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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 행운을 담는 용기(容器)

이선영

행운을 담는 용기(容器)

 

이선영(미술평론가)

 


[Happiness](일련번호)로 일괄적으로 제목을 붙인 김혜수의 최근 작품들은 꽃, 또는 잎, 도자기 같은 친숙한 소재를 화사한 색감에 담는다. 매일 뉴스에 나오는 자연적 사회적 재앙들은 일상의 편안함과 관련된 행복의 가치를 소중하게 한다. 행운의 상징 네 잎 클로버는 부드러운 색감과 결합하여 행복을 전달한다. 회화는 행운이나 행복 같은 보편적 가치를 담는 그릇이다. 작가는 ‘예술가는 세상의 모든 감성을 담는 용기(容器)다’라는 피카소의 말을 마음에 새겨 그림 또한 무엇인가 담는 그릇과 비유한다. 예술은 눈과 마음에 담아둔 것을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손쉽게 무엇인가 복사할 수 있는 시대에, 시각에서 시각으로의 평행이동은 감흥이 없다. 내 안으로 들어온 무엇인가는 반복 속의 차이를 실행한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그린 김혜수의 그림은 여러 겹 칠해져 마치 사각형 도자기같은 두툼한 질감이 느껴진다. 작가는 그 ‘접시’ 안에 무엇인가 담아낸다. 이러한 연상은 작품 속에 도자기가 들어있어서 더욱 그러한 듯하다. 




Happiness Acrylic On Canvas 2202 130.3X97



하지만 김혜수의 작품 속 도자기는 완전하지 않다. 다 칠해져 있지 않으며 외곽선만으로 간단히 표시하기도 한다. 달항아리 특유의 미세한 비대칭도 강조된다. 도자기도 결국 무엇인가를 담은 그릇이라면 그것은 대상을 완전히 담지 못한다. 그 작품이 재현적 대상은 있지만, 재현주의가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손쉽게 찍은 사진들이 거의 컬러 사진 급으로 빠르게 출력될 수 있는 시대, 회화가 무엇을 그대로 재현하다는 것은 무익한 시도다. 작가는 한국적 미의식의 정수로 찬미 되곤 하는 달항아리에 대해 ‘단아하고 무엇이든 채울 것 같은 달항아리에 우리의 꿈과 인생, 사랑을’ 담았다고 말한다. 작품 [Happiness](2202)에서 달항아리는 완전하게 칠해져 있지 않고 푸른 바탕 면에 물고기들이 가득하다. 물고기는 그릇 안에 최소한 그릇 위의 문양으로 자리해야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바탕에 확 풀어 놓았다. 물고기들 사이사이에 산, 꽃 등의 도상 또한 담아내면 아름다울 소재들이다. 


[Happiness](2219)에서 외곽선으로만 표현된 달항아리는 바탕을 그대로 드러낸다. 물고기는 항아리 안에 들어있거나 문양화되기보다는 항아리를 자유롭게 통과한다. 아래의 추상적인 원들을 채우는 색감은 그 위에 형상이 있는 화면에도 존재한다. 서로 다른 어법이어도 시각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평면성은 재현의 도구가 아닌, 회화만의 특성을 보여준다. 김혜수의 작품 또한 평면적이다. 특히 화면 아래에 수평선을 그어 따로 영역을 구별해서 여러 색의 점을 배열한 점은 평면성을 부연 설명한다. 작품 [Happiness](2204)에서 작가는 넓은 붓질 몇 번으로 그린 도자기 형상을 단색 배경 위에 얹어 놓았다. 바탕 면이 완전치 못한 도자기 표면에 드러나고 그자체가 또 다른 추상적 형태가 된다. 화면 아래의 3x10열로 배치된 원들은 추상적이다. 그것은 조형적인 요소일 뿐, 무엇도 재현하지 않는다. 자로 잰듯한 간격은 아니어도, 대략 나란히 배열된 기하학적 형태는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색의 명도에 따른 약간의 원근감이 느껴질 따름이다. 




