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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 살갗 아래 고동치는 생

이선영

살갗 아래 고동치는 생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명진의 ‘살갗 아래’ 전은 장지나 캔버스 위에 한지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와 물감을 쓰는 작품에 응집력을 부여하던 이전의 모노톤 화면과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오랫동안 그려왔던 검게 그을린 그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것은 코로나 시기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듯한 침체를 극복하고픈 바램을 담고 있다. ‘살갗 아래’ 전의 작품들은 한 꺼풀 벗겨진 피부처럼 표층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것들이 요동친다. 형태가 아닌, 형태 이전의 혹은 형태 이후의 과정들이 드러난다. 그것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해당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울음보가 터지고 뿔이 나고 놀라운 상태에 있다. 그 모두가 ‘정상’은 아니다. 간혹 ‘눈보라 속에서’ 같은 이상 기상 상황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에 의해 조형 요소들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들썩이는 화면에서 그 무엇도 자명하지 않다. 최근 화면에 들어온 색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길위에서Ⅰ_캔버스에 한지,과슈아크릴릭,53x33.5cm,2023



눈보라 속에서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53x45.5cm,2022



여인Ⅲ-속삭임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65x53cm,2022-2023


한지 꼴라주를 포함한 기법의 산물인 중층적 표면이 추상이나 장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인간 드라마가 있기 때문이다. 주로 자신과 지인들이 등장하지만, 일상의 에피소드를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카프카적 주인공처럼 B, K 등의 이니셜이나 소년, 소녀, 여인, 마더 등으로 호명된다. 그 누구였지만 그 누구도 아닌, 그래서 누구나 해당 될 수 있다. 고독, 우울, 충만 같이 제목 속에 포함된 감정도 보편적이다. 그러한 감정을 낳은 구체적 일화나 사건이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암시와 은유를 통해 이야기해 왔다. 무엇보다도 ‘살갗 아래’는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이 공유한다. 살갗 아래의 차원에서 흑인종과 백인종, 미녀와 추녀의 차이는 없다. 살갗을 입고 세상에 온 생명은 살갗을 벗고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간다. 살갗 아래는 개체로서 자기 항상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직면한 원초적 현실이다. 개체가 상처받거나 죽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살갗 아래’는 생과 사의 경계 지대를 말한다. 상처나 재생의 장이다. 


몸은 심연에 감춰져 있고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몸은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에 따라 단편적으로 불쑥불쑥 드러나 판토마임같이 ‘말’ 한다. 작품의 거친 표면들은 작가가 화면 또한 살갗으로 간주함을 알려준다. 한 꺼풀 벗긴, 또는 매끈하게 마감하지 않은 표면들을 그대로 노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물성의 실험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물화란 그가 저항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다. 물화의 조건은 정지다. 김명진의 그림에는 기도 같이 고요한 상태조차도 격한 드라마가 있다. 형식적으로 그림을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물화의 한 방식이기에 거부된다. 작업은 자신 살갗 아래를 들여다보고 만져보는 과정이다. 질서의 산물인 유기체는 카오스와 대결, 또는 대화한다. 결론은 없지만 그러한 과정은 삶과 예술에 공통적이다. ‘살갗 아래’라는 전시 부제는 살갗이라는 해부학적 부위의 특성 때문인지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이 통렬한 전시부제를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의 기본을 집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달빛 아래Ⅲ-대화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릭,72.5x94.5cm,2021,2023



노을의 품에 눕다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45.5x53cm,2023



자매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53x65cm,2023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인간의 피부를 우주복과 비유하면서, ‘우리 내부에 있는 새빨간 잼과 젤리를 유지 시켜주는 피부는 우리와 세계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감각의 박물관]에 의하면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어적인 측면 외에 더욱 경이로운 점은 피부가 스스로를 복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한다는 점이다. 또한, 거의 모든 문명에서 피부는 색칠하고 문신하고 장신구로 치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캔버스가 되어 주었다. 피부는 그 자체로도 놀라운 표면이지만, 해부학이 미학에 줄 수 있는 또 다른 영감은 그것이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 발톱, 가시, 발굽, 깃털, 각질, 머리카락 등이 모두 피부(의 변형)이다. 피부와 비교될 수 있는 화면은 외계로부터의 단절이나 보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처받고 아무는 장(場)이다. 살갗 아래에 주목하는 것은 세계와의 접촉을 더 민감하게 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감각의 박물관]에 의하면 감각은 피부의 맨 위층이 아니라 그 아래쪽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금고 털이범이 손가락 끝을 사포로 문지른다고 한다. 


