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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 카오스와의 대화

이선영

카오스와의 대화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번 전시 ‘호구와 노루발’이라는 낯선 단어의 병치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담고 있다. ‘호구와 노루발’ 전은 작년에 있었던 ‘호구에 든 여자 노인을 위한’ 전)의 확장이다. 이영희는 2022년의 전시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쓸모 있다가 껍데기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모든 여자 노인에 대한 헌정’이었다면, 이번에는 ‘누르고 삼킨 언저리를 떠도는 말(꿈)들을 영적 능력을 가진 농기의 형식을 빌려 잘 날려주고 싶은 바램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본래 전공했던 주요 직책에서 은퇴할 만큼의 나이가 됐을 때도 아내, 며느리, 어머니 등의 역할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심지어는 (은퇴했으니) 더 ‘본격적’으로 헌신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예술은 그전의 직장생활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간과 심신의 에너지가 투자되어야 하는 전면적인 활동이다. 타인들과 작품으로 소통한다는 행복을 뺀다면, 특별한 댓가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예술은 보다 순수해야 하고 초월적이기를 기대받아왔다. 



2022 호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_자칭 예술가 양반



2023 호구와 노루발_흩어지다 125x97


예술은 비루한 현실과는 다른 어떤 이상세계여야 하는 고상한 관념이 고수된 이유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희망 사항이라는 점은 애써 무시된다. 하지만 이영희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잡다한’ 문제를 가장 ‘순수해야 할’ 작업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바느질로 이것저것을 덧대어 만든 작품들은 언뜻 누더기나 넝마같은 모습이다. 특정 용도를 위해 기하학적으로 재단된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전투장에서 만신창이가 된 모습일 수도 있고, 언제나 통으로 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을 가져보기 힘든 이들이 대안적으로 채택해왔던 조각잇기의 방식일 수 있다. 하지만 헝겊 조각은 물론, 흙과 곰팡이까지도 활용하는 이영희의 작품이 단순히 무질서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조정된 혼돈’이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컨트롤된 카오스]에서 질서는 카오스의 대립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카오스를 ‘위협적인 뒤죽박죽 상태가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의 유희공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카오스가 고도의 복잡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개념이라고 본다. 카오스는 질서의 대립물이 아니라, 질서의 이면이자 그림자이며 그것의 분신이라는 것이다. [컨트롤된 카오스]에 의하면 지적인 전략들은 카오스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잠복 된 패턴들을 추적한다. 역동적인 체계들의 질서는 카오스가 질서의 적이 아니라 그것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카오스는 하나의 잠복하고 있는 질서로, 질서는 카오스로 역전될 수 있다. [컨트롤된 카오스]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여성과 카오스의 관련이다. 저자는 수학자 랄프 에이브러햄을 인용하면서, 카오스의 억제는 6천년 전 부권에 의한 모권의 정복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카오스-여성에 대한 평가절하 이후, 대지의 여신 가이아 등을 부정하는 반생태적 세계관이 주류가 되었다. 각 시대의 지배적 세계관에서 생태주의는 낭만적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이영희는 가부장적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 분절되지 않은 상태의 원초적 카오스로 소급한다. 



2022, Crack_Scattering 3_1 80x12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cotton, sewing



2022, Crack_Scattering 3_3 80x120cm pen, ink, pastel, charcoal, cotten cloth, cotton, sewing


개체-계통발생의 관계와도 같이 생명 그 자체도 포함된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인간과 죽음]에서 생물학적 복잡성의 핵심은 영원한 내적 파괴와 자기 생산 사이의, 그리고 생과 죽음 사이의 난제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계의 단순한 해결이란 그 기계 구성요소의 높은 신뢰도에 의해서 엔트로피의 진행을 지체시키는 것인 반면, 살아있는 것의 복잡한 해결이란 무질서에서 살아있는 것의 질서의 갱신을 위해, 그 무질서를 강조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에드가 모랭은 생은 적대적이며 또 동시에 협력적이고 보충적인 관계에서 무질서를 용인함과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고 또 그것과 싸우면서 그것과 함께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영희에게 예술은 ‘영원한 재조직과 자기생산’(에드가 모랭)이다. 바느질의 기계적 형태인 재봉질은 카오스적 상황을 크게 개선하지 못한다. 이영희에게 재봉질은 자유로운 드로잉의 또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작품보다는 텍스트의 성격을 가지는 작업에서 기원과 시점, 목적과 종점은 확실하지 않다. 


