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신수혁 / 푸른 하늘의 단면을 담은 자연스러운 구조

이선영

푸른 하늘의 단면을 담은 자연스러운 구조

 

이선영(미술평론가)

 


신수혁의 [critical point] 전의 주요 색감은 블루이다. 그 깊고도 다채로운 색감이 기계적 인쇄물인 모눈종이의 선들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다소간 의외이다. 결코 하나의 색으로 규정될 수 없는 블루는 형이상학이나 신비주의의 원천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원천은 스템프 도장의 블루이다. 여권 등에 찍히는 스템프는 여행자가 경계를 넘는 중요한 행위의 합법성을 보장해 주지만, 조형적인 면에서 볼 때 거의 아무렇게나 생겨난 것은 모눈종이와 마찬가지다. 스탬프 색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탬프 지도 작업이 내 그림의 뿌리이기에, 스탬프 잉크빛을 띤 블루컬러를 주로 사용한다. 물론 파랑이라 해서 다 같은 파랑은 아니다. [블루 노트] 전에서는 인디고블루를, [멜티드블루] 전에서는 에메랄드그린을 썼다. 요즘은 울트라블루를 쓴다. 빛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는 것도 그렇다...’ (2020년 [모닝캄]과의 인터뷰에서)




Critical Point No,2340   162x131cm  Oil on Canvas 2023



다양한 계열을 가진 블루는 ‘임계점’이라는 물리학적 전시 부제에 포함된 작품 키워드와 함께  모눈만큼이나 작은 차이로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다. 임계점은 같은 분자로 구성된 물질의 배치를 다르게 함으로서 질적 전화를 가능하게 한다. 근대 이후 지구생태계에 여러 악영향을 끼쳐온 인간의 생산/소비활동은 시한폭탄같은 임계점들을 편재하게 했다. 멀찍이서 그의 작품을 보면, 수직 수평 방향으로 촘촘이 그은 붓터치가 희미해져서 하늘색을 떠올린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가 나란히 걸릴 경우, 한 공간은 시간에 따라 다른 양태로 변모하는 듯하다. 인상파는 그러한 현상을 실시간으로 화폭에 기록한 바 있다. 신수혁의 작품에서 연상되는 하늘의 색/빛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유사 이래 화가들은 이 살아있는 자연의 캔버스에 주목해왔다. 신수혁의 블루는 엄청나게 다양한 뉘앙스의 ‘하늘색’이다. 빛의 산란에 의해 푸르게 보이는 하늘색 또한 심리적이거나 미학적이기보다는 물리적인 현상이다. 


‘임계점’이라는 민감한 차이는 모눈 같은 정량적 기준과도 다른 그만의 필획에 있다. 그는 ‘공기라는 매질에 빛의 부딪침의 과정이 산란 되는 상태가 압축될 때 시각으로 푸른 빛으로 감지된다’고 하면서, ‘새벽 아침의 맑은 공기층,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대자연의 시작에서 오는 조용함과 작은 울림, 미세한 시작들, 그리고 숨 쉼...반복되는 매일의 시작 그리고 새로움’을 말한다. 2015-16년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 작품의 형식은 그의 표현법대로 ‘선을 치는’ 단계이지 ‘선을 긋거나’ ‘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치는 선은 시작이 있지만, 기하학에서 정의하는 대로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푸른 선들이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청사진처럼 기원과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의 첨삭이 필요 없는 어느 균형의 순간은 작가만이 감지하고 결정한다. 점과 점을 잇는 선은 설계 도면처럼 최초의 계획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기능을 가진다.


