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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 사라져가는 세계의 흔적 속에서

이선영

사라져가는 세계의 흔적 속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재은의 작품에 두드러진 건축적 요소는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건축 특유의 굳건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축적인 세계의 취약함을 드러내기 위한 역설적 장치다.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언어, 수, 화폐]의 주장에 의하면 건축의 이미지는 물질 뿐 아니라 정신의 모델이기도 했다. 계단이나 창, 스카이라인 같이 재현적 요소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설계도나 투시도 같은 추상적 차원이다. ‘Interval’ 시리즈의 초기 작품인 [Interval](2006)은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가 건축에서 온 것임을 암시하는 하늘색 바탕이 보이며, 2010년 작품에서는 스펙터클한 구도를 가지는 건축적 풍경 위로 종이 비행기들이 날아다닌다. 2015년 작품에는 창밖으로 노을지는 풍경이 보이는 실내같은 구성도 보인다.  [Interval 1](2010)은 건축 중인 구조를 청사진처럼 푸르게 표현했다. 거기에서 뻗어나가는 직선들은 작품 속 선의 기원을 암시한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특정되지 않아도 도시를 이루는 선들은 산재하며 그것들의 다양한 조합은 현대적 도시 안에서의 삶에 대한 인상을 전달한다. 



 Interval 1   90×72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Interval 30  38×28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특정 기능을 위해 생산되었을 단편들은 유기적 전체라는 상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엄밀한 규칙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규칙화될 수 없는 부분을 떠올린다. 이러한 우주에서 선들은 넘기 위해서, 면들은 침식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하다. 구축(construction)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화면은 그와 연동되는 탈구축(deconstruction), 즉 해체의 어법이다. 구성된 것은 해체될 수 있고, 그 역도 성립한다. 구성/해체의 패러다임은 보다 내적이어서 ‘유기체가 아니라 유전자의 체계’(장 피아제)와 비교될 수 있다. 생명공학이 더 발달하면 유전자의 재조합으로 다른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다. 도시적 삶에 내재한 추상성은 근대 초기에는 이상세계의 필수 요건이었다. 현재 한국의 많은 주거지가 아파트이고 작가 또한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추상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정재은의 작품에서 추상은 사실주의보다 더 구체적일 수 있다. 그것이 현대미술사에서 구체예술(concret art)을 낳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보편화된 아파트라는 주거 형식은 마치 단자(monad)처럼 내부만 있다. 바닥도 천정도 벽들은 온전히 누구만의 소유가 아니다. 어느 지역의 무슨 브랜드의 아파트인가 하는 것들이 겉모습을 형성하며 학군, 역세권 등 시세라는 물신적 지표의 어딘가에 걸쳐 있다. 이 지표는 외형보다 더 중요하며, 고정되지 않고 요동친다. 정재은의 작품에는 그래프를 비롯한 다양한 좌표의 특징인 여러 방향의 선들이 산재한다. 실제 모델은 집 앞인 평촌 인근이다. 거기에는 학원들, 쇼핑센터와 지하철같이 사람이 많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이다. 작가는 그곳이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통과하는 현대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본다. 그것은 영국의 지하철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보다는 보편이다. 



Interval 152.5×29.5cm mixed media on panel 2010



Interval 116.8×91cm mixed media on canvas 2006


특정 장소라기 보다는 비(非)장소(마르크 오제)이다. 그것은 익명적인 대중의 물결에 상응하는 환경이다. 화면은 대지에 뿌리박은 거주지보다는 투시감과 빠르게 통과하는 요소들로 분해되어 있다. 초점이 여럿이며 잔상이 있는 공간이다. 정재은의 조형 언어는 ‘반복과 중첩’이다. 작가는 기법에 대해 ‘젤스톤을 사용하여 겹쳐지는 감각적인 흔적은 화면의 베이스 위에 페인팅과 실제적 건축물에서 포착하고 대상을 재구성하여 실선, 점선, 면 등의 드로잉’이라고 밝힌다. 자본의 빠른 회전을 위해서 생산/소비가 분리된 도시, 즉 머물기보다 통과하는 공간은 기억이 고일 틈이 없다.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는 돈만 쓰고 빨리 이동해주어야 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들고나는 움직임이 많고 차들도 많지만, 공허하다. 입체적 요소가 있는 구축, 기하 추상적 면모가 있는 구성 등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직선적인 요소가 강하면서도 층들이나 회화적 표면도 나타난다. 