재봉질은 바느질보다 속도감 있게 나아가지만, 작품들의 면면은 쭉 가다가 멈추며 방향을 수시로 바꾼다. 선이 아니라 층이고 하나의 층이 아니라 여러 층이다. 씨실과 날실의 질서정연한 집합체인 직물은 이후의 작업을 통해 흔적으로만 남는다. 그림을 닮은 사각형 작품들의 외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재현주의와 다르지 않은 직조의 노동이 아니라, 자유로운 횡단한 결과의 단편같이 제시된다. 단편들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단자)가 되어 서로를 반향 한다. 이영희의 작품은 단독이 아니라 계열로 작동한다. 어느 날 전통적 축제의 깃발들이 조형적 아이디어로 떠올랐을 때, 거기에는 고정된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여럿이 행진하듯이 작동하는 세계가 중요했을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 의도된 형태가 드러나기도 한다. 나무의 여러 부분들을 연상시키는 선들이다. 그것은 글쓰기처럼 끝없이 가지를 친다. 엽맥일 수도 엽맥의 확장인 가지일 수도 있고, 자연에 바탕 한 전통사회의 유기적 조직 방식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축제적 활기로 가득한 농기(農旗) 형식의 작품에서 더 두드러진다. 



2023 호구와 노루발 28x30



2023 호구와 노루발 28x30



2023 호구와 노루발 32x38



2023 호구와 노루발 32x38


사각 평면작품들이 내향적인 글쓰기에 가깝다면 농기 형식의 작품은 외향적이다. 공동체 문화의 산물인 농기는 보다 큰 세계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이 나뭇가지나 엽맥 이미지가 자유롭게 횡단하고 수직의 선들은 경계 밖을 넘어 아래로 늘어뜨려지기도 한다. 농기 가장자리의 돌출부들이 하늘을 향한다면, 수직의 띠들은 대지를 향한다. 위와 아래로의 움직임은 개인이든 공동체의 차원이든 분노와 체념 등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어머니인 대지에서 생산력을 높여왔던 인류의 위대한 발명인 농사는 전형적인 남성적인 행위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유사 이래 여성은 안팎(농삿일과 집안일, 곡식의 생산과 인류의 재생산)에서 노동해왔다. 또는 착취되어 왔다. 색이나 형태이기보다는 그 흔적인 바탕 면의 붉은 형상들은 개인의 희생 만큼이나 편재했던 공동체의 희생을 연상시킨다. 풍요를 위해서는 자연과의 투쟁만큼이나 사회에서의 투쟁이 요구된다. 풍요를 기원하는 것에는 평등에 대한 이상이 내재한다. 평등은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이고, 농기의 경우에는 집단적인 투쟁과도 관련된다. 그 희생 또한 개인의 그것처럼 숨겨지고 덮여져 있다. 역사의 진보는 무명씨들의 희생을 동력으로 한다. 또한 그것은 액운을 물리치는 역할도 있어서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마을 어귀에 농기를 세워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농기의 영적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한국민족 문화대백과 사전) 여성 또한 오랫동안 무명씨에 속했다. 농민보다 더 큰 집단인 여성도 깃발을 세울 수 있을까. 물질적 이익의 분배보다 더 광범위하고 미묘한 문제가 쌓여있는 여성의 깃발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적절한 맥락을 가진다. 이영희의 작품은 여성주의 예술이라기보다는, 예술 안에서의 여성이다. 농사든 예술이든 풍요한 생산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계를 이어주는 매개고리가 중요하다. 그녀의 작품에는 색이 들어 있지만, 선명하게 칠해지기보다는 우려낸 듯 나타난다. 작가는 칠하기보다는 스밈을 즐겨한다. 