그것은 피부 맨 위층을 얇게 해서 촉각 수용기가 표면으로 나오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김명진의 ‘살갗 아래’같은 화면은 시각보다 더 원초적인 촉각성에 호소한다. 이 원초적 감각은 승화되어야 했지만, 작가에게는 승화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은 역행이나 퇴행도 불사한다. 질 들뢰즈는 매끈하게 정리된 재현주의를 거부하면서, 승화보다는 역행의 길을 가라고 권고한다. 그는 [차이와 반복]에서는 광학적 공간 대신에 촉각적 공간을 제안한다. 저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의미와 표상 대신에 생산과 작동의 문제를, 목적 대신에 과정을 중시하면서 표상의 세계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촉각적 공간은 회화의 가능성을 예시한다.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의 대비에 의해 정의되는 광학적 공간과 눈으로 만지는 촉각을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촉각적 공간은 따뜻함과 차가움의 상대적 대비에 의해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운동에 의해 정의된다. 



k의 눈물_장지에 한지, 과슈아크릴릭, 53.5x37.5cm,2022



그 소년이 온다Ⅱ_장지에 한지, 과슈아크릴릭, 53x35.3cm,2022


여러 재료들이 복합된 김명진의 작품은 촉각적 공간을 이루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야생적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회화의 바탕에는 ‘흐릿함, 비결정, 형태가 잡아끄는 배경의 작용, 그림자가 노니는 두터움, 뉘앙스가 주어진 어스름한 직물적 짜기,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효과’(질 들뢰즈)가 지배한다. 형이상학으로 대표되는 지배적 상징계의 코드화를 지양하며 더 원초적인 현실로 내려가려는 시도는 철학뿐 아니라 정신분석학에서도 이루어졌다. ‘피부가 없는 빨간 살의 고동’(라깡)과 비교된 퇴행(regression)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딜런 에반스가 편집한 [라깡 정신분석 사전]에 의하면, 라깡의 이론에서 퇴행은 본능적 의미도 아니고 앞서 있었던 것의 부활도 아닌 상상적인 것으로 환원된다는 의미이다. 사전에 의하면 퇴행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주체라기보다는 어떤 요구들의 재연결을 뜻한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이런저런 초상은 지배적 사회적 요구를 담는 재현의 거울이 추구하는 가상적 통일을 거부하고 원래의 분열된 형태로 소급된다. 


여러 재료와 물감으로 제작된 선과 색은 유기체의 재현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생명의 운동을 표현한다. 한지 꼴라주와 과슈, 아크릴이 함께 하는 복합적인 화면은 매끈하게 정리되어야 할 형태의 실루엣을 더욱 흐트러지게 한다. 안과 밖을 나누는 가장 민감한 경계선인 몸의 해체는 죽음이나 그것에 이르는 병이다. 작품 [B에게]에서 표면이 아니라 중층적 표면이 된 얼굴은 지금도 뭔가 떨어져 나가는 듯 어수선하다. 동일자를 대표하기보다는 가까스로 자기 형상을 유지하는 얼굴이다. 얼굴의 고정은 순간에 불과하다. 이번 전시의 드로잉 부문을 이루는 초상들은 ‘과정 중의 주체’(줄리아 크리스테바)이다. 한편 얼굴이라는 가장 밀집된 도상이기에 관객은 그 와중에도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재현의 체계가 아니어도 닮음에 이른다. 이번 전시에서 적극적으로 들어온 색은 흑/백, 어둠/빛의 밀고 당김으로 이루어진 이전의 모노톤 풍을 벗어난다. 