하지만 신수혁의 가로선, 세로선의 붓질은 자신이 정한 규칙대로 자유롭게 화면을 활주한다는 것 외에 어떤 기능도 없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한 흐름인 기하학적 경향은 건축과 수렴하는 지점이 있었고 그 예가 구성주의이다. 1920년대 전후에 바우하우스나 러시아 구성주의에서의 실험인 ‘회화적 건축학’(류보프 포포바)이다. 이러한 ‘회화적 건축학’에서는 ‘추상적 형태와 패턴들로 구성’된 화면이 만들어졌지만, 신수혁의 작품에서는 추상적 형태에 환원주의적 분석’(포포바)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디자인과 비슷해 보이는 규칙의 체택은 오히려 예술의 특징을 부각시킨다. 그 규칙은 공감이나 교감 같은 심미적 소통을 겨냥한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가로로 또는 세로로 활주하는가는 형상들은 점과 선의 중간 같이 보인다. 이번 전시작품은 수직/수평을 기준으로 선을 친다는 규칙만 남아 매일 빈 화폭과 마주한 작가의 반복과 차이의 유희가 행해진 결과이다. 


신수혁은 ‘수평의 시간 축에 수직의 시간 축이 겹침과 중첩의 연속으로 나타나는 진행형의 상태에서 만나는 순간의 단면을 마주한다’고 말한다. 회화는 재현주의에 충실했을 때도 순간의 단면이다. 공간의 예술인 회화는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연극적 동작의 전후를 상황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대상의 재현을 부정하는 현대미술에서 순간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지속의 일부분이다. 지속에 방점을 주는 미학은 회화를 초월하여 전신의 감각을 고무하는 연극성으로 확장 또는 해체되었다. 연작처럼 수행되는 신수혁의 작품은 한 작품 안에, 그리고 작품들 사이의 관계 속에 지속을 내포한다. 작업은 한없는 몰입 속에서의 각성이며 관객에게도 그러한 경험을 유도한다. 재현의 기술이 사진을 비롯한 다른 기계적 매체로 이월되는 가운데 몰입은 예술을 특징짓는 체험이 되었다. 몰입은 작업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예술적 몰입은 심신을 상하게 하는 중독이 아니라는 점에서 종교적 체험에 가까워질 수 있다.




Critical Point No,2403    162x131cm  Oil on Canvas 2024



작가는 ‘캔버스 위 가로선과 세로선의 느낌을 스트로크에 의한 터치로서 구축하고 있다. 내가 마주하는 매 순간은 연속과 진행의 수많은 반복 과정의 단면들이다. 그 스트로크에 의한 물감층들은 평면이라는 구조를 드러내면서도 심연의 상태로 깊이를 느낀다...호흡에 의한 끊김과 이어짐, 중첩 등으로 축적됨을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의 집적과 시간성은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무엇인가 농축되는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임계점’이라는 전시부제는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질적 전환을 야기하는 차이를 암시한다.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와 색을 선택하는 신수혁의 작품은 미시적 차원에서 상태가 변이하는 순간을 비유하기에 적절하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르네 통이 정립했던 지질학의 격변설(catastrophe theory)을 이용해서 사회에서 나타나는 작은 효과가 어떻게 갑작스러운 변화로 이어지는가를 설명한 바 있다. 


신수혁의 ‘임계점’과 관련해 필립 볼의 저서에서 참고할 대목은 상태의 변환인 상전이(phase transition)이다. 그의 작품에서 임계점은 ‘조직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해당하는 상전이로 진화하는’ 지점과 관련된다. 갑작스러운 상전이가 나타나는 전환점이 임계(critical) 온도, 즉 임계점이다. 필립 볼에 의하면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 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상전이는 수많은 구성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다. 상전이는 입자에 작용하는 어떤 전반적인 영향이 어떤 문턱값(threshhold)을 넘어설 때 일어난다. 갑자기 모든 입자들이 서로 연결된 정교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른 모든 입자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작가는 반복 속에서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 순간을 맞는다. 차이를 가늠하기 위해 작가는 초창기에 모눈 종이같은 기하학적 틀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모눈은 내재율이 되었다. 신수혁은 세기의 전환기인 2000년대 초반 일본으로 유학 갈 때부터 건축에 관심을 가져온 터여서 푸른 눈금의 종이는 화가에게 하얀 캔버스만큼이나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종결지을 수 있는, 그 사이의 과정이 기록될 수 있는 유효한 장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2017년 개인전에서는 건축물을 그렸다. 그때도 건축적 대상의 재현보다는 ‘선과 면이 이루는 조형적 구성에 집중’(주은정, [신수혁의 건축물 파사드] 중)했다. 작가에 의하면, 이번 전시 작품과도 연관성을 가지는 ‘일우스페이스(2019년)에서의 발표작 시리즈는 빛의 추상적이고 함축된 기하학적 구조를 가시화시키려고 한 연작이었다. 이후 구조성을 가진 요소와 선으로 보이는 표현을 더욱 함축적으로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한편 건축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으며, 스카이라인은 그 건축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창과 비교되기도 했던 그림의 형식은 매일매일 달라지는 하늘을 담은 사각형들과 겹쳐질 수 있다. 