2023 호구와 노루발 55x40

2023 호구와 노루발 55x40



2023 호구와 노루발, 55x46



2023 호구와 노루발,55x46


직물과 바느질의 올이 드러날 만큼 옅게 염색한 작품들은 얼룩지거나 빛이 바랜 모습, 요컨대 무언가의 흔적들로 보인다. 예술작품이라는 본질적으로 인공적인 산물은 자연을 따르려 한다. 이영희의 작품은 영원한 세계가 아니라 변해가는 세계, 하나가 아닌 여럿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의 색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색 또한 선처럼 시간적 차이 작용의 결과들이다. 그것은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차이나 차연(différance)의 실행이다. 바느질도 아닌 재봉질로 미로를 헤매듯이 나아간 작업들은 결과를 통해서야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다소간 맹목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표현이나 대상의 재현이 아닌 생성의 세계라는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야기한다. 의미는 희열에서 발생한다. 전시를 할 때마다 단행본 급의 책자 형태로 결과물을 만드는 작가에게 ‘쓰기’는 작품 그 자체에 깔려있다. 바느질 자체가 ‘텍스트로서의 예술작품’(롤랑 바르트)의 특성을 보여준다. 


또한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염두에 둔다면 엘렌 식수 등,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여성적 글쓰기(I’Ecriture féminine)라는 대안적 활동으로서의 예술이다. 작가는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산업화 시대에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공장을 다녔던, 아마도 작가와 동세대인 여공들을 생각한다. 또한 그 이전에 삯 바느질으로 궁색한 가계를 책임지기도 했던 어머니 세대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영희의 ‘호구에서 빠져 나오는 법’은 집안 관련 일에 조금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에 칩거해 작업에 몰두할 때도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한국 특유의 가부장 문화에서의 탈주를 꿈꾼다. 많이 나아졌다고들은 하나, 여성이 노력해서 갖추는 역량과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객관적 통계도 나와 있다. 기득권이 침해된다는 피해의식으로 젠더 갈등도 더욱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소위 말하는 저개발 전통사회는 아예 그런 간극이 없다는 점에서 갈증이 덜할지 모른다. 



2023 호구와 노루발_날아오르다(2) 75x105



2023 호구와 노루발_떠도는 꿈(1) 54x75



2023 호구와 노루발_흩어지다(2) 97x125


인간 사회는 차이를 차별로 만들기를 멈추지 않아 왔고, 성은 확연한 차이의 징표로 간주되었다. 일반 사회와 달리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영희는 그만큼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작품 속에 떠도는 말들은 언어로서 갖춰야 할 직선적 인과성을 결여한다.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앉아 실루엣만 나오기도 한다. 얼룩처럼 쓱 다가오는 형상들은 무언가 절실했기에 작품에도 써 놓았을 사연의 가독성을 더 떨어뜨린다. 그것이 더해지면 글자는 무늬로만 남는다. 그 앞에 배치된 조형적 형상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무게감을 준다. 우리는 여전히 예술작품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술이 유희적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소비되는 유희는 아니다. 소비라고 하기에 이영희의 작품 재료들은 지나치게 소박하다. 헝겊 안팎 글자들의 선명도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완전히 가리지는 않고 ‘말소 하에’(데리다) 두는 것은 공통적이다. 


작가는 ‘배접(褙接) 광목천 뒷면에 내뱉어진 눌린 말들은 가슴으로 받아낸 웅얼거림을 지닌 채 지네 발과 용 꼬리를 달고 솟구치고 연처럼 날아오른다. 신이 내린 마을 당산제의 깃발처럼 삭풍이 몰아치는 광야에서 힘차게 펄럭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작년 전시에는 없었던 영상작품들은 여성들의 억눌린 말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세 대의 모니터를 액자화해서 벽면과 전시장 귀퉁이에 설치하고, 프로젝션은 벽면의 모서리에 비추어 영상이 왜곡되어 보이게 연출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삼키고 눌린 말들은 특히 여성들에게는 펼치지 못한 눌린 꿈들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이영희는 침묵하기를 강요당했던 타자의 말들을 다양한 형식을 통해 쏟아놓는다. 주체를 강하게 주장하기 보다는 ‘...그런데 말이죠’ 하면서 부록처럼 이어가는 주변부의 이야기다. 이러한 바깥의 말들은 가해자(또는 가부장제의 수혜자)에게든 피해자에게든 불편함을 준다. ‘미학 안의 불편함’이다. 



