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미루 / 흙을 매개로 한 묵언수행

이선영

흙을 매개로 한 묵언수행

 

이선영(미술평론가)



말없이 마주한 두 명의 참여자가 한 덩어리의 흙을 주물럭거리며 무안가를 함께 만드는 김미루의 ‘비언어적 소통 프로젝트’는 ‘묵언수행(默言修行)’을 떠올린다. 언어는 인간사회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영역이지만, 그만큼의 억압 또한 존재한다. 말이 말로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모든 소통을 대변하려 할 때 부정적 측면은 커진다. 누구에 의해 어떻게 합의되었는지 알 수 없는 법의 재현에서 지배적 언어는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상징적 폭력에 대항하여 누군가는 대안의 언어를 상상한다. 김미루의 작업은 삶을 위한 말이 아닌, 말을 위한 말이 앞서는 피상적인 소통을 걷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필연적 부분을 이룬다. 최소한의 행동 지침만 있을 뿐인 수행적 작업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진다. 하지만 영상이라는 편리한 도구는 그 과정을 공유할 수 있게 하며, 과정 중의 산물도 전시라는 형태로 소통된다. 




(참고도판) 김미루, 무제 시리즈 [비언어적 의사소통프로젝트], 비디오, 2021년.



무덤이나 종교시설 같은 곳에 잘 보관되어 때로 수 천 년도 가는 도자 특유의 견고성은 없다. 깔끔한 외관과는 무관한 공동 행위의 산물들은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도자기라는 위대한 인류의 발명품이 생겨난 이래, 여러 문명권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던 억겁의 흙자국들을 소환하면서, 현대에 그 기능이 소원해진 도자예술의 본질과 다시 접속한다. 클래이아크 미술관 뿐 아니라, 교환 프로그램 차 한달 간 창동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비언어적 소통 프로젝트는 몇 가지 진행원칙이 있다. 참여자가 말이 없어야 함은 물론, 각자 한 손으로만 흙을 만질 수 있다. 한 쌍의 참여자는 둘 다 오른손, 또는 둘 다 왼손으로 작업해야 하기에 각자 익숙한 조형적 언어의 상당 부분을 묶어둔다. 테이블 위의 한 덩어리의 흙은 마주한 두 참여자의 침묵에 대해 어색한 압박의 순간을 몰입으로 전환시킨다. 기록 영상을 보면, 참여자가 한 손으로 작업을 하다 몰입한 나머지 원칙을 잠시 잊고 안 써야 하는 다른 손이 잠깐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장면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두 손으로 작업하는 것이지만, 작업을 주도하는 뇌는 둘이다. 이 프로젝트는 2명이 가장 많지만, 작품에 따라 4명, 1명도 참여할 수 있다. 흙덩어리를 일정 시간마다 돌리기 때문에, 각자의 영역뿐 아니라 상대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을 이어서 작업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공동작업이 된다. 말과 조형적 언어라는 이미 그 문법이 확실한 수단은 괄호치고 흙이라는 질료를 만지는 원초적 행위만 남겨둔다. 참여자들은 진지하게 작업하지만, 특정 형태를 비롯한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특히 핸드폰과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 현대인에게 짧게는 1시간 길게는 4시간도 가는 이러한 무언의 소통은 그자체가 도전이었을 것이다. 흙 한 덩어리로 길다면 긴 시간을 같이 보낸 진지한 교감의 산물들은 장난스러우면서도 기이하다. 그것들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기 보다는, 아직도 미지의 무엇인가로 변환할 수 있을 것 같은 잠재력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대개 가마에 굽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 전시되며, 작품 뒤에 서치된 모니터를 통해서 그 과정이 재생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비언어적 신호’는 ‘얼굴 표정, 몸짓, 자세와 같은 강력한 도구이며 종종 의식적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수행된다’. 말 없는 신호에서 중요한 것은 손에 의해 수행되는 촉각성과 눈으로 살피는 얼굴 표정이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시금석touchstone’이라는 단어가 표준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예술의 시금석을 그 정밀함이다’(에즈라 파운드)는 말을 인용한다. 김미루의 작품은 도자기에 기대되는 바의 정밀함은 없지만, ‘표준’처럼 중요하다. [감각의 박물관]이 [사이언스]를 인용하는 바에 의하면, ‘촉각은 최초로 점화되는 감각이며 대개 마지막에 소멸한다. 눈이 우리를 배신한 뒤에도 오랫동안, 손은 세계를 전하는 일에 충실하다’고 전한다. 접촉을 통해 많은 정보가 전달되는 이유는 다른 감각은 특정 감각기관에 집중되지만 촉각은 온몸에 다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각의 박물관]에 의하면 태아에게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은 촉각이며, 그것은 인류의 생존에 큰 역할을 했다. 접촉은 나와 타자의 차이, 나의 외부에 누군가, 엄마가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 접촉이 금기시된 팬데믹 시대에 소통의 중요한 창구인 촉각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서 김미루의 방식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참여자가 함께 주물럭거릴 수 있는 부드러운 물질은 촉각적, 시각적 소통의 매개가 되는 것이다. [Touching the Present](2021)에서의 작가노트에서 말하듯이 촉각은 ‘의사소통은 순간순간의 경험과 완전한 현재에 전적으로 집중해야 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소통하기 위해 자아의 모든 감각을 여는’ 행위이다. 한 손만 사용하게 하면서 타자와의 관계에 더 의존하게 한다. 온전한 나의 세계를 펼친 완성작품을 공표하는 식의 예술작품이 아니다. 작업은 각자의 한 손이 하지만, 무언의 소통은 필수적이다. 


