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황명수 / 결정의 비결정성

이선영

결정의 비결정성

  

이선영(미술평론가)

 


황명수의 ‘부유(浮游)’ 전은 나무를 깎아 만든 수백 개의 망치, 그릇, 숟가락, 북어 등이 벽과 좌대 위에 설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대량 생산된 물건은 기준에 어긋나면 불량품이 되지만, 예술의 경우 서로 다른 것이 미덕이다. 총괄적 관념의 산물이 아닌, 매번 다른 손작업은 차이를 낳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릇, 숟가락, 망치 등은 그것이 기물의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에 생산품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관객이나 소비자와의 소통과 유통에도 적극적이며, 일상과 깊숙이 접속하면서 작업의 지속성을 확보해 왔다. 올해로 6회째 개인전을 가지는 그는 공방을 운영하며 나무를 매개로 한 문화예술교육과 창작활동을 병행해 왔다. 그의 주재료인 나무는 전공인 회화보다 관객과의 만남을 더 수월하게 해주었다. 여러 다른 상태의 나무를 손수 깎아 만든 것들은 무엇인가를 담거나 두들길 때 사용할 수 있다는 기본구조만 갖추고 있을 뿐 모두 제각각이다. 




황명수,  다시길위에서다, 가변설치 



  다시길위에서다, 가변설치 



그의 작품이 몇 가지 소재로 제한되는 것 동질이상의 유희를 위한 것같이 다양한 모양새가 특징이다. 수작업은 선택하거나 주어진 재료와 매 순간 대화하는 과정이기에, 결과물도 조금씩 달라진다. 작업과 함께한 시간을 오롯이 담고 있는 작품들은 양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막대한 물량은 그것들이 모두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질적 차원으로 전화(轉化)된다. 관객은 특히 어떤 것에 눈길이 더 가겠으나, 그의 작품은 하나가 아닌 군집으로 제시되며 작동된다. 하나하나 작가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 수 십 수 백 개가 동원되어 설치작품으로 제시되곤 한다. 새와 물고기, 벌레 등이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여러 개체가 하나처럼 행동하듯이 말이다. 2017년 충북문화관 숲속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의 부제이기도 했던 작품 [다시 길 위에 서다]에서 숟가락이나 그 형태가 변주되어 거의 그릇 역할도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저마다의 몫을 떠올린다. 우리는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할 때 ‘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자기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전통사회의 믿음과 달리, 점차 가속화되는 양극화의 계층적 질서가 공고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숟가락의 상징성은 더 강해진다. 황명수에게 숟가락은 ‘음식을 담고 마음을 담고 의미를 담고 나아가서는 욕심을 담는 도구’이자, ‘흙이냐 금이냐로 풍자되기도 하는 가난과 부가 담겨’진다. 오랫동안 나무를 다루어왔을 작가는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서 조각의 형태를 찾아냈듯, 나무의 색과 결과 어울리는 형태를 찾아낸다. 머리가 크고 자루가 달린 형태라는 점에서 숟가락과 비슷한 망치 또한 상징적이다. 작품 [결정권자들]에서 전시장에 설치된 나무 망치들은 법적 효력이 발휘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상징한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권력이나 힘을 상징하는 기호이며 어떤 결정권’이다. 수많은 망치들은 사법부나 입법부에서 울리는 ‘땅땅땅~’하는 소리는 비록 형식적일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개막이래 들려왔음을 말한다. 




결정권자들, 가변설치



결정권자들, 가변설치



결정권자들, 가변설치



물론 민주주의가 개막되기 전에도 ‘망치’는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망치’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여성을 박해했던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야콥 슈프랭거, 하인리히 크라머)의 예가 있다. 황명수의 작품에서 망치들은 대개 무리지어 배치된다. 그것은 피지배자들 또한 결정권자일 수 있음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직접 선거를 통해서 민초들의 결정에 따른다. 권력이 미시적으로 편재하는 사회에서 전적인 지배, 전적인 피지배는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결정의 기회는 온다. 정치가 아니더라도 대량 생산소비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매 순간 결정한다. 구매 행위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수많은 결정이 이루어진다. 나뭇가지처럼 갈라진 양 갈래 길에서 우리는 수없이 결정하고, 그러한 결정들이 쌓여 과거, 현재, 미래가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결정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망치들은 그자체가 인간, 또는 인생에 대한 은유이다. 


