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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안 / 다가오는 자연, 멀어지는 형태

이선영

다가오는 자연, 멀어지는 형태 

 

이선영(미술평론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말을 변조한 전시부제 [점입消경]은 접근할수록 분명히 나타나기보다는 사라지는 구성안의 작품 특성을 요약한다. 관람할 때 변화하는 시점은 작업 과정에서도 반복된다. 처음에는 스케치가 있지만 그리면서 점점 모호해지고 결국은 소멸된다. ‘점입소경’은 식물 이미지가 많은 구성안의 작품들에 대해 누군가 (첩첩산중이 아닌)‘첩첩초중’이라고 위트있게 평가해준 것에 상응한다. CN 갤러리 1층은 신작 위주고, 2층은 그동안 발표했던 것들을 모았다. 이러한 배치는 2007년경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온 푸릇한 작품들을 이제 마무리 지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색이름과 큐브라는 단어가 붙은 작품들은 자연의 한 조각을 떼어낼 수 밖에 없는 그림의 추상성에 대한 자의식을 내비친다. 1층에 주로 전시된 신작들은 논의 모판을 소재로 한 것들이라 말 그대로 한조각(들)이다. 작품 제목에도 포함된 ‘cube’는 그것을 이루는 직선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형태다. 



green cube_2023-acrylic gouache on canvas_182.0×700.8cm



CN 갤러리 전시전경


인류가 오랜 수렵과 채취의 생활을 끝내고 농사를 짓게 된 것은 ‘혁명’이라 일컬을 만큼 자연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의 거리를 더 늘려온 현대적 삶은 농촌을 자연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모판이라는 특이한 소재는 소작농의 딸로 200년 된 농촌의 한옥에서 살았던 작가의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 어릴 적 고택 마루에서 내려다 본 논은 비록 남의 땅이긴 했지만 풍요로웠고, 조형적으로도 보였다. 청소년기를 농촌에서 보낸 작가의 미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에 첩첩이 쟁여져 있다. 구성안에게 1획은 풀잎 한줄기에 해당된다. 수없이 그은 선들은 뭉개지지 않고 각자의 선을 살렸다. 그린다기보다는 살포시 얹는 듯하다. 조형적으로는 겹과 결을 살리는 것이고, 재현과도 거리를 둔다. 재현적인 선은 닫힌 형태감으로 대상을 관객에게 건네주지만, 차이와 반복의 묘를 살린 선은 볼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면서 다른 인상을 준다. 일별이 아니라 응시가 필요한 이유다. 


선을 세로로 얹는 것은 성장의 느낌이고 자유롭게 얹는 것은 그 내부에 있을 또 다른 것을 덮는 엷은 베일 같다. 새벽의 독서를 제외하고 하루의 거의 전부를 작업에 쓰는 전업 작가가 선을 긋는 것은 새싹이 자라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만, 하얀 캔버스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추상이다. 그에 대한 자의식은 캔버스의 일부를 여백처럼 남겨놓은 것에서 찾아진다. 질 들뢰즈는 현대회화론에서 배경이 없는 것을 추상의 특징으로 보기도 했다. 배경의 제거는 현실적 맥락의 제거이다. 구성안의 작품은 선의 운용에서도 비재현적이다. 재현주의가 가로세로의 축을 맞춰 촘촘히 짜나가는 직물같은 것이라면, 구성안의 방식은 펠트처럼 얽힌 것이다. 들뢰즈는 직물/펠트의 비유로 재현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운 선을 지지한 바 있다. 그는 펠릭스 가타리와의 공저 [천개의 고원]에서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을 비교한다. 



blue cube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162.2×130.3cm



gray cube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91.0×91.0cm



green cube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91.0× 91.0cm


저자들은 천과 펠트라는 직조술의 모델을 대조하면서, 압축에 의한 섬유의 얽힘만이 있는 펠트는 직물과 달리,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한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직물과 펠트처럼 직조에 관한 서로 완전한 구별되는 두 가지 생각, 나아가서 실천이 존재한다. 저자들의 비교에 의하면, 직물처럼 홈이 패인 것이란 고정된 것과 가변적인 것을 교차시켜서 서로 구별되는 형식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수평/ 수직의 판들을 조직하는 공간에서 선이나 궤적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즉 한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매끈한 공간에서는 점이 궤적에 종속된다. 재현의 노동은 점을 통해 좌표축을 고정한다면, 구성안의 작품은 매끄러운 공간을 활주하는 선들만 남겨둔다. [색이름+큐브]로 이루어진 제목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선은 면을 이루는 기하학적 요소가 아니라, 선의 수많은 축적에 의거한 부피감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화면에 여백같은 공간을 남겨서 매끄러운 평면을 활주하는 선의 운동감을 부여한다. 여백은 형상보다 많은 경우도 있지만, [stare](2022) 시리즈에서처럼 화면 아래에 보일 듯 말 듯 배치된 경우도 있다. 형상만큼이나 중요한 여백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고정하는 선이 아니라 움직이는 선이다. 추상화가들은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대상을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스스로를 평가하기에 ‘경계에 서 있었던’ 구성안은 조형적인 선과 자연의 선을 교묘하게 중첩한다. 학창 시절 추상회화를 열심히 그렸던 작가에게 자연의 (재)발견은 새로운 국면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완전히 포기될 필요는 없었고, 서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선택이다. 수없이 그어진 선이 만들어내는 부피감은 자연의 실재감을 표현한다. 각각의 결이 살아있는 선들은 여러 색의 병치로 인상파가 성취했던 생동감이 있다. 인상파는 전통적 화가들과 달리 팔렛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화폭 위에서 색을 병치시킴으로서 눈에서 직접 섞이게 했던 것이다. 



