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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실린 생

이선영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실린 생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은주는 동양화의 여백같은 분위기의 바탕에 작은 배를 한 척이나 두 척 띄워놓는다. 배는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세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표본이 되는 다양한 종(種)들을 실은 노아의 방주부터, 정상으로 간주되는 이들과 구별되는 이들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광인의 배같은 신화적 차원, 그리고 죽음을 피하거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무조건 배에 몸을 싣는 난민의 배까지 다양한 상황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상어에 ‘한 배를 탔다’는 표현은 처해진 운명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 전체가 점점 가까이 얽히고 조이는 세계화 시대에는 지구 전체가 하나의 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실려있지 않는 김은주의 배는 신화적이거나 사회적이기 보다는 실존적이다. 그것은 자아다. 배로 비유된 자아는 확실한 중심이나 정박지가 없다. 정처 없이 표류하는 모양새다. 그것은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작가의 자의식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색이 칠해져 있으니 여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백처럼 거의 아무것도 없이 모노 톤으로 처리되어 있다. 작품에 따라 배 지나간 자리처럼 곧 없어질 듯한 흔적이나 잔상이 있는 경우도 있다. 모든 풍경이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풍경이라면, 그것은 어떤 사건의 지각이나 기억에 의해 가슴 속에 일렁이는 파문일 수 있다. 작가는 [세월-흐름]이라는 제목으로 흐르는 물로 시간을 비유한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흐르는 시간은 물만큼이나 되돌릴 수 없다. 물론 물은 순환 하지만, 자연의 시간은 인생에 비해 그 주기가 너무 길기에 그저 모든 게 끝은 아니라는 위안을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김은주의 작품에서 시간에 실려 가는 것은 배/자아이다. 작가는 ‘썰물에 밀려갔다 밀려오는 그 오래된 시간을 화폭에 잠시 정지시키듯, 흐르듯, 서 있는 듯한 형상을 표현해 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대상이 나타나긴 하지만 자세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좌표가 부재한 작품들은 풍경이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특정되지 않는다. 


색으로만 채워진 배경은 재현주의를 약화시킨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배,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은 채 떠도는 배는 많이 생략된 색과 형태라는 금욕적인 형식과 조응한다. 배가 시간의 흐름을 타는 생명으로 비유된다면 그것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진리 또한 내포한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가는 배는 희망적이다. 배는 붙박혀 있는 삶을 뒤로 하고 가는 것이다. 모든 출항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이 내재한다. 빈 배 또한 무언가를 실어 올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이동은 물리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배가 생명과 비유되는 이유는 배라는 대상의 필요충분조건인 자족성(가령 배는 새면 가라앉는다) 때문이다. 배는 비행기나 집처럼 구성 요소들이 퍼즐처럼 딱 맞춰져 주어진 기능을 발휘하는 대표적인 대상이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의 물건들을 신화적으로 분석하면서, ‘배는 운송의 방편이기 이전에 주거 형태의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배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은주의 도상은 배-집-자아-...등등으로 확장되는 연상의 사슬이 내재한다. 유기체 또한 한군데라도 헐거워지면 질병이나 이상의 증후를 나타낸다. 예술의 역사에서 기능주의 미학이 주장될 때 늘 상 비교 기준이 유기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배라는 소재는 바탕을 단번에 물로 간주하게 한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작품은 더욱 그렇다. 배는 원근법이 관철되어 있으나 바탕은 평면적이다. 그림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평면성과 대상이 공존한다. 그 어울림은 추상과 구상의 미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한다. 특히 푸른 바탕의 작품은 배와 어울린다. 하지만 김은주의 작품에서 배들은 푸른색에 완전히 묻혀있다. 삶이 배경과 구별되는 대상의 활동성을 암시한다면, 그 반대는 죽음이다. 마치 침몰 된 배같은 모습은 흐르는 물에 내재된 수평적 움직임과 반대되는 수직적 양상이다. 가라앉은 배는 침묵 속에 잠겨있다. 


비현실적인 풍경같지만, 하늘의 색을 비추는 물이라는 반영적 상황일 수도 있다. 푸른색이 내포하는 멜랑콜리한 감성에 푹 잠겨있는 배(=사람)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비롯한 많은 저자들이 멜랑콜리와 예술적 창조성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심연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는 과정은 주어진 한계를 상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무의식은 심연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한 경계에서 강렬한 경험이 발생한다. 종교적 체험이나 예술적 체험도 그렇다. 인간이 생각하는 형태나 색은 이미 자연에 있는 것일 수 있고, 작가란 그것을 (재)발견한다. 밝은 바탕이 있는 작품은 눈보라 치는 거친 날씨의 배로 상상한다면, 배는 하얀 얼음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셈이다. 배 여러 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원근감이 암시된다. 단촐하게 표현된 크기가 다른 두 척의 배는 근경과 원경을 구별짓는다. 


시각적 관례에 따르면 작은 배는 더 멀리에 있다. 동양화같은 분위기가 있는 김은주의 작품에서 여러 대의 배는 한 대상의 시간적 양상일 수도 있다.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서 시간의 흐름은 공간적 차이로 나타난다. 배경에 질감을 강하게 남긴 작품군은 조형 언어의 불투명성이 강조된다. 이때의 배경은 배가 활주할 수 있는 투명한 공간이 아니다. 빈 배가 떠 있는 배경이 마치 도자 표면처럼 두터운 질감으로 처리된 작품도 있다.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작업한 듯, 행위의 궤적이 드러나 있는 작품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선적 흐름은 밝은 색감에도 불구하고 묵직하다. 한 척의 배이자 누군가의 은유가 되는 대상은 그러한 흐름에 갇혀 있다. 최근 작품 [세월-흐름 03]에서 하얀 배의 배경인 푸른색의 처리는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배경에 비해 대상은 좀 더 은유적으로 읽힌다. 근경과 원경에 배 한척 씩 배열한 작품은 서로 가까워지려는 것일까 멀어지려는 것일까. 


대상과 무관한 자유로운 색감은 특정한 상황 논리에 감정을 부여한다. 김은주의 작품은 생략된 것이 많아서 문학으로 친다면 산문이 아니라 시에 가깝다. 함축적인 대신에 명료한 소통은 포기한다. 시원시원하게 죽죽 그려서 채운 푸른 바탕이 있는 작품 [세월-흐름 09]에서 근경의 큰 배는 원경의 배를 향하여 나아가는 듯하다. 홀로 있음, 상대를 향해 나아감,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 등 다양한 관계를 표현하는데 있어 배와 유기체의 비유는 적절하다. 배의 표현 방식은 다양하다. 구체적 형태와 양감을 표현해서 실재감이 강한 배는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배는 심연 또는 깊은 우주의 색으로 포화 된 공간에 홀로 떠 있다. 한편 [세월-흐름 03]의 배는 중성적인 배경 속에서 가볍게 표현된다. 작품 [세월-흐름 11]은 여백에 먹선으로 그은 듯 한 형태만 남긴다. 동양적 미학에 가깝지만 작가는 물감의 질감과 붓텃치를 화면에 남겨 두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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