정원-사람을 보라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60.5x50cm,2020,2023



멀리보는 사람__보드지에 한지, 과슈아크릴릭,콘테,40x30.5cm,2023



김명진_여인Ⅱ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72x53cm,2022-2023



김명진_수녀들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릭,50x50cm,2023


살갗 아래의 덩어리들은 자신이 비롯된 자연적 바탕으로 다시 돌아간다. 캔버스 작품 [눈보라 속에서]는 언뜻 화면 전체가 휘몰아치는 눈보라 같다. 하지만 숨은 그림찾기 처럼 두 인물이 불안한 눈길을 교환한다. 인물들도 눈입자처럼 흩어진다. 마음 또한 몸처럼 경계가 파열되는 순간이 있다. [k의 눈물]은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눈물보가 터지는 모습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체액은 몸의 경계를 뚫는다. 무채색과 유채색의 파편들이 얼굴의 흔적을 겨우 유지한다. [무제]에서 눈과 입가에서 흐르는 하얀 액체는 감정이 물질로 드러난 것이다. 일기처럼 바로바로 자신을 꺼내 보인 드로잉에서는 삶과 예술의 기조인 ‘고독과 우울’이 발산되는 자연스러운 장이다. 작품 [고독과 우울에 대하여]는 푸른 바탕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입자들이 상처를 무늬로 전환시킨다. 작품 [고통]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같은 형상은 인류를 위해 희생한 이의 고통을 상징하는 대표적 도상이다. 


하지만 김명진의 작품에서는 상징적 도상으로서의 단단한 일체감이 흐트러져 있다. 가시면류관 자리는 고뇌의 고통으로 터져 나간다. 그 또한 살갗 아래의 몸이다. [작은 충만]에서 충만 또한 고통처럼 몸을 자르며, [노래하다]는 안에서 터져 나오는 육성이다. [불꽃과 머리]는 코로나 기간 동안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는 작가의 고뇌를 떠올리며, [사춘기]는 주변으로 온몸이 폭발하는 듯한 격동기다. [길위에서Ⅱ]의 큰 얼굴은 우주의 심연 속에서 일어나는 초신성 폭발처럼 환하다. 경계의 파손 또는 확장은 신체의 단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붉은 손, 초록구멍]에서 손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해부학적 형태가 분명하다. 붉은 손바닥을 감싸는 노랑은 주변의 뭉게구름 같은 형상들과 맞물려 빛을 연상시킨다. 화가는 확실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가 아니라, ‘뜬구름 잡는 듯한’ 불확실성에 잠겨있는 사람이다. 현실을 더 자세히 보는 화가일수록 그것의 불확실성 또한 높아진다는 역설을 체감한다. 



마더Ⅱ_캔버스에 한지,과슈아크릴,콘테,자개,65x45.5cm,2022,2023



하나이면서 둘인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53x45.5cm,2022,2023


김명진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두 인간은 인간들 관계에 대한 원초적 모델로 다가온다. 그들은 마주하고 함께 산책하고 무엇인가를 같이 목격하고 겪는다. 크기 차이가 큰 경우 작은 인간은 상상일 수도 있고, 거리를 둔 상황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마주한 두 인간은 서로를 밀어내는 것일까 끌어안는 것일까. 산책을 소재로 한 작품 [산책자]나 [우울한 산책]은 부부 화가의 일상에서 산책의 중요성을 짐작케 한다. 그들은 서로 대화하면서도 각자 자연과 대화하고, 또 자신들의 화폭과 대화할 것이다. 그림도 산책이다. 산책은 대개 정해진 여정을 따르는 반복적 일과지만 그때그때 맥락은 다를 수 있다. 정원과 정원 밖의 자연은 산책자가 작품의 영감을 받는 중요한 원천이다. 노을과 달빛 속에서 산책자는 교감한다. 작품 [노을의 품에 눕다]는 충만감을 주었을 노을보다도 그들이 누운 검은 대지의 표현이 압도적이어서 불안하다. [달빛 아래] 시리즈에서 산책자들은 함께 걷고 대화한다. 


운명의 작대기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고 얼굴이 붙은 듯한 [하나이면서 둘인] 존재다. 중년의 작가는 작품 속에서 소년을 호명한다. 소녀는 영혼의 단짝으로 등장한다. ‘그 소년이 온다’는 2015년 개인전 [소년, 만나다]에서처럼 소년이 주인공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년’은 드로잉과 캔버스로 왔다. 드로잉에서 자신의 여러 면모가 탐구된다. 자기 안의 소년을 꺼낸 이 작품은 광기 어린 거친 분위기다. 하지만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는 않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 [그 소년이 온다]에서 정작 ‘그 소년’은 숨은 그림처럼 찾아야 한다. 화면을 압도하는 이는 여성이며 거의 여신급이다. 검은 새를 팔에 앉힌 그녀는 자연을 조종할 수 있다. 아래로 늘어뜨려진 여인의 치맛단은 그대로 대지가 되어 펼쳐진다. 여인은 대지로부터 솟아나 빛의 영역에서 기념비적 존재로 서 있다. 빛은 묻혀있던 어둠을 비출 것이다. 바닷가가 고향인 작가는 어릴 때 굴껍질이 쌓인 장소에서 넘어져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큰 상처를 입었다. 



