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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윤 / 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자

이선영

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자

 

이선영(미술평론가)

 


정희윤의 최근 전시 작품은 자아에 집중하는 초상들이다. 군더더기 없는 간략한 선과 최소한의 색이 적용된 절제된 모습이다. 이번 전시에서 판화와 회화 작품의 비율은 7; 3 정도 된다. 비슷한 도상으로 이루어진 두 형식은 회화가 판화와 달리 규격의 한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작가는 판화의 독특한 표현력에 대해 ‘동판의 거친 선과 긴 부식 시간을 거침으로 강렬하고 거친 효과가 더해져 판화만의 우연성’이 있다고 말한다. 전시 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은 어두운 바탕에서 드러나는 얼굴과 손이 마치 밤하늘 달덩어리처럼 환하다. 판토마임 배우가 말을 대신하여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미묘한 표정과 몸짓에 집중하기 위해 검은 의상을 입고 본질만 강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검정 의상은 자신을 숨기면서도 드러낸다. 그 의상의 인물이 화가인 점은 시각성과 관련되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 40x54 .etching. 2024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화가들이 풍부한 색상을 좋아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그렸음에도 정작 사진들을 검은 옷을 입는 이유에 대해, 검은색이 지니는 자기 은폐성과 불가시성을 든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그 화가를 보고 있다 해도 그는 우리가 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보는 사람일 뿐 자신의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 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일상에서 블랙은 관료주의 시대의 상징색이다. 존 하비는 비행기와 고속철도를 어릿광대들이 조종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비유하면서, 현대적 직업의 세계 대부분에 여전히 칙칙하고 무거운 색조의 옷차림이 있다고 본다. 화가는 그러한 직장인은 아니지만, 스스로 한 술 더뜨기 전략을 통해 ‘카프카적인’ 현대사회의 블랙을 착용한다. 정희윤의 회화 작품 속 블랙은 주로 먹의 색이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먹을 자유자재로 쓰고 싶어서 수묵화도 배웠다. 먹은 작가가 좋아하고 익숙한 매체다. 


작가는 ‘아크릴의 블랙은 차갑고 냉정하고 도시적이지만, 먹의 블랙은 따뜻하고 깊고 외갓집 툇마루의 밤같이 서정적’이라고 대조한다. 초상은 몸의 언어에 집중하되 그 움직임은 함축적이다. 언어적 의미의 소통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희윤의 주요 매체인 그림과 회화는 시간의 전후를 한 순간에 압축한다. 말 없는 매체인 회화와 판화는 현실의 한순간을 재현하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의 귀와 입은 최소화되어 있고, 눈동자는 없으며, 코 또한 선 몇 개로 대신한 가면같은 얼굴이다. 그것은 해부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호한 손과 만난다. 아래로 가지런히 늘어뜨린 긴 손가락은 상대에게 적극적이지 않다. 그것은 사색적인 얼굴을 받쳐주며 타인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수화가 있을 만큼, 그리고 판토마임 배우에게도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는 손은 말 없는 이미지에서도 맡은 바 역할이 있다.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 39x59 .etching. 2024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 39x59 .etching. 2024



사회생물학자 데이먼드 모리스는 [바디 워칭]에서 인간의 손 한 쌍에는 자그마치 54개의 뼈가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손가락 동작들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사용하면 전적으로 새로운 광범한 몸짓과 신호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정교함에 의해 손은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칸트)로 평가된다. 정희윤의 작품에서 손의 뇌같은 기능은 언어적 측면에 있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의 [철학자들의 동물원]은 ‘말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고 손으로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앞발이 대지에서 벗어나 손이 된 진화적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다. 손이 부여한 인간의 위상은 주로 노동하는 인간에 적용되지만, 노동의 연장이자 질적인 전환인 예술도 마찬가지다. 정희윤의 작품에는 인간 그자체에 주목하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선택이 있다. 같은 크기, 같은 자세를 취한 인물이 나란히 배치되는 두 작품은 각이 진 얼굴과 짧은 머리 등, 언뜻 남성 같은 외양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자화상의 성격을 띄는 정희윤의 작품에서 그 인물의 모델은 여성이다. 그렇다면 인물의 성은 지워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사회적 특성이 드러나는 거의 모든 코드를 중성화시키는 선택의 일환이다. 일반적으로 성은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만큼 지우는 것도 힘들다. 패션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위반의 가시적인 장이다. 앞서 인용한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 의하면, 옷과 성의 관계에서는 검음/밝음, 남자/여자의 엄격한 대조가 상업과 산업이 확장된 시기에 발전되었다. 남성적인 검은색은 흔히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시시한 것들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지니곤 했다. 당시 집안의 천사이기를 강요된 여성들의 의상은 밝았다. 존 하비는 19세기에 여성성은 ‘하얀 천사, 베일을 쓴 어머니’(뤼스 이리가라이)로 나타난다고 인용한다. 근대의 그림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 속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지적된다.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 50x70 .etching. 202



에바 헬러도 [색의 유혹]에서 검정은 남성적이며 힘이 있고 점잖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증가하면서 강조점은 변한다. 존 하비에 의하면 19 세기말에 이르면 상황이 바뀌어 남성복이 아닌 여성복에서 두드러지고 단호한 검은 색이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림 속 검은 의상의 여성에는 개인의 힘과 사회적인 힘에 대한 자각이 풍겨나며, 거기에 자신에 찬 과감함이 더해진다. 정희윤의 작품에 인간이 작품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평소에 열심히 해왔던 누드 크로키에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 작업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의 구축이 쉽지만은 않았던 터라, 생활 속에서 손이 녹슬지 않게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 크로키였고, 이를 통해 몸의 선에서 의미를 감지하고 소통의 지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작품 속에서 해부학적으로는 불가능한 기관의 배치는 정상에 대한 감각을 바탕으로 한다. 


