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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ROM 전 / 존재의 밤을 헤아리는 선의 여로

이선영

존재의 밤을 헤아리는 선의 여로


이선영(미술평론가)

 


드로잉 기반의 작업을 해온 4인의 그룹전 제목 ‘BLACKROM’은 ‘블랙’과 ‘모노크롬’이 합성된 신조어이다. 에바 헬러는 [마법의 색]에서 색으로서의 검정은 모두 50가지라고 헤아렸지만, 블랙 자체가 모노크롬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령 블랙+크롬은 일상어 ‘역전앞’처럼 반복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 전시 작품들이 반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차이를 길어내기 위함이다. 그것은 오직 작업을 삶으로 여겨온 꾸준한 실행이라는 맥락 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색의 종합인 블랙에는 모든 색이 잠재해 있다. 블랙은 단지 무채색으로 코드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색과 빛을 품고 있으며, 그 깊이만큼이나 확장성을 가진다. ‘BLACKROM’ 전의 작품들은 온갖 색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색을 극적으로 감축함으로서, 보다 응집력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펼치려 한다. 색은 또한 일정 파동수를 가지는 빛이기도 하다. 어둠에서 빛이 나오고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세계가 매번 다시 시작되고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잠, 꿈, 무의식의 시공간에 하나의 색/빛을 할당한다면 그것은 블랙이다. 



설원기, 2020-10__ mixed media on mylar 64X46cm 



설원기, 2020-13__ mixed media on mylar 64X46cm copy_1


네 작가들의 공통점은 회화와 드로잉이 수렴하는 지점에 있다. 차명희와 설원기는 자연과 일상에 뿌리를 내린 감성을 자유로운 선에 풀어낸다면, 정헌조와 김범중은 작가가 정한 엄밀한 규칙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다. 한 선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헌조의 작품은 경첩의 작동 방식과 비교된다. 또한 일정 간격으로 나뉜 수직면들이 중앙의 수평선에서 만나는 김범중의 작품이 현악기의 현처럼 울린다. 차명희와 설원기의 작품은 기억 쪽에 방점이 찍힌다면, 정헌조와 김범중의 작품은 치열하게 현재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차명희와 설원기의 작품에서 기억은 모월모일로 특정될 수 있는 사건의 회고가 아니라 시간의 시험을 이겨낸 본질의 다른 면이다. 과거는 자명하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 그래서 투명하게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적처럼 묻혀있다가 작업하는 손의 움직임에 의해 활성화되는 무의식의 편린이다. 현재 또한 미지의 것이다. 현재에의 주목은 지속적인 시공간의 갱신을 통해서인데, 이는 드로잉의 반복적인 선들이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선의 운용 방식을 통해 미지의 시공으로 도약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헌조와 김범중의 작업 방식이나 그 결과에 내포된 절제(극단에는 억제)미는 일상생활에서의 공식 부분의 정장, 기능주의, 관료주의, 객관성으로 나타나며,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성직자적인 금욕주의를 떠올린다.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검은색은 자아를 묻어버리는데 쓰인 색상이라고 하면서, ‘검은색은 지하에 사는 신들의 색이고, 저승에서 온 공포스러운 힘의 색. 사막의 은자들. 금욕적인 생활은 거칠고 어두운 재료를 사용하게 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세속에도 영향을 끼쳐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이어지고, 서구의 경제적 발전을 이끈 근대의 ‘직업윤리’로 나타난다. 막스 베버가 분석한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다. 예술의 자율성은 분업화된 세계에서 예술이 자리 잡는 방식이기도 했다. 판화지나 장지가 긁혀 나올 정도로 열심히 파고 있는 화가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분업 속 소명 의식과 멀지 않다. 



김범중, Coherence, 2024


자연 및 일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차명희와 설원기의 작품에서 철학자들이 예술적 창조와 연결 지은 멜랑콜리한 측면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단지 현실 속의 사건에서 발생되는 비극이나 슬픔, 퇴조 등이 아니라, 삶에 더 분명한 윤곽을 부여하는 어둠이다. 블랙이라는 근본적 색은 다른 색들을 더 빛나게 만들 수 있다. 블랙의 속성 중 이 전시의 참여 작가에게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블랙과 밤과의 비유다. 물론 그것은 어두운 색이라는 조형적 언어라는 매개를 가지지만, 애초에 그러한 언어를 선택한 이유에는 보다 내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리학적 의미가 아니라 예술적 작업 자체에 내재한 밤적 요소를 말한다. 자연이나 경험과 관련된 차명희와 설원기는 물론, 빛의 있음과 없음을 대조한 정헌조, 여명을 떠오르게 하는 빛의 출현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김범중의 작품들이 그렇다. 블랙과 밤과의 비유는 건조한 개념보다는 관객의 직관에 호소할 수 있다. 


