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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자연의 (재)발견

이선영

자아와 자연의 (재)발견

  

이선영(미술평론가)

  



1. 이수영



이수영, 2023, MOUNTAIN N.25, Acrylic on Linnen, 9000X140cm(이하 모든 사진 촬영 아트기획 협동조합)


이수영의 [Mountain_산] 시리즈는 굳이 산일까 싶은 색감과 형태가 특징이다. 멕시코에서 유학하고, 유명 벽화가인 시케이로스의 힘 있는 필치를 좋아했던 작가에게 산이라는 애초부터 육중한 대상은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하얀 봉우리들은 실제로 눈 쌓인 풍경에서 온 것이지만, 이수영은 대상을 보고 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랜 여정 후 고향의 재발견은 충주의 넘실거리는 산세를 다시금 주목하게 했다. 부드러우면서 풍부한 부피감과 하얀 색감 탓에 이불 같은 이불 빨랫 더미도 떠오르는 형태들은 단단한 산도 애초에는 물렁물렁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액체에 가까운 부드러운 형태가 서서히 식고 힘을 받아 접히거나 융기한 것이 산 아닌가. 이수영의 산은 하나가 아니라 죽 이어진 듯 연출된다. 주름 잡힌 대지로서의 산은 그 내부에 접힌 굴곡 면을 무수히 내장하며 이는 또한 펼침이라는 반대의 운동을 전제한다. 거시적인 운동은 일상에서도 반복된다. 가령 뛰어난 요리사는 한 덩어리의 밀가루에서도 무한의 겹을 빗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수영의 산은 중력을 받는 육중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동감이 내재한다. 작가가 고향의 물과 산을 산책하기를 즐겼듯이 관객은 주름이 펼치고 접히는 듯한 상상의 유희를 통해 산책한다. 작가는 ‘바라보는 산은 오르지 않아도 오르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 遊嬉이다’라고 말한다. 단순한 형태에 상응하는 하얀 색감은 작품마다 다르게 접힌 주름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여러 겹 발라지고 바니쉬 처리를 한 하얀 층은 비현실적인 색감과 텅 비어있는 듯 느껴질 수도 있는 형태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밀도를 유지시켜 줌으로서 자연의 실재감을 전달한다. 또한 작가에게 화이트는 하얀 자작나무에서 느꼈던 치유를 생각하게 한다. 화이트는 최초의 상태로 리셋함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한다.


 

2. 원종근



원종근, 2023, 2023 가흥예술창고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2부 원종근 전시실 측면


원종근은 이번 전시에서 기존의 [journeyer] 시리즈를 확장해서 ‘나에게서 탈출’이라는 주제를 표현한다. 작가에게 나는 확고한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지점에 있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캔버스에 그린다. 한국화가들이 여러 실험을 하면서도 대개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 종이인데 그것을 포기했다. 모필도 포기했다. 모노 톤의 아크릴 물감으로 칠해진 배경색도 전공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여백을 떠올리는 배경이나 형태를 이루는 선 자체는 먹을 쓰는 등의 흔적은 남아있다. 그는 실제로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한다. 모필 대신에 나무젓가락으로 먹을 찍어 산이나 들을 그린다. [journeyer]라는 제목에 나타나듯이 그는 여행 특히 섬에 대한 취향이 있어서, 탁 트인 풍경에 대한 원형이 반복된다. 충주라는 내륙도시가 고향인 그에게 20대 후반 처음 가본 섬은 큰 감흥을 주었다. 섬은 낚시나 해루질, 트레킹을 통해 우연히 발견하는 대상들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조각으로 제시된, 새의 머리를 닮은 나무막대기는 그러한 수집물 중 하나인데, 이는 나무젓가락으로 그리는 작품과도 통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봤던 것을 소재주의식으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길이 6미터가 넘는 큰 화면에 전개된 것은 재현주의 대신에 차이와 반복의 실행이다. 자신을 비워냄으로서 오히려 그 자리에 들어온 풍경이다. 모필을 대신한 딱딱한 필기구의 거친 선들은 자연이라는 몸에 돋아난 체모같은 형태들로 나타난다. 소름이 돋듯이 살아있는 촉을 풍경에 대입한 것이다. 하지만 노랑과 파랑 계열의 색감으로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30대 후반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산과 물도 재발견한다. 충주시 13개 읍면을 돌아다니며 ‘내가 놓치고 사는 것들’을 찾아낸 얼마 전 작업들이 그것이다.