작품 [Interval 07](2012)은 평면적인 속성이 강해 구축 보다는 구성적이다. 작품 [Interval 11](2018)은 사선의 역동적 구조의 기하 추상 작품으로 건축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는다. 작품의 출발인 도시적 현실을 상징하는 기표들로 도시적 삶에 대해 은유한다. 건축에 대한 물리적 실재감 대신 화면을 차지하는 요소들은 가변성과 속도감,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소멸이다. 가령 건축적 풍경 속에는 인간이나 자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곳은 현대도시가 원하는 바처럼 빠른 통과만을 원할 뿐, 삶의 진면모라고 할 수 있는 머무름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속도는 모든 것을 추월하고, 초월해 버렸다.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당시 첨단 기계문명의 산물인)‘철도 때문에 공간은 소멸되었고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만 남았다’(하이네)를 인용하면서 속도가 변화시킨 것들을 분석한다. 하이네는 그 의미심장한 말을 19세기 중반에 했지만, 시인답게 이후에 가속된 추세를 예견한다. 



Interval 140×180cm Mixed media on canvas 2006



Interval 140×180cm Mixed media on canvas 2006



Interval102 180×60cm mixed media on panel


폴 비릴리오에 의하면 속도에 의한 시공의 소멸은 이국적인 것을 향한 끝없는 여행의 광막함을 허공의 광막함으로 바꾼다. 속도에 의해 그동안 살던 세계에서 추방되어 사라진다. 남는 것은 흔적, 즉 파편들 뿐이다. 속도가 낳은 현실은 ‘흘러가고 있는 현실’, ‘소멸되어 가고 있는 현실’, ‘사라져가는 현실’(폴 비릴리오)이다. [소멸의 미학] 중 ‘시간과 속도의 여행’이라는 단락에서 저자는 ‘강렬한 빛의 속도를 위해서 몸의 속도를 포기’한다고 말한다. 이는 이미 앉은 자리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인터넷 시대도 예견한다. 폴 비릴리오는 ‘작은 방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빛의 영상은 개인의 모든 움직임을 대체하리라’고 말한다. 기계의 속도가 더욱 신속해지면서, 기술자의 문화는 우리를 끊임없이 속도 계기판, 원격 조종기 따위의 부역 시스템에 더욱 종속시켰다는 것이 폴 비릴리오의 비판이다. 합리적 기술들은 인간을 객관적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게 만들면서 기억이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론가들의 진단처럼, 정신분열증적인 현재만이 남아있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의미 있게 연결시킬 맥락은 주인 잃은 기표들로 흩어진다. 편집이 근대에 필요했다면 분열은 현대를 살아가는 경쟁력 있는 속성일지도 모른다. 이미 체감되고 있는 이러한 도시 생태계 이전은 어떠했을까. 사회학자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장소의 표지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전(前)현대적 공간은 사회적 실천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즉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장소표지판은 비워지고 추상적 공간이 대대적으로 발전한다는 것, 요컨대 시간적 기초마저 파괴하여 시간을 일련의 연관되지 않은 우연적 사건으로 환원시키는 최종적 허무주의로 다가온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주장이다. 



INTERVAL ARCH 33.4×24.2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Interval Arch-V  91×116.8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정재은의 작품에서도 소멸은 속도와 밀접하다. 작품 [Interval](2006)은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류가 강한 고층 건물은 휘어진 선들로 인해 속도감, 중량감이 있다. 같은 해에 제작된 초현대식 건물의 일부를 포착한 듯한 또 다른 작품에서 구조적인 선들의 움직임이 강력하다. 기계와 비교되는 현대건축은 작품 [Interval 102]처럼 긴 열차가 초고속으로 소실점으로 달리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화면을 지배하는 속도감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인간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구조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산물이다. 아치 열주가 등장하는 [INTERVAL ARCH](2022) 시리즈는 고풍스러운 양식에 초현실주의적 정적에 감싸여 있지만, 소실점을 향해 급속히 사라지는 원근법을 활용한다. 물론 여러 기하학을 공존시키는 작가의 방식에 따라 붉은 평면이나 검은 평면으로 원근법을 상쇄하기도 한다. [구조와 속력으로] 시리즈는 속력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 있다. 