블랙과 모노크롬은 조합, 이 이중적 강조는 밤 중의 밤을 연상시킨다. 장 베르동은 [중세의 밤]에서 밤이 되면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좀 더 잘 포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신비로움의 체험은 빛이 아니라 어둠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인용한다. 요컨대 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조’를 가리킨다. ‘밤에 둘러싸이면 영혼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 나선다’(장 베르동). 밤은 의식 및 이성에 호소하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보다는 무의식 미감성에 호소하는 상징주의나 낭만주의에서 공감을 얻었으며, 무슨 이즘을 떠나서 예술의 본질과 가까이 있다. 이성과 의식은 기술 과학이나 관료주의를 통해서 더 잘 작동되며, 이는 출퇴근이 있는 낮의 세계를 대변한다. 숫자가 지배하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회에 비판적인 장 그르니에는 [일상적 삶]에서 ‘수학이 어려운 것은 그것의 난해함이 아니라, 그림자에 자리를 남겨놓지 않고 가정들의 연쇄를 따르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한결같은 명철함’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빛의 과잉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명희


한밤의 색과 비교할 수 있는 ‘블랙크롬’은 각기 다른 작가의 작품들을 공통된 분위기에 잠기게 한다. 그것은 이들 작품에서의 블랙은 감춰진 실재와 대화하는 장이다. 블랙은 실존의 밤부터 우주적 밤까지 관통한다. 장 그르니에는 ‘나는 우리들을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으로서의 자정을 사랑하며’ ‘우리는 태양 아래서 우리의 자리를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밤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술과 밤과의 내밀하고도 본질적인 관계를 지적한다. ‘블랙크롬’은 강력한 하나라기 보다는 그 반대 항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질베르 뒤랑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서 상징에 대해 심리학적이고 심리 사회학적인 구조를 이론화한다. 상징적 상상력은 대립적인 것끼리 서로 균형을 취하는 광활한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저자는 상징을 분류하는데 열쇄 역할을 하는 심리 생리학적 영역을 강조함으로서 관념론을 경계한다. 블랙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를 통해서 가장 큰 범주의기도 한 낮/밤의 변증법과 관련된다.  

  



차명희—자연에서 길어낸 무의식의 선


캔버스에 바른 미디움이 마르기 전에 목탄으로 빠르게 긋는 선들은 때가 되면 움트고 자라는 줄기처럼 자체적인 동력으로 움직인다. 차명희는 일관되게 자연에 뿌리를 두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재현이 아닌 과정을 따라갈 뿐이다. 자연에서 느낌을 길어온 작가가 염두에 두는 형상은 광활한 공간의 느낌, 가령 바다, 사막, 깊은 숲속 등이다. 자연에서 출발했지만, 중력을 거스르는 꿈속같은 풍경이 생성된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영혼과 꿈]에서 꿈꾸는 자를 시인에 비교하면서, 꿈을 예술의 모델로 삼는 한 작가를 소개한다. 그 작가는 ‘꿈의 유연성, 상징성, 분위기의 변화무쌍한 색조, 형태들의 유동성을 높이 평가한다. 꿈 내가 소홀히 한 것,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들이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땅속에 묻힌 씨앗이 꽃이나 나무로 자라듯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자양으로 성장하여 변용된 모습으로 거기서 다시 솟아오른다. 꿈 덕분에 우리는 우리와 자연과의 모든 유사, 모든 리듬의 일치 가운데 가장 심원한 것을 발견한다’(베갱). 꿈 같은 작품에서 ‘존재의 밤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유적들’(베갱)이 발견된다.