2023 Wandering Dream_Window in my chest



2023 Wandering Dream_Window in my chest



2023 Wandering Dream_Flowers filled with wishes 1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이라고 했던 말을 인용한다. 왜냐하면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표시하는 목소리만을 가진데 반해, 인간은 정의와 불의를 공동으로 다루는 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모든 문제는 결국 누가 말을 소유하며 누가 목소리만을 소유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이엔 맥도넬은 [담론이란 무엇인가]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언어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란 것도 없고, 방언과 은어, 속어, 특수한 언어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동질적인 언어사회가 존재하지 않듯이 이상적인 언어 능력을 갖춘 화자, 청자는 있을 수 없다. 그는 오직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지배적인 말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침묵을 강요당해온 타자들은 말할 기회가 있을 때 말을 해야 한다. 이영희에게 작업이나 전시회는 비망록처럼 꾸준히 써왔던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유력한 장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인간이 결코 배우지 못했던 많은 것을 언어를 말할 때 알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말을 중립적이지 않다. 다이엔 맥도넬은 언어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의미체계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것은 의미를 물적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관점이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라틴어 ‘Cogito’의 독일어 번역을 ‘나는 생각 한다’로 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 번역에서는 아무 근거 없이 주어(주체)인 나를 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결정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이 결국은 남성 주체만을 대변했듯이, 주어가 누구였는지는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고유한 사고라고 하는 것들은 타인들의 사고와의 교류에서 기인 된 끊임없는 피드백의 결과들’(노르베르트 볼츠)이다. 가부장적 화법의 기본은 독백이다. 그러한 독백은 대화를 가장한 명령, 타자나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로만 되돌아오는 음울한 자기지시성을 특징으로 한다. 



2023 The flag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대한 이상은 담론과 권력의 관계를 파고드는 작가에 의해 곳곳에 균열이 가해진다. 여성의 입장에서 하는 말은 다를 수 있다. 이영희의 화법은 독백이 아닌 대화를 추구한다. 단성이 아니라 다성(미하일 바흐친)이다. 바느질, 여러 겹 덧대이거나 물든 천들, 비져나온 솜, 가려지거나 번진 글자 등은 모두 다른 것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런 형태가 만들어진다. ‘다성성’과 더불어 ‘대화적 상상력’을 중시한 미하일 바흐친이 축제에 대한 이론가이기도 했던 점은 의미심장하다. 기존의 질서와 또 다른 질서 사이에 놓여있는 과도기인 축제는 얼룩덜룩 기운 옷을 입은 피에로의 물구나무서기처럼 전도(顚倒)된 세상을 잠시나마 열 수 있다. 동서고금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축제는 공식적인 변화의 계기가 있었다. 이영희의 농기에 대한 소재는 공동체에 의한 집단적 실천을 암시한다. 최근에 (배워서) 가세한 영상을 제외하면 흙, 풀, 광목천 같은 소재, 그리고 염색이나 배접, 바느질같은 것은 오래된 방식이다. 


사설시조 같은 형식도 마찬가지다. 영상 작품 [떠도는 꿈_이내 가슴에 챵 내고져]는 조선 후기 무명 여성의 사설시조에서 온 것이다. ‘창(窓) 내고쟈 창(窓)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창(窓) 내고쟈...’하는 내용은 답답한 마음에 창을 내고 싶은 당시 여성의 희망 사항이 담겨있다. 또다른 작품 [떠도는 꿈_소원을 담은 꽃]은 ‘소원을 담은 꽃이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꽃을 피우고, 찔린 핀을 단 채 뿌리 채 날아오르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내놓은 메시지 또한 우주를 떠돌면서 진지한 수신인을 찾을 것이다, 그것은 여성 문제가 오래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작가는 올해 설악에서 열린 현대미술전에서 얽히고 설킨 뿌리를 다 드러낸 흙덩어리 이미지의 작품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것은 생물학적 차이를 사회적 차이로 만드는 문제이기에 ‘본질’과 ‘규범’이 함께 작동하는 복합적인 문제이고 그만큼 해법도 복잡하다. 문제의 덩어리들을 미세하게 분절해가면서 풀어내는 일은 앞으로도 여성 예술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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