Happiness Acrylic On Canvas 2206 91.0X72.7



[Happiness](2206)에서 단숨에 그은 듯한 네 개의 동그라미는 네 잎 클로버에서 시작된 것이다. 밑바탕 색들이 조금씩 보이는 연둣빛 바탕 위의 이파리는 행운을 상징하는 꽃말이 있듯이 크게 강조되었다. 많은 식물들 가운데 작가의 눈에 띈 이 행운의 상징은 추상이라는 기조를 깔고 가면서도 서사적 요소를 중시함을 알려 준다. 작가는 ‘만단정화전(萬端情畵展)’을 열기도 했는데, 이 독특한 전시 부제는 ‘만 가지 정다운 이야기’라는 의미인 ‘만단정화(萬端情話)’에서 착안한 조어법으로, ‘만단정화(萬端情畵)’는 ‘만 가지 정다운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라는 의미다. [Happiness] (2225)에서 꽃 또는 잎은 여러 개로 불어나 있다. 작품마다 한 개에서 3개, 4개 등으로 화면을 채운다. 형태를 고정함으로서, 색의 유희가 강조된다. 자연은 인상파 화가들이 느꼈듯이, 다양한 뉘앙스로 가득하다. 초록빛이라는 식물의 기본색부터 따사로운 햇살의 느낌이 있는 노랑빛, 서늘함이 있는 보랏빛 등. 난색과 한색이 두루 꽃/잎의 바탕을 이룬다. 색은 그자체가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는 ‘아름다움이 조화와 균형 속에서 만들어지듯’ 삶 또한 그렇기를 바란다. 자연은 자신의 법칙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자연이 펼치는 법칙 중 극히 일부가 해독되어서 인공적으로 재생산된다. 김혜수가 식물과 함께 주요 소재로 등장시킨 달항아리는 문명의 산물이지만, 문명도 오래되면 자연화된다. 작가는 달항아리를 대지를 상징하는 황토빛이나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빛 바탕에 배치했다. 땅과 하늘 사이에 인간이 있듯이 달항아리도 있을 것이다. 자연의 반열에 오른 달항아리는 예술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달항아리와 자연과의 연결은 몸과의 비유로 확장될 수 있다. 달항아리가 몸이라면 그것은 여성일 것이다. 달도 항아리도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여성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이라고 해서 작품의 위상이 자동적으로 격상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체계는 이분법적이기 때문에, 비유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김혜수의 작품에서 그 매개고리가 되는 것은 그릇이다. 




Happiness Acrylic On Canvas 2217 162.0X130.3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이분법적인 사고가 두 가지 양극화된 용어들을 반드시 서열화시키고 등급을 매김으로서 하나가 특권적인 용어가 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억압되고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상대편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를 해체하고자 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특권성을 강조함으로서 이원론자로 비판받는다. 엘리자베스 그로츠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서 시작했던 전통을 이어받아 형상을 질료나 몸으로 구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생산의 경우 어머니는 형태 없고 수동적이며 무정형적인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형상, 모양, 윤곽, 특수한 형태를 부여받는다고 하면서 이원론을 강화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티마에우스]의 저자인 플라톤의 또 다른 면을 본다. 그에 의하면 [티마에우스]에서 모성을 공동 생산자라기보다는 존재를 담아두는 그릇이자 유모이며 보관장소로 간주한 바 있다. 이원론 이전의 원초적인 하나를 상징하는 코라와 모성과의 관련성은 이후 여성주의 저자들의 지대한 관심거리가 되기도 했다. 예술은 코라와 같은 원초적 용기와의 비유 속에서 생성 소멸하는 것을 다룬다. 


코라는 형태 이전에 그것을 추동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재현적이지 않다. 코드화된 추상 또한 재현이다. 김혜수가 네 개의 동그라미와 그것을 그리느라 얼룩진 흔적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재현이 아닌 회화적 속성을 강조한다. 밝은색 물감은 최소한의 형태로 대상을 암시한 영역에서 자유롭게 흐른다. 빛 외에 물이 있어야 사는 식물의 속성을 추상적 어법으로 표현한다. 추상과 형상이 공존하는 작품에는 중력감이 존재한다. 작지만 속이 색으로 채워져 있고 밀도도 높은 화면 아래의 추상 영역은 물체에 대한 암시 없이도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꽃이나 잎. 도자기 등의 형상이 위에 있는 바탕 면 또한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벗어나 균질한 밀도를 유지한다. 작품 [Happiness](2217)은 두툼한 층으로 이루어진 추상적 화면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위에 어떤 형상도 얹어있지 않은, 다른 작품과 비교하자면 그 바탕에 해당되는 화면을 단독 작품으로 세웠다. 물론 추상적인 공간감은 있다. 초록빛에서 연상되는 자연과의 연결도 있다. 김혜수에게 자연은 무수한 겹과 결을 가진 실재로서 나타나며, 이에 대항하는 실재감을 물감을 통해서도 펼치려 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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