사선이 많이 사용된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는 작품 [구조와 속력으로](2005)의 가운데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K는 빠른 성장을 했던 한국의 저력이 나타난 현상들에 K자를 앞에 붙이는 관행을 떠올린다. [구조와 속력으로 02](2005)에서 두툼하게 칠해진 사각 면들은 기우뚱하면서 변화를 준비한다. 정재은은 주로 회화작업을 하지만, 매체의 발전 속도가 뒤흔든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AR 기술 등을 학습하고 작업에 적용하는데도 적극적이다. 속도는 많은 것은 사라지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해체주의식으로 말하자면 ‘말소 하’에 놓인다. 조셉 칠더즈와 게리 헨치가 편집한 [현대문학 문화 비평용어 사전]에 의하면 해체주의를 주장한 데리다가 생각하기에 복원가능한 기원이나 진리의 계시나 결정 가능한 일의적 의미 등의 관념에 의존하는 권위, 체계화, 인증 혹은 그 밖의 해석상의 관습에 대한 호소를 의미상으로 나타내는 단어는 활자 상으로 검정색의 커다란 X를 찍어 표시한다. 



구조와 속력으로07   162.2×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05



구조와 속력으로02  162.2×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05



구조와 속력으로22 55×45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말소는 완전히 가시적이었던 각인의 흔적(trace)을 남긴다. 데리다가 어떤 말의 기호를 ‘말소 기호 아래’ 놓을 때 그는 일의적 의미, 진리, 혹은 기원이라는 것의 부재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마이클 라이언이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말하듯이, 텍스트(후기구조주의적 사상에 의하면 작품뿐 아니라 주체, 세계를 이르는 용어)는 차이적인 그물망, 즉 끝없이 자기가 아닌 어떤 것, 다른 차이적 흔적들과 참조 관계를 맺는 흔적들의 직조물이다. 마이클 라이언은 데리다가 강조한 흔적을 존재의 현존성이나 의식적 사고를 모두 무너뜨리는 이타성의 차이적 관계라고 풀이한다. ‘흔적은 현존이 아니라, 현존이 전위되고 치환되고 자신을 넘어 참조관계를 기지는 현존의 환영(simulacrum)이다. 흔적은 위치가 없다.’(데리다) 해체(deconstruction)는 정확한 형태나 의미를 불확실하게 하는 현대미술의 경향과 함께한다. 정재은의 작품에서 흔적은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문자, 숫자의 열, 겹겹이 칠해지고 밀리고 벗겨진 물감 자국으로 나타난다. 


작품 [구조와 속력으로 07](2005)에서 화면을 지배하는 X자형 구도는 고정적 재현이 아닌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글자나 숫자는 마치 암호같은데, 그것은 쓰기에 방점을 찍은 해체주의적 실천과 연관된다. 또한 그것은 기호들의 모호성을 말한다. 건축의 안과 밖이 동시에 보이는 듯한 작품 [구조와 속력으로 22](2015)에서도 난수표같은 숫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숫자는 지시 대상을 저 멀리 떼어놓는다. 지시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기호의 열은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마이클 라이언의 [해체론과 변증법]은 ‘세계는 흔적들의 조직이며 서로서로 참조의 관계를 지닐 때만 자율적 사물들로서 존재한다’(데리다) 말을 인용하면서, 사물들을 기호로 간주한다. 그에 의하면 사물들은 기호처럼 항상 다른 곳에 자신의 존재를 드리운다. 하나의 기호는 항상 그밖에 다른 것의 기호이며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Interval11 72.7×90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Interval202 31.8×40.9cm Mixed media on canvas


기존에 중시되었던 말하기가 주체의 현존을 가정한다면, 해체주의에서 강조되는 글쓰기는 끝없는 차이의 실행만을 남겨둔다. 작품 제목에 포함된 ‘Interval’이라는 키워드는 차이를 강조한다. 2022년 개인전에서 처음 등장했고, 연이어 열린 3번의 개인전에서는 ‘Interval-city’라는 부제가 사용되었다. 정재은에게 간극은 특히 도시적 삶과 관련되는 것이다. 작가는 ‘공간의 기운을 간격, 거리, 사이, 틈 (정도, 질, 양 따위의)차, 격차들을 통해 화면 안에 속도감이나 서로 다른 기표들로 얹어진 중첩의 이미지들로 모호하고 다채롭게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존재와 부재의 차이, 의미와 무의미의 간격,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 인식과 존재, 재현과 복제 등의 관계들 속에서 정체와 주체성을’ 찾는다. 많은 간극이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은 현실과 기호, 기표와 기의의 간극이다. 미디어 환경 속에서 기호와 기표는 현실과 의미를 추월해 버렸다. 