green cube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162.2× 130.3cm



red cube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91.0×91.0cm



yellow cube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31.8×40.9cm


흐릿한 촛불이 아니라 인공조명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근대에 야외의 빛에 대한 감수성도 커졌다. 물론 그것은 산업혁명 이후 서서히 잿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환경오염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총체적인 환경오염의 시대에 초록이 가지는 잠재적, 명시적 매력이다. 하지만 구성안의 작품은 전체적으로는 초록처럼 보여도 안팎으로 다른 색이 많고, 이는 작품 제목에도 나타난다. 작품 제목에도 포함되는 주요색이 아닌 소수의 색들은 잡초나 새치 같은 것이 아니라, 주요색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가령 작품 [red cube](2023)에서 제목으로 명명된 색은 하나의 색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red cube’는 붉은 선이 다른 색보다 상대적으로 많을 뿐이다. 작품 [blue cube](2023)에서 모판에서 영감을 얻은 사각형 블록들은 자연과 문명 그 사이에 존재한다. 농사는 인류의 위대한 발전이었지만, 그 또한 자연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기후변화 등 여러 악재들이 빈발하는 요즘에 더 체감된다. 색도 식물의 전형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엽록소를 통해 태양의 빛을 묶어서 산소 등 유기체에게 필요한 원소를 제공하는 식물은 녹색이다. 하지만 한국말 표현에 ‘푸르른’ 자연 할 때, 푸른색은 녹색과 혼용되기도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색 선들은 푸른 계열과 보색을 이루면서 인상파 화가들이 노렸던 생생한 화면 연출에 일조한다. 보색대비는 근대 화가들의 발견이기보다는, 붉게 익은 열매와 푸른 잎이 함께 하는 식물의 보편적인 모습 아닌가. 자연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조차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자연에 모든 것이 이미 쓰여있다는 오래된 진리이다. 작가는 반쯤은 인간의 ‘생산물’인 모판의 뿌리 아래 부분을 텅 비워 놓았다. 식물 블록들은 빽빽한 밀도에도 불구하고 물 위에 떠 있는 부유물처럼 나타난다. 여백같은 공간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은 그려진 것의 흔적이다. 



part of field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31.8×40.9cm



part of field_2023_acrylic gouache on canvas_37.9×37.9cm



stare 2022acrylic gouache on canvas 60.6×60.6cm 



stare 2022acrylic gouache on canvas 60.6×60.6cm


물감 자국은 그 위에 그럴듯하게 재현된 특정 대상 또한 그리기의 산물임을 암시한다. 작품 [gray cube](2023)에서 모판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기하학적 반듯함을 잃는다. ‘gray’라는 제목 속의 색 또한 새로운 성장을 시작하는 식물과 관계가 없다. 하지만 무채색은 그 옆의 유채색을 돋보이게 한다. 작품마다 여백의 위치는 달라서 걸려있는 동질이상의 작품들은 잠재적 동감에 방향성을 부여한다. 밀도의 차이는 운동을 야기한다. 복합적인 색의 운용에도 불구하고, ‘green’은 구성안의 최근 작품들의 대표색이다. 전시장 1층의 긴 벽을 충만하게 채우는 [green cube](2023)은 12개의 패널을 이어서 가로 7미터가 넘는 벽화 스케일의 작품이다. 서울 작업실을 벗어나 당진에 작업실을 새로 마련하면서 앞으로 대작에 대한 시도는 더 많아질 전망이다. 큰 작품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작가는 작품 속 증식하는 듯한 초록 블록처럼 화면을 이어간다. 지금은 12개지만 공간에 따라서 얼마든지 확장성을 가질 수 있다.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그 예가 발견되듯, 구성된 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모판 형태의 초록 대지들은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표현인 ‘매끈한 공간’을 활주하는 모양새다. 입체인 그린 큐브들은 원근감이 적용되기도 한다. 작품 [green cube]에서 동질이상의 사각 형태들은 마치 물 위를 떠다니는 작은 대륙처럼 보인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는 바다 등을 육지나 섬으로 개조하는 실험들이 이루어지곤 한다. 이러한 인공 섬들은 문명과 자연의 혜택을 동시에 목표로 한다. 농사도 예술도 양극단에 두루 걸쳐 있어야 성과를 본다. 구성안의 밀도 높은 작업을 보이지 않게 받쳐주는 것은 바로 여백이다. 작품 [part of field](2023)에서 화면 아래편의 작은 빈 공간이 보인다. 모종의 형태로 상상될 선의 밀도가 강할수록 여백의 힘도 커진다. 속도감 있고 빽빽한 선들은 자연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stare](2022) 시리즈는 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작품 안에서 또다른 형태를 찾게 하는 구성안의 작품 특징을 보여준다. 