차명희


차명희의 작품은 자연과 절연한 추상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시작되고 그곳 또는 그때로 회귀한다. 시공간의 시작과 끝 사이에 수많은 변주가 있다. 특정한 목표지점이 있는 조형적 의지의 달성이 아니라 식물의 줄기처럼 자신을 통과하는 힘에 스스로를 내어줌으로서 생성되는 무엇이다. 바닥에 화폭을 깔고 작업하여 나오는 줄기같은 선은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질퍽한 평면을 활주한다. 어떤 부분은 얇은 표면 위로 드러나고 어떤 부분은 묻히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선의 양태를 일률적으로 조율할 수는 없다. 잔잔한 선율부터 히스테릭한 선들이 춤추는 역동적 형상까지 다양한 계열을 이룬다. 속도와 우연성은 상호작용한다. 무의식은 최대한 활성화된다. 작가가 시작해서 지속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형상이 오랜 세월 수없이 마주하던 화폭에 펼쳐지는 순간들이다. 일단 내질러야만 나오는 형상이며 수정도 안되는 터라 그냥 엎어야만 하는 작업도 많다. 작업실 바닥에는 작품과도 비슷한, 연습했던 선들이 보인다. 목탄이라는 먹에 가까운 재료와 수정 없이 단번에 가야 하는 선적 어법은 동양화에 기반한다. 


붓이라는 매개를 생략한 목탄은 깊은 무채색의 느낌의 먹의 속성은 유지한 채 보다 단촐하게 나타난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본질에 더 근접하는 작가의 방식은 자연에 대해서나 예술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다. 밝은 회색 바탕은 일률적이지 않아서 화면 아래는 땅 같은 느낌의 밀도가 있다. 식물 줄기처럼 생멸하는 선들은 상하와 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자연과 예술을 수렴하는 목탄은 검은 선은 단지 명도가 다른 바탕에서 생겨났다가 바탕으로 사라진다. 양자는 현실과 잠재성의 관계다. 회색빛 단색조의 작품은 마치 희뿌연 안게 뒤에 가려진 풍경을 떠올린다. 식물 친화적인 생활을 반영하는 제목들은 선의 출처를 암시한다. 가령 2017년 개인전 ‘숲으로 가다’ 전에 출품된 작품 [생성의 숲], [숲 그림자] 같은 예가 그렇다. 역량을 작업에 더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자연과 거리를 둬야 할 정도로 자연은 이미 작업 내부에 자리한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라는 토양을 바탕으로 예술 또한 저절로 자라나길 바란다. 이러한 작품에서 자연은 운명이 아니라 꿈처럼 자유롭다. 

 


설원기-야생적 바탕으로서의 드로잉


설원기에게 그림은 그가 생활 속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담는 가장 유력한 방식이지만, 그리기의 자유로움을 위해 구체적 요소는 거의 휘발된다. 추상적인 작품 제목에는 그가 본 풍경이나 기억같은 삶의 편린이 남아있지만, 지시대상과 조형적 언어의 거리는 무한정 늘어나 있다. 이러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삶에 뿌리를 대려는 이유는 보다 다양한 작품 세계를 위해서일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분명했던 경험도 예술로 풀어 쓰려면 자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말이 앞서는 것, 즉 말이 말을 낳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설원기는 폴리스터 필름이나 금속, 나무같이, 그림이나 드로잉에 잘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통해 즉발적인 선의 흐름을 분출하듯 드러낸다. 캔버스나 종이처럼 덮고 흡수하는 식으로 순화시키기 힘들다. 그리기의 순조로움을 방해했을 이물감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구별할 수 없는 형상이 된다. 그림이자 드로잉은 그리기의 원초성이 실험되는 바탕이다. 그림/드로잉에 통상적이지 않은 바탕 면은 훈련이나 조율보다는 낯섦과 야생이 드러나는 장이다. 



설원기, 2020-42__ mixed media on mylar 61X92cm 



 설원기, 2021-23__ mixed media on mylar 22X28cm 


설원기의 작품은 선의 본래적 속성, 선으로 만들어 보는 면 등 조형의 기본 요소들의 특성들이 세련됨과 관념에 의해 침해되는 것을 피하고, 그리기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흥미를 유지하고자 한다. 2019년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라는 부제는 이러한 포기를 통해 더 많은 자유를 얻으려 했던 작가의 선택을 암시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을 내포한다. 작가는 2001년 개인전에서 ‘평소 회화작업도 드로잉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고 회화작업 자체도 드로잉적이라고 봐 왔다’고 말한다. 드로잉은 회화까지도 포함하며, 지각과 기억, 의식과 무의식 등을 담을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장이다. 회화의 밑그림으로 간주되어 왔던 드로잉을 더 포괄적인 범주로 보는 작가에게 양자의 단절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종합이란 단순한 화해이기 보다는 모순되는 것들간에 존재하는 긴장’(질베르 뒤랑)이다. 질베르 뒤랑의 상징적 인류학은 다양한 대립 유형들을 나열한 바 있다. 그러한 구분들은 저자가 심리학적으로 구분한 바 있는 낮체제와 밤체제 사이의 구분을 재확인한다. 