작가는 이전 전시에서 망치들을 담은 좌대의 높이를 달리 설치하면서, 결정하는 규칙에 내재된 계층적 질서를 강조하기도 했다. 가령 바닥에서 높이 설치된 망치들은 규칙의 지배력을 표현한다. 한편 망치처럼 큰 머리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등, 인류학적 용어는 큰 뇌와 도구 사용의 연동을 말한다. 이전 전시에서 작가는 망치를 세워 설치함으로서 직립하는 인간적 모델에 대한 비유에 근접했다. 일상적 관습에서 제사 때 숟가락도 세워 놓기도 한다. 또한 황명수의 이전 작품에서 콩나물을 소재로 한 것들을 염두에 둔다면, 박스 형태의 좌대에 집합적으로 설치한 망치들은 마치 콩나물 시루처럼도 보이기도 한다. 일상용어에서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 같은 표현도 있다.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풍경이지만, 콩나물 시루같은 교실도 있지 않았나. 이번 전시에서 나무 망치들은 전시장 벽에 죽 붙여서 설치했지만, 많음이 주는 밀도감은 여전히 유지된다. 




 시간디자인하기, 가변설치 



시간디자인하기, 가변설치 



나무 망치들은 이전의 콩나물 소재의 작품과 비교할 때 작가의 행위가 각인된 보다 견고한 형태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 망치는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규칙을 가시화한다. 망치가 벽에 죽 설치될 때 관객들은 같은 구조의 변주를 음미할 수 있다. 작품 [시간 디자인하기]에서 다양한 색과 형태, 크기의 망치들처럼 하나의 지배적인 ‘결정권’이 아니라 평등한 결정권이 인정된다면 그것이 이상사회일 것이다. 평등한 결정권에 대한 예술가들의 희망은 누구보다도 크다. 예술 또한 사회의 여러 다른 자리들처럼 자기 위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학이나 대학원 같은 ‘공식적’ 경력 전후에 여러가지 일을 해왔던 황명수에게 (제도로서의)예술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근대 이후 분업화가 보편화되었지만, 각자의 천성과 노력이 결집 된 산물이 평등하게 교환되는 사회는 여전히 희망 사항이기 때문에, 자기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이는 자신의 시간을 인내해야만 한다. 


황명수의 작품 제목 속 ‘시간’이라는 키워드는 수행적 작업의 필요조건인 시간에 대한 감각을 나타낸다. 그의 작업에서 시간은 기승전결의 드라마틱한 전개가 아니라, 필경사의 펜촉 소리나 수도사의 독경처럼 나지막히 그리고 일정하게 흐른다. 깎기든 그리기든, 삶에서의 그 어떤 일이든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될 때의 고유한 리듬이 내재한다. 작가는 하나보다는 집단, 그리고 배치를 통해서 하나의 구조가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여러 방향으로 제시한다. 가령 망치들이 귀퉁이에 쌓여 있거나 벽에 자유롭게 걸려있을 때 관객은 단어가 각기 다르게 배치된 문장을 읽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디자인하기’로 붙은 작가 노트에서 그는 ‘칼 밥에 묻어 나온 시간과 함께 지난 것들 언어, 구조, 기호, 아직 거르지 못한 언어의 실타래’로서의 작품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심미성보다는 사회현상 등을 은유하는데 방점이 찍혀있다. 형식적으로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채워왔던 꾸준한 수행성이 깔려있다. 