stare_2021_acrylic gouache on canvas_90.9× 65.1cm



stare_2022_acrylic gouache on canvas_72.7× 60.6cm



stare_2022_acrylic gouache on canvas_90.9× 65.1cm


그럼으로써 화면에 시선을 오래 고정시키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자연을 바라봤을 때와 같은 경험이다. 작가는 ‘자연을 바라보는데, 자연이 내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고, 이를 자연스러운 미감에 담고자 했다. 자연, 그 속에서 풍경을 담는 구성안의 작품은 자연처럼 중도적이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있다. 학창 시절 게하르트 리히터를 좋아하고 추상미술에 심취했던 작가가 자연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을 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구상만큼이나 코드화의 위험이 있는 추상도 아니다. 작가는 추상/구상이라는 이항 대립을 비껴간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원형을 모방하는 다른 방식일 따름이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두 가지 모방을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의 모방 뿐 아니라, 미술의 모방이기도 한 이 두 가지 모방 사이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그러나 자연 자체도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을 갖는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신이 창조한 것이다. 


2차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반대하여 1차적인 것(원형)을 선호하는 이러한 경향은 많은 종교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인류가 신의 작품이라면 인간이 만든 작품들은 일종의 하청 제작품일 뿐이다. 그래서 유대 전통에서는 인간이 그린 그림 대신 신이 창조한 야생화를 선호하게 되고, 더 나아가 아예 형상을 거부하기도 한다. 줄리언 벨은 성서의 계명을 인용한다. 그것은 ‘사물을 본떠서 만드는 대상을 금지’하는 것, 즉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받들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물을 모방한 대상을 만들고 그것에 몰두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끈질겼다. 줄리안 벨은 캔버스 위에 발린 물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회화는 무한하고 매혹적인 자연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알다/원하다, 재현하다/표현하다, 신성/인간, 자연적/인공적 등. 이러한 상반되는 단어들은 서로 결합을 되풀이할 수 있으며 수많은 결합 속에서 서로 교차한다. 이러한 교차 안에서 자연은 코드로 환원되지 않고 거듭해서 읽혀진다. 



stare_2022_acrylic gouache on canvas_90.9× 72.7cm 



stare_2022_acrylic gouache on canvas_90.9× 72.7cm 



stare_2022_acrylic gouache on canvas_90.9× 72.7cm


자연은 오래된 텍스트처럼 많은 의미를 감추고 있다. 해석자의 상상만큼이나 많은 것이 쓰여 있는 텍스트다. 종교학자, 식물학자, 지질학자, 고고학자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낳기 위한 끝없는 과정에 놓인다. 작품 [stare](2021)에서 꽃밭 위에 뿌려진 듯한 푸른 선들은 거듭해서 피고 졌을 식물의 삶을 표현한다. 봄에 발아한 식물 줄기는 여름을 지나고 가을이 되어 다음 해를 기약하며 잘게 부스러진다. [stare](2022)에서 화면 저편에 어른거리는 붉은 꽃의 실루엣은 그 위에 자유롭게 흩날리는 듯한 선들을 향기나 홀씨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선을 면으로 뭉개지 않는 것은 자연의 신선함을 강조하며, 동시에 특정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적인 선의 유희를 보여준다. 나무나 꽃은 모판들보다 더 자유로운 선들과 결합된다. 야생성의 정도가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들뢰즈는 코드를 벗어나는 회화의 야생적 바탕을 현대미술의 조건으로 희망했다.


하지만 구성안의 경우 자연을 심어놓은 화면 위에서 야생의 유희가 펼쳐진다. 줄리언 벨은 조토와 르네상스 이후, 회화가 순수 시각에 매혹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바로보기 또는 응시하기(곧 정적인 표면에 대한 강박관념)는 경험의 지속성에서 분리된다. 하지만 구성안의 작품에 면면히 흐르는 것은 물신주의로 고정될 순간이 아닌 지속이다. 수많은 색선의 교차는 지속의 감각을 고양한다. 줄리언 벨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을 참고하면서, 단순히 그 자체로서의 그림을 응시할 수 있는 순수한 지각의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림이란 항상 ‘무엇으로서’ 보이며 인식의 과정에서 항상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순수 구조에 대한 순수 해석체라는 재현의 개념을 탈피하여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용법을 지향한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놓인 구성안의 작품은 회화에 대한 순수하고 고립적인 경험을 벗어나 미술과 삶의 혼합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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