 


3. 여은희



여은희, 2023, 시가 되는 꿈(연작), 태피스트리, 350X250cm


여은희의 [시가 되는 꿈] 연작은 태피스트리 작품 4개가 여럿이자 하나인 작품으로 설치된다. 작업실에 가득한 수채화 스케치들은 천정에서 바닥까지 내려오는 큰 태피스트리로 재탄생 한다. 충주의 풍부한 수자원을 접하고 영감을 받은 ‘물의 생태와 순환’을 표현한 스케치들은 마치 화선지에 먹물을 잔뜩 묻혀 한 번에 휙 그어 그린 수묵담채같이 세부의 농담이 살아있다.  수채화지에 수채물감으로 그린 스케치들은 보기와 달리 한 번에 그려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번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리 물을 발라놓고 스케치하는 등 풍부한 발묵의 효과를 내려 한다. 이렇게 미묘한 스케치들이 꼼꼼한 작업 공정에 의지하는 태피스트리로 재현될 수 있을까. 물론 유럽의 유명한 태피스트리 공장처럼 그림을 거의 그대로 복제하는 수준의 기술이 있지만, 여은희의 작업에는 수채화를 옮기는 작업에도 적지 않은 자율성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수많은 계열을 가진 블루를 여러 다른 색의 실들을 섞어서 구현한 것이다. 합사는 섬유로 회화같은 색의 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애초의 스케치가 워낙 절묘한 형상이다 보니 그것을 살리려고 하지만, 드로잉과 짜기는 전혀 다른 과정이다. 모태를 채우고 있는 액체같은 물 이미지가 앞으로 현실화될 잠재성을 가득 품고 있듯이, 작은 스케치와 대형 설치작업의 관계가 재현은 아니다. 가령 스케치에서 번짐과 스밈으로 형상화된 물방울은 형태는 태피스트리 뒤편까지 볼 수 있게 설치한 형식을 통해 거세게 쏟아지는 폭포수같은 이미지로 변화한다. 설치된 작품 하나에는 컴퓨터 화면의 도상이나 마크 등을 아주 작게 새겨 놓았다. 물에서 순환이라는 주제를 길어온 작가는 그 생태를 네트워크같은 인공의 그물망에도 적용한다. 식, 주와 함께 중요했던 의(衣)생활은 컴퓨터 사회를 도래하게 한 자동화의 역사가 있었다.    

 


4. 복기형



복기형, 2023, 2023 가흥예술창고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1부 복기형 전시실 측면


복기형의 전시에서 ‘자연+스럽다’는 주제는 그의 소재들이 그다지 자연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자연이란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그의 작업은 발견된 것들과의 끝없는 대화다. 소위 말하는 무에서 유의 창조는 없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집한 것들을 변조시킨 작품들은 한 작가의 산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다양하다. 작품에는 전선과 전구, 시멘트 흙손과 스프링, 어디서 뽑혀 나온 것인지 모를 철근, 종이컵과 플라스틱 케이스 등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물론 작업에 쓰이는 것보다 더 많은 대상들이 버려져야 하는 수집가 스타일의 작업에 따른 난점도 있다. 이전 전시 제목은 [먼지 채집](2017)은 그의 방식이 수집이라는 점, 동시에 그 수집물들이 먼지같이 주변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우주가 먼지로부터 생성되었다는 학설도 있을 만큼 먼지는 중요한 요소다. 그는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애매한 것들, 나머지들, 잉여, 그 틈새에서 유희하고 작업하는 것을 즐겨한다. 코드화 코드 사이에서 코드가 되기 이전, 또는 이후의 것들에서 작가는 작업의 단초를 구한다. 발견하고 변형하는 방식에는 작가의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부터 현대의 초현실주의까지, 미술사는 오래된 벽의 바닥의 얼룩이나 균열에서 작가의 무의식과 만나는 형태들이 우연히 발견된 예를 적지 않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복기형은 ‘내적 충동’을 중시한다. 그것은 그가 작업의 지속을 위해 하는 아르바이트가 거의 재현에 가까운 노동이기에 더욱 그렇다. 작가는 재현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소한 것까지 코드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율과 자유의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기에, ‘자연스럽다’는 작업의 오래되면서도 새로운 기준으로 다가온다.