화이트 큐브에 일정 간격으로 걸린 작품들은 한 공간에서 다른 시간대를 지각하게 하는 듯하다. 호흡을 담은 그의 그림은 광학현상에서 공기의 느낌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색은 ‘푸른 창공의 단면’으로, ‘화이트는 밝음, 블루는 어두움, 그리고 그 어두움에서 밝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공기를 머금은 빛의 상태’(신수혁)에 있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따뜻한 색일수록 가깝게 느껴지고 차가운 색일수록 멀게 느껴지는 것이 원칙임을 상기시킨 후 어떤 색이건 멀어지면 흐려지면서 파란빛을 띤다고 말한다. 공기층이 색을 덮기 때문이다. 유리병에 든 공기나 물은 아무 색도 없지만 깊은 바다는 파랗게 보인다. 공간이 깊어지면서 모든 색이 파랑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파랑은 무한히 투명해질 때 생겨난다. 화가들은 이 효과를 공기 원근법으로 표현하곤 했다. 건축에 관심이 있는 신수혁의 작품에는 구조적인 면이 있지만 빛과 공기를 머금은 블루는 차가운 색이면서 따스한 느낌이다.

 



Critical Point No,2405   162x131cm  Oil on Canvas 2024



에바 헬러는 얼음도 눈도 푸른 빛을 낸다고 보면서 파랑은 흰색보다 더 차갑다고 말한다. 흰색은 빛을 의미하지만, 파랑은 그늘을 뜻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중후반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을 현실의 색으로 재현하는 것을 그만두고 빛의 색으로 해체했다. 그때부터 회화에서 갈색 그림자가 파랑으로 대체되었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여덟 가지 색으로 풀어본 색의 수수께끼] 중 ‘파랑’ 항목에서, 본래 무색이며 공간, 즉 창공의 깊이에 의해 색을 빌려 받는 공기의 파랑을 언급한다. ‘우주적 암흑의 그림자들이 같은 공기를 뚫고 진입함으로서 필연적으로 공기의 흰색이 파랗게 보일 수밖에 없다...공기의 파랑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색이다’(레오나르도 다빈치) 신수혁은 빛과 공기에 대한 신선한 지각(모네, 터너)을 고전적 공간구조(세잔)에 담으려는 후기 인상주의에 공감한다. 버나드 덴버는 [가까이에서 본 인상주의 미술가]에서 소설가 뒤랑티의 말을 인용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의 직관을 통해 이들은 태양광을 일곱 빛깔 기본소로 해체하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통일체로 화폭에 재구성해 펼쳐 놓음’으로서 ‘빛과 색채의 진동을 느낀다’ 소설가 말라르메도 ‘가벼운 터치로 화폭에 담긴 순색’에 의해 ‘산재하는 빛이 만물과 뒤섞이며 생동감을 발한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지된 이미지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21세기의 화가인 신수혁에게는 19세기의 선구자들처럼 자연 광속에서의 사생 그자체가 보다는 경험과 기억을 회화의 내재율로 번역하는 일이 중요하다. 자연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이끌었던 인상주의의 신선함을 보다 견고하게 하려 한 후기 인상주의 화파의 방향성에는 공감한다. 회화의 평면성과 관련되어 세잔의 선택을 참고할 수 있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 아트]에서 세잔은 소실점을 전제하는 선원근법 체계 대신에 공간이 평행하게 몇 겹의 층으로 풍경을 그렸다고 말한다. ‘나는 오로지 색을 가지고 원근법을 표현하려 했다’(세잔) 


