








전시전경



질 들뢰즈는 그렇게 ‘감각을 실현한’ 세잔의 작품이 평면들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깊이는 더 이상 강한 깊이가 아니라 파리한, 혹은 표면적인 깊이라고 말한다. 원래 [감각의 논리]는 베이컨의 작품에 대한 분석이었지만, 베이컨이 닫혀진 세계를 다룬다면 세잔의 열려진 세계(자연)를 다룬다고 비교한다. 하지만 질 들뢰즈는 베이컨과 세잔의 공통점으로 회화를 유사적 언어로서 극단적으로 밀어 올린 것으로 본다. ‘acrylic, medium on canvas’라고 표기된 작품들은 작가가 캔버스 위에 액상의 물감을 붓는 단계가 포함된 것으로, 작품은 만들기와 그리기의 공조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유연하고도 반투명한 재료’를 사용하며, ‘수차례 밑칠한 캔버스 위에 잉크, 아크릴 칼라, 미디움을 섞어, 둥글고도 유연한 형태의 이미지를 만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시간을 머금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전이가 일어나는 이 미묘한 장(場)은 그것이 놓인 현실 공간 명확히 구분된다. 


둥글거나 네모진 캔버스의 틀은 작품이라는 순도 높은 영역을 한정짓는다. 이러한 한정으로 인해 오히려 세련된 실내 공간에 독특한 요소로 자리할 수 있는 점은 역설적이다. 해돋이나 황혼녘 하늘에서 벌어지는 드라마처럼 경계 없는 전이의 시공을 담기 위한 경계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무한을 담는 유한’은 예술의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cherish the time-circle] 시리즈가 원형 캔버스라면 [cherish the time-promnade]는 띠 형태의 캔버스를 수직, 또는 수평으로 이어 함께 작동시킨 작품이다. 윤종주의 작품에 내재한 시간성은 음악과도 비교될 수 있다. 작품 제목 속 ‘promnade’라는 키워드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속 간주곡(promnde)을 연상시킨다. 작품과 작품 사이를 산책할 때의 느낌을 담은 이 유명한 곡은 그림과 음악의 공(共)감각을 표현한 것으로,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전시전경



특히 추상화를 시작한 세대에게 형태가 없는 음악은 새로운 미술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평행으로 병렬시킨 색면들은 ‘따로 또 같이’ 작동하는 작품들을 시각적으로 산책하게 한다. 무소르그스키의 프롬나드가 서로 다른 작품들 사이의 차이가 변화무쌍하게 반영되었듯이, 각 색 면의 국면 전환이 이루어진다. 관객의 시선은 각기 다른 울림을 가지는 ‘시각적 건반’(칸딘스키)을 두들긴다. 작품 [cherish the time-promnade, 23050001]에서 같은 규격의 캔버스 7개가 세로로 병렬된 화면은 비슷한 계열의 색들이 모여있다. 누군가는 그저 민트색, 또는 비취색으로 부를 수 있는 색의 계열은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 차이가 시작되는 지점이자 다른 캔버스의 가장자리는 작품의 수직선을 만든다. 관객은 이 수직선들이 구획한 색 면들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뿐, 각각에 대해 정확한 색을 명명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미광(微光)을 발하는 색면들의 차이는 고정될 수 없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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