왜곡에 의한 표현 방식은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에곤 쉴레의 영향을 받았다.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전달’을 보았다. 에곤 쉴레처럼 정희윤의 작품에서도 선이 중요하다. 무언의 표현인 얼굴 표정과 몸짓에 대한 감수성은 연극이나 무용같은 무대예술과 시각예술을 접근시킨다. 무언의 소통은 몸의 왜곡에 가까운 변화를 요구한다. 정희윤의 작품에서 말을 뱉는 기관인 입은 최소화하거나 거대한 손으로 가려지곤 한다. 입과 연동되는 귀 또한 비중이 크지 않다. 작가는 감정의 교류에 있어서 언어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가란 누구보다도 예술과 일상의 간극을 인식하는 이다. ‘삶은 이쪽에 두고 예술은 저쪽에 있는 시간들을’ 지나온 작가는 ‘그림은 나다운 삶을 살게 하는 가장 소중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업은 ‘모든 게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자신과 밀접하며, ‘삶에서 온전한 자신으로만 존재하기를 소망하는 순간들’을 충족시켜 준다.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 56x76 .etching. 2024



자신의 삶에서 그림의 위치에 대해,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는 이 이상하고 신비한 세계는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걸 하도록 한다’면서, ‘내 기질을 그림을 통해 찾았다’고 말한다. 한가운데 작가 자신이 있는 작품에는 세상에 맞춰진 내가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의 모습이 있다. 사회적으로 명명된 인간이나 역할극의 인간이 아닌 모습은 보고/보이는 관계로부터 초월한 초상을 낳았다. 작품을 통해서 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위해 조용히 투쟁하는 모습이다. 작업에 대한 의지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예술과 긴장 관계에 놓인 삶에서의 방법이다.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대의가 분명하게 있을 때, 오히려 인간적 관계가 명료해질 수 있다. 대개 비슷한 욕망이 전쟁같은 경쟁과 불화를 낳는다. 그저 온전히 내자신이 될 수 있는 작업은 평화의 조건이자 결과이다. 그것은 작으면서도 큰 소망이다. 작품은 작업하는 삶의 유일한 지지대인 자신을 최대한 투명하게 제시하는 역설적 전략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그것을 작품으로 내뿜는 것이 작가라면, 그에게 요구되는 정체성은 맑은 창 또는 거울같이 투명성일 것이다. 색감만 다른 짝패 작품은 판화의 특성을 살린다. 선이 아니라면 바탕 질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은 자신은 잘 보이지 않은 채 밖을 관찰하는 위장막같은 위상을 가진다. 그 옆의 작품은 바탕이 밝아지면서 다른 한쪽 팔의 방향성이 분명해지고 눈 주변의 색도 다르다. 기계로 친다면 작동 전/ 작동 중의 차이에 해당된다. 잠재적 시간성은 숨은그림찾기 같은 최소한의 조치로 울림의 변화를 낳는다. 작품 속 인물은 서 있을 때도 사색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해부학적 기준으로 볼 때 지나치게 큰 손과 발은 인물이 추상적 공간 속에서 중심을 잡는데 도움을 준다. 그는 좌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좌표가 되고자 한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세상살이의 잡다함이 아니라 자연이다. 최근 작품 속 인물은 자연의 기운을 받고 있는 듯하다.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 56x76 .etching. 2024



울긋불긋한 식물의 형상은 민화에서 온 것이며 인물처럼 단촐하게 표현된다. 이번에 적극적으로 사용된 색은 자연에 적용된다. 자연물이 놓인 화면은 밝고 화사하게 변한다. 이전의 모노톤 작품들이 겨울/밤을 떠올린다면, 이번 전시의 작품은 봄/낮에 가깝다. 자연의 기운이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스며드는 것’은 다소간 긍정적인 것이다. 같은 크기의 두 작품은 마주 보고 앉은 모양새다. 이전의 모노톤 작품들이 빈공간에 던져진 실존적인 인물을 상징한다면, 자연적 형상이 있는 작품은 자연의 색과 형태에 반응한다. 인간은 몸을 자연 쪽으로 향한다. 인물은 여전히 자신을 가리는 검은색 의상이지만, 배경은 환해졌다. 듬성듬성 박힌 색 조각들은 포자나 향기처럼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마주한 화면의 앉아있는 인물은 모태 속 아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다. 식물의 씨앗 속에 성체의 축소판이 존재하듯, 인간은 자연의 내재율을 따른다. 하나로 뭉쳐진 그는 검은 돌덩어리 실루엣이다. 인간을 화면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출전; 수성아트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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