이후의 추상적 흐름은 풍경화처럼 빛이 가득하면서도 평면적인 화면을 가능하게 했다. 근대 화가들에게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평평한 표면이 되었다. 앨런 보네스는 빛을 머금은 색을 평면적으로 명암없이 칠해 표면과 공간의 조화를 이룩한 화가로 마티스를 꼽는다. ‘인상주의 미술 속에서 뭔가 영원한 것을 찾으려고’ 한 세잔의 실현이다. 마이클 리비가 [조토에서 세잔까지]에서 말하듯이, ‘닮음을 잡아내기 보다는 각 형태와 패턴 간의 관계를 영속화시키기 위해 모델을 끊임없이 정밀 조사’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앨런 보네스는 세잔의 풍경화가 ‘모델링, 드로잉, 색조, 색채, 그리고 구도를 구분해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며, 그림은 색깔있는 붓자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장 중요한 공통 기준’이 되었다고 말한다. 앨런 보네스는 ‘세잔과 모네는 베르그송이 주장했던 바대로 우리는 시간 내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만 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과 관찰자의 변화하는 의식을 고려한다’고 말한다. 


신수혁의 작품에서 보이는 추상미술과 빛의 관계에 있어서는 앨런 보네스가 들로네의 작품에서 보았던 ‘모든 생명과 에너지의 근원이며 또한 모든 색의 근원이기도 한 빛’을 참고할 수 있다. 당시의 미술보다는 과학적 발견을 따라 자연의 신선함을 포획하려한 방식은 전통적 상징주의 또한 벗어나게 한다. 가령 우리는 신수혁의 수직/수평선에서 몬드리안의 추상과의 관계를 비교할 수 있다. 앨런 보네스는 몬드리안의 수직/수평선이 신지학같은 신플라톤주의 체계와 관련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으로 기하학적 감축을 할 때 기본이 되는 대립(능동과 수동, 남성과 여성, 공간과 시간, 어둠과 빛 등)의 패턴에 의해 결정되는’ 엄격한 상징주의를 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추상미술이 관념적 이상주의에서 나올 것은 많지 않다. 신수혁의 작품에서 화면을 채우는 수직/수평의 선들은 자대고 그은 듯한 선이 아니라 작가의 한 호흡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담는다. 




Critical Point No,2406   162x131cm  Oil on Canvas 2024



서로 방향이 다른 선들은 음과 양, 들숨과 날숨처럼 상보적으로 결합된다. 이전의 엄격한 선들에 비한다면, 엔트로피가 증가한 셈이다. 그것은 일관성 있는 규칙이 적용된 밀도 있는 대상으로,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물질로 덮인 평면이다. 자연 속에서 파랑은 붉은 계열에 비해 비활성으로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단파장으로 더 강한 에너지를 내장한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심리학적으로 파랑을 평안 그리고 냉담과 연결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물리적 실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에너지를 함유한 색이라고 말한다. 압축된 물질을 풀어 의미라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 방직 기계가 아닌 베틀로 짜나가듯 올과 그 사이의 여백이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화면을 이룬다. 작은 붓으로 물감을 찍어 그은 행위가 지나간 흔적들 사이의 여백은 숨구멍처럼 당시의 호흡을 기록한다. 특별한 날 입었던 의상이나 사소한 부분이 기억에 남듯이, 작가는 비슷비슷한 작품 속에서 그때그때 달랐던 삶의 뉘앙스를 되살릴 수 있을 만큼 작업과 작품의 일치도를 높였다. 