서로의 얼굴은 살피는 것은 많은 정보를 주고받게 한다. 니콜 아블릴은 [얼굴의 역사]에서 얼굴은 촉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의 집합체라고 말하면서, 얼굴은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볼 수 없는, 가령 맹인의 얼굴은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의 얼굴에는 상호성이라는 개념이 내재한다. 김미루의 작품 참여자들은 ‘내가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고 타인이 나에게서 보는 것’이라는 얼굴의 원뜻에 충실하다. 존 리겟은 [얼굴 문화, 그 예술적 위장]에서 기본적인 감정표현 방법과 이를 인지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표현된 감정을 읽을 수 있는지 새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김미루의 소리 없는 대화는 서로 낯설 수 있는 말이 아니라 타고나는 기본적인 감정표현이라는 보편성에 의지한다. 


존 리겟은 감정표현과 그 인지도에서는 국경이나 인종의 경계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타인의 기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김미루의 작업은 인간의 사회화와 무의식적인 반응을 교차시킨다. 비언어적 소통 프로젝트에는 동료 작가를 비롯한 미술관계자, 국내외의 여러 계층, 직업, 성, 나이대 등이 두루 참여했다. 작업 지침으로 작동하는 개념적 제안은 참여자의 경계를 최대한 무너뜨린다. 이 작업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유학 시절의 소통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첫 수업 시간에 본인 혼자만 동양인이었던 탓에 겪었던 소외감은 교수가 수업을 위해 흙 한덩어리를 나눠주는 순간 사라졌던 경험이 있다. 흙은 홀로 이방인이라고 생각되던 이에게 몰입과 편안함을 주었다. 머나먼 낯선 땅에 공부하러 간 이유는 바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작업 진입을 위한 장벽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장벽들은 역설적으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나 소통의 문제를 절감하게 하면서 예술의 본래적 영역에 한층 다가서게 한다. 특별히 목표를 하는 형태가 아니라 자유롭게 뭉치고 누르며 말고 더했다가 뺐다가 하는 흙 놀이같은 작업은 그러한 장벽들을 허무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후 작가는 다양한 종류의 흙을 섞어서 사용하고 소성 과정을 거치지도 않는 등, 도자예술의 기본 전제나 문법 자체를 실험한다. 이러한 실험들은 수행의 과정이기 때문에 작가의 정체성 역시 과정에 놓이게 된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갈지를 확실하게 아는 확고한 주체가 아니라, ‘과정 중의 주체’(줄리아 크리스테바)이다. 가령 2019년부터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Internal Anxiety]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이 작업에 대해 ‘마음의 복잡성을 표현하기 위해 원시 점토와 초벌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상의 점토를 사용한다. 실과 밧줄로 작품을 걸고 매달린 관계의 불안함을 전달하여 감정적인 상태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 불안정성을 통해 ‘두려움과 불안’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관계는 긍정적이다. 도자가 공예를 벗어나기 위해 설치같은 현대미술의 어법을 들여오고 있다. 대개 일률적인 작은 단위를 만들어서 조합하고 확장하는 식이다. 작가의 의도를 재현하기 위한 기하학적 감각과 매뉴얼화 된 공정 과정이 필수적이다. 반면 김미루의 작품의 구성요소나 결합원칙은 불확실하다. 보다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열려있다. 그녀의 작품은 내면만큼이나 타자와의 관계도 복잡함을 알려준다.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흙덩어리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찌그러뜨리는 퍼포먼스인 [Dropping]이나 스튜디오 벽면에 비닐을 설치한 후 흙물을 마구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비워내려는 작업은 기존의 자아를 탈피해서 다시 탄생하려는 제의적 행위를 떠올린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이 이치이고, 변화는 이질성과 우연이 개입되어야 가능하다. 자아를 주제로 한 작품은 유동적 흐름이 특징이다. 