김명진_ 그 소년이 온다Ⅰ_캔버스에 한지,먹,과슈아크릴릭,194x260cm,2022-2023


‘그 소년이 온다’는 여러 트라우마로 중첩된 자신과 화해하려는 의미를 담았다. 소년은 작품 속에서 상처를 반복함으로서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 한다. 자연은 여성으로 상징된다. 굴껍데기들은 바다와 육지 모두와 관련되어 있고 둘은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여성으로 간주 된다. 김명진의 작품에는 빛 속에 어둠이, 어둠 속에 빛이 내재한다. 둘은 대조라기 보다 분포의 차이다.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이다. 끝없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그의 화법이 지향하는 것은 대지나 바다같은 실재계이다.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인식의 세차원 중의 하나인 실재계(Real)는 언어 바깥에 있지만 무의식에 현존한다. 지배적 상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작가에게 실재에의 감각이나 인식은 중요하다. [라깡 정신분석 사전]에 의하면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인 실재계는 ‘상징화밖에 존재하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영역’이다. [-사전]에 의하면 실재계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고 상징계에 통합할 수 없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또한 상상계와 상징계의 기반을 이루는 물질적 기질을 의미하는 질료이다. 실재계에서 질료라는 개념은 생물학이나 동물적인 신체와 연결된다. [뿔난 소년] 시리즈는 원색의 감성을 맘껏 분출한다. 작품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언젠가는 도래할 마지막 순간(또는 그 이후)까지로 자신을 확장한다. 머리끝에 솟은 뿔과 눈에서 흘러내리는 하얀 액체는 감정이 고조된 상태지만, 몸통을 대신하는 식물 형상은 그 또한 삼키고 가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 소년’의 면모 중 하나는 [아기 염소를 안은 소년]에서 보여진다. 염소는 이국적인 유목민의 가축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소년과 관련된 오래된 기억이 담긴 공책이나 양피지처럼 표면도 훼손되어 거칠거칠하다. 소년에 상응하는 소녀, 또는 여성은 실제의 모델이 있기는 하지만, 익명화되었다. 각자 작업은 치열하게 하지만, 생활을 공유하는 지인이다, 작업이 삶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삶을 더 치열하게 살기 위한 것일 때, 평범한 일상이라고 감춰져야 할 이유는 없다. 



소녀들_장지에 한지, 과슈아크릴릭,먹, 46.6x40cm,2022



작은 충만_장지에한지, 과슈아크릴릭,30x24cm,2022


[매화와 붉은 여인]은 화우(畵友)이자 영혼의 단짝(둘은 서로의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인 여인으로 추정된다. 매화를 배경으로 서있는 여인이라기 보다는, 매화가 여인의 몸에서 뚫고 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입김은 매화가 피는 따스한 계절의 공기와 뒤섞인다. 황홀한 감각은 피부 위만 스쳐갈 수 없다. [감각의 박물관]은 ‘예술의 모든 언어는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 속에서....예술은 자연이 우리에게 얼핏 보여준 것에 대한 조직적인 반응이고...예술의 초월적 얼굴은 항상 기도의 형태를 띈다’(존 버거)는 말을 인용하면서, 예술가들이 대신하여 시간을 멈추어 주기를, 삶과 죽음의 순환을 해체하고 삶의 과정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켜 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누구나 감각의 과부하에 걸리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다이앤 애커먼) 때문이다. 작품 [소녀들]은 우연치 않게도 작가가 몸담는 중요한 관계인 가족, 예술, 종교계에 여성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김명진은 가까이에서 소재를 찾지만 멀리 표현한다. 얼룩과 색점들로 뒤덮인 채 짙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그녀들은 특정인이 아니라 일반적인 여성, 또는 우주적 여성성을 나타낸다. 남성 작가에게 여성은 타자다. 조셉 칠더즈가 편집한 [현대문학 문화비평 용어사전]에 의하면, 라깡이 말하는 타자(other)란 주체가 아닌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주체가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사물에도 해당되는 궁극적인 기표(signifier)이다. 라깡은 삶의 최초의 순간 바로 그때부터 충동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된다고 말한다. [라깡 정신분석 사전]에 의하면 소타자(other)는 실제로 타자가 아니라, 자아의 반영과 투사인 타자로, 유사자인 동시에 거울상이다. 대타자(Other)는 근본적인 타자성, 즉 상상계의 착각적인 타자성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일시를 통해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대타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어머니이다. 대타성(the Other sex)은 남성 주체이든 여성 주체이든 항상 여성이다. 아이는 대개 어머니를 통해서 언어를 배운다. 



