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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리 / 설명을 피하기 위한 설명

이선영

설명을 피하기 위한 설명

 

이선영(미술평론가)

 


드문드문 강렬한 이미지들이 등장하지만, 잘 이어지지 않는 내용은 소통하기 힘들어하는 작가의 고민이 회화라고 특별히 해결주지 않음을 알려준다. 대개 하나의 화면으로 말해야 하는 회화에서 소통은 처음부터 쉽지 않다. 박두리는 백일몽이나 몽상과 작품의 유사점을 말한다. 꿈꾸는 이의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단편들이지만 잘 이어지지 않는 공통점이다. 현실의 일부지만 맥락의 단절이나 도약, 응축으로 인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서 박두리는 10x10cm의 극히 작은 캔버스에 그린 이미지들을 죽 이어서 천정까지 이어놓은 작품을 선보이는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한국의 속담처럼, 각기 흩어지려는 단편들을 꿰려는 시도다. 하지만 관객은 각각의 화면을 잘 볼 수 없다. 그것들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소통의 당위성과 그렇게 하기 힘든 상황을 보여주는 일종의 개념적 설치미술로 봐야 할 것이다. 




박두리_전시전경



밥은 먹고 울기, 227.3✕181.8cm, oil on canvas, 2023



하염없는 바깥, 227.3✕181.8cm, oil on canvas, 2023



2020년에 발표했던 [설명을 피하기 위한 설명]이라는 작품 제목에 나타나듯이, 박두리의 작품은 말을 대신에서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미끄러움과 경계의 이미지](2020)에 암시되듯, 대상이나 의미는 그것을 붙잡으려는 손을 빠져나가곤 한다. ‘미끄러짐’이라는 키워드는 논리적 소통의 완벽성을 전제하고 기대하던 이전 시대의 확신을 해체하려는 철학자들에게 공유되었다. 미끄러짐과 더불어 ‘경계’도 의문시된다. 이러한 탈근대적 비전에 의하면, 차이의 체계인 언어를 통해 얻어지는 최종적 의미는 끝없이 연기될 뿐이다. 박두리의 작품은 소통에 대한 고민을 통해 언어의 분열적 조건을 드러낸다. 작가는 소통 그자체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적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해루질하는 취미를 가질 정도다. 하지만 도시인인 작가가 그조차도 익숙하지 않아 해루질을 하다가 물에 빠트린 핸드폰을 복구하면서 훼손된 저장 이미지들에 남아있는 선들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원래 동양화를 전공해서 선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작가는 선으로부터 서사를 연상한다. 대개 서사는 선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간적 형식인 회화 속 선은 엉켜있어 풀기가 쉽지 않다. 이전 작품 [발화의 선](2020)에 나타나듯, 박두리는 선과 서사의 연결을 직관하고, 선적 표현을 통해 또 다른 소통을 시도한다. 영상이나 소설같이 시간의 축을 따라 서사가 전개되는 다른 분야와 달리, 유한한 화면에 시공간의 단면을 접어 넣어야 하는 회화에서 서사 만들기는 난해하면서도 즐거운 도전이다. 공간매체인 회화는 시간매체에 비해 강렬하지만, 선적 이어짐의 불안정 때문에 소통의 불안을 안고 있다. 화면의 어디서부터 봐야/읽어야 할지 회화는 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화면으로 완결되지 않은 방식을 실험하기도 했다. 회화라는 창은 눈앞의 것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여러 차원을 가진다. 




촉진하는 물결(전시전경), 162.2✕130.3cm, oil on canvas, 2023



촉진하는 물결(부분), 10✕10✕355cm, ink on canvas, 2023



촉진하는 물결(전시전경 부분), 162.2✕130.3cm, oil on canvas, 2023



촉진하는 물결(1), 162.2✕130.3cm, oil on canvas, 2023



촉진하는 물결(2), 162.2✕130.3cm, oil on canvas, 2023



하지만 일상의 소통이라는 것도 그다지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불완전한’ 소통의 존재 의미가 있다. 언어학자들이 랑그와 파롤을 구별했을 때, 예술가나 개인의 어법이 가능한 여지를 둔 것이다. 무엇보다도 파롤은 랑그라는 보편적 문법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보편성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보편적 질서로서의 언어는 권력의 각축장이며, 예술 또한 그 장에서 게임한다. 언어는 소소한 용법의 변화가 축적되어 결국 큰 변화를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은 대화할 때 중언부언하면서 선이 매끈하지 않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낭비가 심하지만, 철학자나 법률가처럼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체화한 직업인들은 죽 이어지는 선적 이야기로 감탄을 자아내곤 한다. 선적으로 완결된 서사만 합목적적이고 합법적으로 간주된다. 현대미술 또한 제도화되면서 작가도 말을 잘해야 하게 되었다. 


언어적 소통보다 그리기나 만들기가 더 쉬워서 그 길을 가는 셈인데, 뭔가 부가되는 의무처럼 여겨진다. 억압적으로 다가오는 단선적 논리는 대개 빠르게 뭔가 판단하기 위해 필요하다. 열심히 그려온 그림들이 옆에 있건만,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 괴롭다. 작가는 대만 관두미술관 레지던시에 참가했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오히려 자유로웠다고 한다. 당시에 작가가 사용하기도 했던 오역으로 가득한 번역기는 기계나 기술의 결함보다는 말로 하는 소통 자체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문예사조사는 오역이나 오독 또한 랑그/빠롤의 관계처럼 새로움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박두리는 수수께끼에 가득한 작품들에 대해, ‘화면에서 보여지는 파편적 이미지들은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서사들을 다시 꺼내어 뒤섞음으로써 타인과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내면의 바람’을 담았다. 




머플리아토, 45✕45cm, oil on canvas, 2023



머플리아토, 45✕45cm, oil on canvas, 2023



‘회화 스스로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는 마법을 시도한다. ‘머플리아토는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읭읭 거리는 소리만 들리도록 만드는 해리포터의 주문’으로 ‘침수된 핸드폰에서 사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이미지들은 마치 머플리아토 마법 주문에 걸린 듯 외부와의 차단 속에서 자신의 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침수라는 재난 앞에서 어떤 선이 남아있을지는 우연적이다. 하지만 해루질의 과정 자체가 우연 아닌가. 얕은 바닷물이나 해안가에서 채취를 하러 들어감과 나옴만이 확실한 것이고 무엇을 가지고 나올지는 우연에 달려있다. 만약 해루질하는 과정을 GPS 같은 것으로 추적한다면 그 선들은 매우 복잡할 것이다. 명확한 목적지에 대한 최단 거리인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박두리에게는 그림 또한 그렇다. 풍경이라는 형식은 별다른 스케치 없이 물감으로 그냥 들어간 화면에 자연스러움을 준다.    


출전; 대구예술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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