이전 작품 [Floating Ego]은 슬립 캐스팅 기법으로 만든 동글한 형태들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흙물의 두께에 따라 만들어진 형태의 움직임이 달라지며 가라앉거나 뜨는 차이를 보여준다. 이전의 심리학은 인간이 무의식-자아-초자아라는 3층으로 구축된 견고한 빙하같은 이미지로 제시했지만, 그 전체는 물에 떠 있는 빙하 같은 것임을 간과했다. 더구나 빙하는 그자체가 녹고 있지 않은가. 견고하다고 가정되는 도자예술로도 떠도는 자아에 대한 표현이 가능했다. [In Practice] 시리즈는 모든 것이 멈춰 선 코로나 시기에 흙을 가지고 자연을 캔버스 삼아 ‘드로잉’한 작업이다. 사전 조사와 장소에 대한 정보 없이 발길 닿는 장소가 선택됐다. 작가에 의하면 ‘그곳은 한국의 고향 근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있는 언덕일 수도 있고, 미국 애리조나의 햇볕에 바뀐 바위가 있는 건조한 사막일 수도’ 있다. 길게 써 내려간 또는 그린 자연 위의 드로잉 작업은 ‘잠재의식 표현을 활성화’한다. 의도보다는 그때그때 조우하는 것과의 순발력 있는 상호작용은 자연에서 보낸 몸의 시간성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점토로 작업할 때 재료의 연장선이 깊이 연결되어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작가의 말은 구불구불한 선들이 마치 탯줄처럼 다가오게 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선포한 이래 소원해졌던 자연과의 연결을 되살리는 것이다. 탯줄과의 연결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던 모태 안의 태아같이 ‘억압된 감정을 풀어주고 내면세계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편안함을’ 준다. 작가의 주변에서 굽이치는 물과 나무뿌리 사이에 자리한 후, 점토를 매개로 자연의 표면을 더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촉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서 인용한 다이앤 애커먼은 ‘촉각은 우리에게 생명이 깊이와 모양을 갖추고 있음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생명에 대한 이런 복잡한 감각이 없다면 감각과 감정의 지도를 만드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In Practice]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저고리를 본 딴 하얀 한복을 입은 작가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가 드러난 부분 아래에 자리 잡는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작가는 하얀 흙을 가래떡처럼 돌돌 말아서 주변에 붙여가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생태적 환경에 맞춰 자라난 나무 뿌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주변은 하얀 선들로 덮이기 시작한다. 예술은 자연의 과정을 압축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행해지는 작업, 가령 대지 미술같은 것이 종종 토목공사같은 스케일로 주체의 의도를 자연에 관철시키려는 기획이라면, 김미루는 자신의 몸이 자리 잡은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In Practice]는 울퉁불퉁한 고목의 뿌리같은 자연의 굴곡에 맞춰 이루어진 하루 안에 실행한 작업이다. 명상하는 자세로 시작된 작업은 생각보다는 손을 따라가며 물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작가의 호흡을 한데 엮여 자연의 표면 위에 짜나가는 과정이다. 계곡의 물줄기, 나무뿌리의 형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에너지의 분배가 흙덩어리라는 질료에 반영된다. 평소에 전화 등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는 버릇이 있던 작가는 그것을 메모지가 아닌 자연 속에서 행한다. 


이전 작품 [Clay doodle] 시리즈는 ‘통제되지 않은 무의식 상태에서 최소한의 통제로 나온 드로잉’을 삼차원의 공간에서 입체로 구현하려는 작업이다. ‘자유로운 놀이의 형태로 제작’된 것들은 ‘비우고 계획하지 않고, 현재에서 즉흥적으로 창작’한다는 김미루의 작업 기조의 연장선 상에 있다. 지표면의 굴곡을 따라가는 과정은 우연에 개방된 열린 작품을 낳는다. 사전 조사나 치밀한 도구들, 장황한 아카이브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을 굽거나 캐스팅하거나 자수나 브론즈 등으로 옮겨보는 것, 특히 전시를 위해서 확대해야 하는 도구적 합리성이 요구되는 또 다른 작업이다. 과정 중의 주체를 중시하면서 만들어지는 열린 작품들은 재현도 표현도 아닌 몰입의 과정 그자체 또는 그 흔적이다. 도자예술이 한쪽에 걸쳐 있는 기능과 디자인적 요소를 벗어나는 방식들은 다름과 이질성을 최대한 끌어안으려는 작가의 태도다. 흙이 가지는 본래의 유연성과 잠재력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대면하는 사람이나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자신을 던져 넣는 작업은 자아의 한계도 극복하게 한다. 


출전; 클레이아크 미술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