뿔난 소년Ⅱ_장지에 한지, 과슈아크릴릭, 30.5x40.3cm,2022



내려오는 별_장지에 한지, 과슈아크릴릭, 24.5x24.5cm,2023


우리는 외국어와 달리 어떻게 모국어를 배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라깡이 주목한 바처럼 언어는 무의식이다. 역으로 무의식은 언어적이다. [라깡 정신분석 사전]에 의하면 라깡은 무의식을 단순히 본능의 자리로 환원시키는 생물학적 사고에 반대했다. ‘무의식은 원초적인 것도, 본능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원래 언어적이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 무의식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초개인적이다’(라깡) 이 맥락에서 보자면 김명진의 조형적 언어와 앞뒷면 관계로 나타나는 주체와 타자의 얼굴들은 무의식적이며 초개인적이다. 어린 신부부터 강한 여성까지 여러 단계로 유형화된다. 길 없는 길을 성큼성큼 나아가는 듯한 [멀리보는 사람]은 여성으로 보인다. 보편화되는 단계에서 여성은 성모상같은 존재로 승화된다. [여인] 시리즈에서는 성화의 도상이 드러난다. 눈을 감고 있어서 내면을 향해 있는 성녀, 눈 하나만 빼고 색조각으로 범벅이지만 수녀 실루엣을 드리운 여성도 등장한다. 


얼굴에 비해 몸은 배경과 더 섞여드는 경향이 있다. 몸은 이성(머리, 눈)에 비해 제어하기 힘든 자연에 속한다. 얼굴이 닮은 자매가 나란히 있는 작품 [자매]는 검은 배경에서 하얀 입자들이 뭉쳐서 얼굴로 드러나는 듯하다. 뭉쳐진 것은 흩트러질 수도 있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형태와 배경은 정도의 문제이지 질적 차이는 없다. 유화가 아닌 꼴라주로 얼굴의 여러 표정을 드러내기는 힘들다. 약간은 가면같은 모습은 인간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면의 무대는 축제나 서커스이며, 김명진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작품 [Untitled]에서 첩첩이 쌓인 공들 위에 올라선 광대가 중심을 잡는 듯한 삶은 어둠 속에서 빛처럼 빛난다. 작지만 영웅적인 인간의 면모를 드러낸다. 작품 [가면놀이]에서는 한국의 전통에도 있는 동물 가면 놀이 춤이 나온다. 외면과 일체화될 수 없는 인간들은 어떤 대안을 가질 수 있을까. 그중 하나가 가면일 것이다. 가면은 고정이 아니라 행위를 함축한다. 일상의 주요 무대는 정원이나 그 연장인 산책이다. 





갤러리 호호 전시전경


작품 [초록 정원] 시리즈는 초록의 풍부함과 진함을 보여주며, 이를 향유하는 인간도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정원-사람을 보라]에서는 정원에서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 형국이다. 작가의 정원은 동물들이 들락거린다. 정원은 야생과 문명의 중간 지대에 있으며,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는다. 이전 전시의 제목인 [눈먼 정원]은 정원에서 겪은 생로병사를 반영한다. 작가는 드로잉 작품에 대해 정원같다고 자평한다. ‘나의 정원에서 목도한 계절의 변화처럼, 눅눅하고, 쓸쓸하고, 거칠고, 느닷없고, 생생하다. 생기있는 기쁨과 생명의 감흥이 일어나는 정원만은 아니다. 의식의 공간 아래에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원의 일원인 것 같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들어온 색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캔버스 작품에서의 황금색 배경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와 자연이 재발견되면서 물러나기까지 황금색은 상징적 우주를 빛냈다. 작품 [마더Ⅱ]에는 성모상같은 실루엣이 확실하다. 미사 시간에 성경을 읽어주는 작업을 10여년 해온 작가는 작품 속 여성들이 성경 속의 인물로 추측된다. 