어떤 의미를 낳을 형태와 색의 창조가 아니라, 그저 작가의 반복된 행위가 차이를 낳는 수행성에 더 가깝다. 수직 수평의 건조한 선은 사각형 캔버스 틀을 반향하는 조형적 요소다. 화면의 밀도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신수혁은 그 과정에 대해 ‘내 작업은 흰 캔버스 위에 처음 찍은 점으로부터 마지막 최종점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수직/수평은 사각형 캔버스라는 조건과 밀접하다. 모더니즘의 강령에 마련한 그린버그가 제안했듯이 회화가 캔버스라는 조건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모든 주제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그린버그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예술은 보편적으로 이념이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경험의 요소들을 훨씬 더 직접적인 감각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특정 예술의 매체의 한계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회화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그것은 어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그 매체의 불투명성(opacity)이 강조되어야’(그린버그) 한다. 그린버그는 ‘화면은 깊이의 효과를 내는 가상의(fictive) 면들이 실제 캔버스의 표면인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평면 위에서 하나로 만날 때까지 그것들을 평평하게 만드는 가운데 점점 얇아짐’을 강조하면서, ‘보다 진전된 단계에서 사실적인 공간은 조각으로 부서져 표면과 평행하게 전면으로 나오는 평평한 면들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실적인 회화공간의 파괴와 대상의 파괴가 함께 완성’된 큐비즘의 예를 든다. 그리하여 ‘사실주의적(realistic) 환영이 아니라 시각적인(optical) 환영’이 생겨나는 것이다. 신수혁의 작품에서 행위가 실린 꾸득꾸득한 유화물감의 물성은 하늘의 재현이 아니라, 하늘과 유사한 실재를 만든다. 2022년에는 [무비 無比, Square in “Site-specific”] 전에 초대되어 아그네스 마틴. 도널드 져드 등과 함께 ‘인간이 개척한 가장 완벽한 비례인 square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것은 평면이라는 회화의 조건에 대한 의식과 기하학적 상징에 대한 의미를 반추한다. 유화이기에 수직/수평을 치는 사이에 말리는 시간이 필요하며 터치와 터치가 겹쳐지며, 상호작용하는 화면에는 긴장감이 있다.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화면은 숨구멍같은 느낌이다. 최대 10층까지도 쌓이는 화면을 채우는 것은 작은 붓이다. 2017-2019년 경에는 1-2호 작은 붓으로도 칠했지만, 지금은 4~8호로 붓질 궤적을 살린다. 신수혁의 ‘창’은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으로 그 뒤의 무엇인가를 투명하게 보여주지 않는 불투명한 ‘창’이다. 붓자국이 남는 화면은 숨 쉬고 행위하는 몸이 통과한 시간의 흔적이다. 작은 붓으로 선을 중시하던 경향에서 신체적 감각이 더 실리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었다. 자도 사용하기도 했던 2015년대 작업과 비교하면 약간씩 비뚤다. 구조적인 선에서 자연스러운 선으로 가는 여정이다. 반복적인 붓터치의 리듬에서 작가는 자연의 구조를 감지한다. 




Critical Point No,2407   116.8x91cm  Oil on Canvas 2024



작가는 ‘어느 날 자연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패턴을 이루고 내 앞에 출현’했다고 말한다.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자연적 과정과의 조응이다. 회화는 물론 그가 관심이 있던 건축도 수직/수평의 좌표축이 보이는/보이지 않는 기준이 되지만, 이 기준은 완전히 고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가 일본에서 경험한 지진은 ‘대지 위에 세워지는 목적성을 가지는 구조물’인 건축의 유동성의 예다. 기술뿐 아니라 과학도 불확정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과학도 가설과 모델이 있다는 점에서 미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술은 특히 근대 이후에 개념화되면서 그러한 경향이 강해졌다. 미술만의 자율성을 향한 변화가 오히려 접점을 향하게 했다. 신수혁의 작품은 철학-종교-과학의 연결점을 지향한다. ‘근래의 작품에 보이는 형상은 무수히 쌓인 선을 조금씩 허물고 다시 채워 가는 끝없는 반복의 과정’(2020년 [모닝캄]과의 인터뷰에서)은 종교적 수행성을 떠올린다. 물론 지금은 총체적 비전의 시대는 아니기에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으로 인식의 공통 면을 탐색한다. 


출전; 데이트 갤러리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