차이가 본질이나 현실을 대체하는 것은 철학뿐 아니라 현대와 도시적 삶에서도 그렇다. 건축 설계도의 전제인 기하학은 실재가 아니라, 차이적 체계의 산물이다. 기하학에서는 그자체로는 검증될 수 없는 선험성을 가지는 최초의 공리가 그다음의 규칙을 연이어 규정한다. 소실점을 향한 원근법부터 접고 펼치는 유동적인 공간을 암시하는 기호들이 혼재하는 화면은 여러 기하학의 공존을 말한다. 추상임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그림자를 떨구는 도형 등이 등장하며, 위와 아래가 분명히 구별되는 중력감도 있다. 작품 [Interval 501](2020)은 여러 겹 겹쳐진 사각형 구조물과 그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그림자를 보여준다. 밝은 노랑 바탕은 가득한 빛의 느낌으로 남아있다. 작품 [Interval 19](2018)은 밝은 바탕으로 형태를 강조한다. 원근법적인 선과 그에 따른 비율로 서 있는 벽체들이 보이지만 화면 가운데에는 접힌 것 같은 위상기하학적 형태가 공존하며, 마치 3차원 공간에서처럼 그 아래로 그림자를 떨군다. 



Interval19 50×7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Interval 501 162.2×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Interval RE 162.2×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바탕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해 고대부터 유래된 유클리드 기하학은 부정되었지만, 여전히 여러 기하학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작품 [Interval 18]에는 원근법적인 선이 바닥에 깔려있고, 들어가는 문. 벽 또는 큰 창같은 요소가 보이며, [Interval 218](2012)은 전경과 후경 사이의 공간감을 원근법적인 소실점으로 극대화한다. 작품 [Interval 101]은 화면 바닥의 원근법적 공간을 상대화시키는 여러 시점의 기하학적 투시도가 특징이다. 체계를 실재화하는 것은 관념론이지만, 세계가 코드화로 식민화되는 만큼 체계는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다. 실재는 코드를 통해서 인간사회 규칙의 회로로 진입하며, 그것은 문명화, 즉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함으로서 가능하다. 하지만 자율성은 상대적일 뿐이다. 기하학적 요소로 이루어지는 작품이 깔끔하게 선으로만 마감될 수 없는 이유이다. 정재은의 작품 속 선들은 공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시간적 과정에 놓여있다. 


선들은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향하며, 붓터치가 남아있는 색 면들과 상호작용한다. 지배적인 형태적 요소는 선이지만 회화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화면에 남아있는 붓터치 또한 끊긴 선들처럼 불확실성을 표현한다. 사각형 건물의 모서리가 전경에 있는 작품 [Interval 203](2019)에서 선 안의 많은 선들이 있고, 거기에 다양한 색을 접어 넣었다. 원근법적으로 배열된 바닥의 그리드. 수직, 수평, 사선 등 선적 요소로 구성된 작품 [Interval 212](2015)에서 두터운 재질의 미디엄으로 겹과 층이 새겨져 있는 면이 보인다. 자, 마스킹 테이프, 겔 미디움 등이 활용된 화면은 중첩, 흔적, 속도감 등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최근 전시에서 엽서에도 등장한 대표작품 [Interval blue]는 그간에 등장했던 건축적 요소들이 푸른색 심연에 잠겨있다. 심연에서는 지상의 모든 것이 느려진다. 또는 멈춘다. 블루가 내포하는 가장 강력한 장소인 바다는 생명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말의 자리이기도 하다. 



Interval212 55×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Interval203 45×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9



Interval blue162.2×130.3cm Mixed media on canvas


근대의 직선적 역사관과는 달리,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에게 가한 부정적인 충격에 의해 북극의 얼음이 녹는다든가, 해수면 상승이 야기된다든가 하는 등의,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가 있다. 이 작품도 다른 작품들처럼 계단을 비롯해서,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단편들은 자유롭게 떠돌지만, 색감을 통해 그것들을 담아내는 장을 부각시킨다. 현대사회의 속도는 우연적이 아니라 정재은의 제목 속에 들어있는 키워드처럼 구조적이다. 근대 이후에 세계화와 정보화를 통해 더 가속되었다. 이러한 속도는 단편화, 사라짐을 낳았고, 예술 또한 이에 상호적으로 반응했다. 화가에게는 그러한 장이 바로 회화이다. 화가에게 색은 형태보다 더 중요하다. 이 작품 속 블루는 쉽게 코드화될 수 있는 하나의 색이 아니다. 색은 감(感)이다. 작가는 자신이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쓰는 회화를 통해 회화마저 삼켜버리는 현대사회의 질주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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