자개까지 사용된 빛나는 배경은 지상의 모든 고뇌를 싸안고 있는 듯한 몸통을 비춘다. [마더Ⅰ]에서 어머니와 아이는 하나의 덩어리로 엉겨있다. 종교적 원천과도 닿아있는 황금색 배경은 모자라는 보편적인 도상을 비춘다. 황금빛 배경은 길 위에서 동작을 취하는 한 여성이라는 일상적 소재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작품 [길 위에서Ⅰ]에서 놀라운 기색으로 두 손을 모은 여자는 김명진의 다른 작품과 달리 모델과의 관련이 있으며, 상대적으로 단단한 형태감을 유지한다. 황금색 배경은 순간의 장면을 영원화 한다. 경이로움이 없는 삶은 빛바랜 삶이다. 작가가 천주교 신자임이 반영된 종교적 주제는 기도, 별, 수녀 등이 들어간 작품 제목에 구체화 된다. 작품 [내려오는 별]에서 아래로 축 늘어진 두 팔은 십자가에서 내려옴이라는 오래된 주제가 연상된다. [기도하는 여인]의 기도는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다. 얼굴 여럿이 붙은 여성들이 나오는 [수녀들]도 그렇고 종교적 소재라고 고요한 화해는 아니다. 승화의 요구는 승화될 상황을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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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는 비천과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뫼비우스 띠 같은 관계에 있다. 김명진의 작업은 상반되어 보이는 서로를 불러들이는 끝없는 유동의 장이다. 만약 그것이 승화라면, 바닥을 치는 승화이다. 하지만 심연에 잠긴 작품에서 바닥 또한 불확실하다. 경계 위반이 극에 달해 형태가 감지되지 않을 때 추상화에 가까워진다. 작가는 ‘나는 눈(시야)의 완전한 과학을 믿지 않는다. 아니, 바라지 않는 것 같다. 정원, 구름, 하늘, 공간의 온기는 희미하고, 암시만이 있을 뿐 추상적이다’라고 말한다. 김명진이 초창기부터 고수해온 한지 꼴라주의 표층은 더욱 두터워졌기에 이미지와 물성의 긴장감도 높아진다. 붙이는 정도가 아니라 긁어내기도 해서 벗겨진 피부부터 갈아엎은 땅까지 연상시키는 거친 표면이 특징적이다. 작가는 그 과정에 대해 ‘끈끈하고 단단한 살갗을 물을 뿌려 갈아엎고, 송곳으로 후벼판다’고 말한다. 덮고 긁어내고 하는 식의 복잡한 작업은 김명진의 작품이 자아탐구적 성격을 띄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끝없는 탐구에서 나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회화 또한 미지의 대륙이다. 


주체든 대상이든 ‘불가능한’ 실재계와 연동된다. 이전에는 꼴라주를 하고 바니쉬를 바르는 등의 완벽한 후처리를 했다면, 이제는 그대로 둬서 더 야생적으로 보인다. 잘 포장하기보다는 의미가 생성되는 장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어둠이 조율하던 화면에서 어둠이 품고 있던 색들이, 그리고 빛이 드러난다. ‘살갗 아래’가 회화에도 해당되는 점은 작가가 회화의 고유성 탐구에도 분투함을 알려준다. 하지만 회화의 고유성이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와 달리 불가능한 세계일 수도 있다. 작가는 그것을 암시할 따름이다. 그 점에서 그의 작품은 주어진 한계 내에서 완벽한 아름다움보다는 경계가 무너지는 숭고에 기운다.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추상이 코드화되었음을 비판하면서, 추상은 심연과 혼돈, 그리고 손의 역할을 최소화하며 금욕주의와 정신적인 구원을 제안한다고 말한다. 김명진은 직면한 혼돈을 관념적으로 초월하지 않는다. ‘살갗 아래’의 관점은 비상이 아니라 계속되는 하강이자 반등이다. 


출전; 갤러리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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