2017



2018



그는 ‘감각이나 미학이 아니라, 오롯이 나무의 물성을 대하는 작가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품의 주재료 또한 ‘자라온 지역과 환경, 삶의 결이 다른 나무들’이다. 작가는 그 결을 최대한 살려준다. 많은 숫자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수도 없이 되뇌이는 종교의 경전처럼 나무를 조각하는 칼의 무수한 반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톱과 도끼, 칼, 망치와 조각도가 지나간 날것의 흔적이 드러나도록 작업’하기에 어떤 것도 똑같을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는 유사하다. 물론 그것은 기계적 반복과 다른 차이를 둔 반복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가설처럼 반복은 치유다. 기복이 심한 삶은 복잡한 마음과 정신을 둘 곳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인 몰입과 수행은 예술만큼이나 종교와 가까이 있다. 작가는 ‘나무를 자르고, 깎고, 파내고, 갈아내고, 칠하는 반복적 행위는 전시를 담아내기 위한 창작활동이라기보다, 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라고 말한다. ‘망치질과 끌질, 칼질의 무한 반복은 삼천 배를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선택한 각각의 상징적 소재는 반복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각각의 소재의 조화가 당연히 되지는 않는다. 이번 6회 개인전의 부제인 ‘부유’는 결정하는 망치의 상징성을 무색하게 한다. ‘결정’과 ‘부유’는 모순이나 긴장 관계가 내재한다. 양자를 동렬에 놓은 이유는 ‘내가 결정해도 공고하게 굳혀있지 않은...타의에 의한 변화와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부유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결정 속에 내재하는 비결정성을 암시한다. 황명수의 소재 중 하나인 나무망치는 선고 등, 결정하는 행위에 실제로 사용되곤 한다. 결정의 대표적인 상징은 법일 것이다. 그러나 법의 자의성은 체제가 불안정할 때 그 본모습을 보여준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법에서 정의로]에서 법의 힘, 법적 힘과, 우리가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폭력을 구분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벤야민의 이름]에서 폭력이 법질서에 외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부유, 가변설치



폭력은 법의 내부로부터 법을 위협한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에, 법의 법에,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고 본다. 모든 국가의 정초에 이러한 양가성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법을 창설하며 항상 폭력 속에서 창설한다. 폭력이 법의 기원에 존재한다는 것, 폭력과 법 사이의 상호함축을 강조하는 것은 해체주의자다운 결론이다. 법으로 대표되는 상징적 질서의 자의성은 양날의 칼처럼 작동할 수 있다. 지배적 권력만 있었다면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혁명은 거대 서사다. 우리는 매일의 노동이나 작업 같은 수행성 속에서도 반복되는 비결정성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황명수의 작품에서 ‘결정’하는 행위에 내재 된 비결정성은 법으로부터 벗어난 영역이라 간주되는 예술에서도 관철된다. [법에서 정의로]에서 주목할 점은 데리다가 결정의 순간, 정당해야만 하는 이 순간 자체는 항상 긴급하고 촉박한 유한한 순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결정의 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다. 그에 의하면 긴급하고 촉박한 결정은 비지식과 비규칙의 밤에 이루어진다. 이론적 합리성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의 영역으로 간주 되는 예술 또한 법이 창설되는 순간처럼 비대칭성과 폭력성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정과 부유라는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한 황명수의 키워드는 생활 속에서 공존한다. 그는 숟가락이나 앞접시 형태의 그릇들을 탁자에 배치한 작품에도 ‘부유’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상의 유기체들의 숙명인 섭식의 문제는 자유와 평등 같은 인간의 기본가치에 대한 가늠자가 되며, 그것이 자명하게 보장되는 일은 없고 때로 피흘리는 투쟁의 문제라는 점이 확고함이 아닌 부유의 이미지로 기울어진다. 작품 [기원]에 등장하는 북어들은 나무와 색감과 질감이 유사하다. 작가는 북어와 나무의 공통점으로 ‘마르고 딱딱하고 가볍다’는 점을 든다. 






기원, 가변설치



그것은 주술이나 마술적 사고처럼, 형태나 과정의 유사(類似)함을 통한 이해이다. 나무라는 오래된 소재는 유비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그는 굳이 자세하게 북어 모양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툭툭 단순하게 깍은 모양새만으로도 관객은 북어를 연상할 수 있다. 전통 속에서 북어는 기원을 상징했고, 제목 또한 그러한 상징을 반영한다. 작가는 100여 개가 동원된 다양한 북어의 형태에서, ‘옛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당 같은 것이며 집을 짓고 상량식을 하는 목수의 마음이고 출항하는 배의 안전과 만선을 바라는 가족의 마음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한 개인의 간절한 기도’를 본다. 작은 것은 20cm에서 큰 것은 150cm까지 그 크기는 각기 다르지만 입을 벌린 채 한 방향으로 설치한 북어의 배치는 ‘존재의 함성’(알랭 바디우)처럼 기원의 반복이나 집단성을 말한다. 세모꼴의 받침대로 떨어질 듯 배치한 방식은 존재의 위태로움이 기원을 향하게 했음을 암시한다.   

 

출전; 충북갤러리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