 


5. 리혁종



리혁종, 2023, 2023 가흥예술창고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1부 리혁종 전시실 전경


[레지던시 표류기-충주]로 붙여진 리혁종의 전시는 죽 널어 말린 시레기부터 솜씨를 잘 발휘해서 깍은 조각품까지 다양한 것들이 공존한다. 전통 공예가인 부친과의 협업 작품도 있다. 작가는 이를 ‘일기같은 결과보고전’이라고 말한다. 개인에게는 의미가 연결되지만 타인에게는 그럴수만도 없는 다양한 소재들은 표류한다. 예술은 자고로 깊이와 본질을 가져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러한 목적이 결국은 보수주의로 귀결될 형이상학적 관념의 재현임을 염두에 둔다면, 표류도 나쁘지는 않다. 표류는 본질보다는 실존, 관념보다는 상황을 중시하던 일단의 아방가르드의 기치이기도 했고, 세계를 깊이가 아닌 표면의 모델로 보는 현대철학이나 심리학의 경향에서도 발견된다. 리혁종은 ‘자본의 사이클에서 벗어난 것을 수집하여 변형, 제시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자본과 생태의 충돌에 대한 문제의식과 감수성이 있으며, 표류를 통해 기성의 질서로부터 탈주한다는 목표,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방식의 삶과 작업에 대한 지향을 알려준다. 그가 끌어들이는 다양한 소재들은 예술이 제시하려는 대안의 질서와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소재 중 특이할만한 것은 2008년경부터 시작되어 앞으로 지속할 ‘이카루스의 추락’이라는 주제의 차용과 전유이다. 이카루스 상은 수집한 나무나 목재로 된 옷걸이의 일부에 조각하는 식으로 제시되는 등, 여러 형식의 변주가 있다. 그에게 이카루스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이자 무모한 도전을 상징한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비상한 나머지 날개가 떨어져 나가 바다로 추락했다는 신화로 알려져 있다. 이 맥락에서 태양은 욕망의 상징다. 하지만 작가는 욕망을 억압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진보적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이카루스를 추락시킨 ‘황색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탐색한다. 

  


6. 이경민



이경민, 2023, 2023 가흥예술창고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2부 이경민 전시실 전면


물렁물렁한 흙을 빚어 가마에서 초고온으로 구운 도자는 돌처럼 단단하지만, 깨기지 쉽다는 통념이 있다. 이경민은 도자의 이러한 이중성과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중첩시킨다. 치료나 관찰을 위해 그 기관만 고정시킨 듯이 동그란 틀에 안치된 뇌나 심장, 도처에 출몰하는 해골 형태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항상성, 즉 유기적 총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들이다. 즉 깨지기 쉬운 단편들이다. 가족과 인척의 병간호 때문에 수년간 병원에 상주하면서 죽음과 그에 이르는 인간의 취약한 면을 관찰하게 된 경험이 해부학적 도상을 낳았다. 유난히 상황에 대한 감정이입이 강한 작가에게 타인의 고통은 곧장 자신의 그것이 되었고, 그 상황은 또 다른 상처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지만, 작가로서는 필요한 자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과하면 병이라 망각하기 위해 애쓴다. 전적인 망각은 죽음이고 카오스이다, 작업실 여기저기에 빼곡이 붙어 있는 메모지는 망각하면 안되는 작업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다. 작가는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매 순간 투쟁한다. 전시 개념인 ‘카오스모스’는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이 아닌 공존과 대화를 말한다. 작가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해부학적 도상과 일련의 거리를 유지한다. 액자 역할도 하는, 둥근 틀은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하는 역할을 떠올린다. 팬데믹 이후 도처에 죽음은 편재하며, 경쟁과 전쟁이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죽음 곧 ‘카오스’는 매우 가까이 있기에, 이경민의 강한 감정이입 성향은 현실성이 있다. 감정이입이 전혀 안되는 이가 ‘싸이코패스’ 아닌가. 무감각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현대사회는 점차 싸이코패스를 늘려나가고, 그것이 또 위험사회를 지속시킨다. 작가는 편재하는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경고(Memento mori) 함으로서, 자신에 대한 방어와 작업의 전개를 동시에 행한다. 


출전; 충주중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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