질베르 뒤랑에 의하면 모성적인 소아적이고 멋대로인 감정들이 이미지의 밤의 체제 쪽으로 다원 결정되는 반면에, 사회적 강제권, 놀이 규칙, 규칙적 놀이, 그리고 요행의 놀이까지도 낮의 체제를 다원 결정하는 교육체계를 형성한다. 이 기준에 의거한다면 설원기의 ‘블랙크롬’은 ‘밤의 체제’와 가깝다. 그의 밤은 낮처럼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조율되지 않는다. 날 것의 세계다. 그가 거친 재료 위에 신속하게 작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드로잉의 표현 방법이 ‘좀 더 즉흥적이고 순발력도 발휘되어서 순수하고 솔직한 느낌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예술은 의당 무엇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앞서서 이리저리 재다 보면 최초의 영감은 사라지고 작업을 위한 작업이 되고 마는 경향이 있다. 드로잉을 통해서 개념을 표현하는 문제는 관념주의와는 또 다르다. 구체적 형태로부터의 탈주와 색의 삭감은 연동되며, 그 모두가 자유를 위한 선택이다. 그의 무채색은 단순한 감축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융통성 있게 담기 위한 선택이다. 

  


정헌조-상징적 우주의 균형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듯한 정헌조의 작품은 그의 그리기 도구가 붓일 수 없음을 말한다. 그 붓이 아무리 세필이어도 말이다. 붓 대신 잡은 연필은 수술 도구처럼 정교하게 운용된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위아래로 똑같은 크기로 배치된 둥근 형태는 마치 반도체 공장에서의 공정도 떠오른다. 위는 밝은 바탕에서 블랙홀처럼 진한 원이, 아래는 그 반대로 화이트홀같은 밝은 원이다.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평행하게 배치된 두 원은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그는 마치 경첩과도 같이 ‘이것과 저것이 더 이상 서로의 반대편을 찾지 않는 분별이 없는 상태’를 지향한다. 하지만 분별이 없으려면 일단 분별이 선재해야 한다. 하나로의 종합 또한 느슨한 절충이 아니라 아귀가 맞아야 하는 긴장 가득한 과정이다. 그의 작품에서 팽팽한 균형감은 분별의 결과다. 하지만 분별 그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에서 상징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에는 질베르 뒤랑이 [상징적 상상력]에서 분류한 바대로, 낮/ 밤의 상징구조가 있는데, 밤은 낮의 구별하고 분류, 분석하는 정신에 대해 연결하고 체계화하고 움직이게 하는 정신이 있다. 



정헌조, the hinge of the Way. 2023. grafite on paper. 91x116.7cm



The One is the All, the All is the One. 2024, graphite, embossment on paer, 116.8 x 91.0cm


에바 헬러는 블랙이 낮과 밤의 차이를 만든다고 하며, 가치의 전환, 바로 여기에 블랙의 가장 커다란 영향력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양자의 대조는 결합을 위한 것이다. ‘영감은 밤의 충만함과 낮의 명료함을, 무의식의 신비와 의식의 규칙을 결합시킨다’(헤르더) 2012년 개인전 부제 ‘Continuous Present’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재가 집적되어 만들어지는 시간성이라는 주제’를 표현한다. 그때 전시된 작품 [The One is the All, The All is the One]는 ‘본질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의미다. 지속과 현재성은 양립하기 힘들지만 고전주의자들이 의식했듯이 작품은 하나의 객체이며, 객체로서 그것은 완결된 것이다. [낭만적 영혼과 꿈]의 저자는 ‘객체와 그것의 형태는 그 내부에 무한을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객체를 있는 그대로 그의 한도 내에서 사랑함으로서 무한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 괴테의 예를 든다. 괴테에게 ‘예술작품의 법칙은 바로 영원을 포착하되 그러나 순간 속에서 포착하고 무한을 인식하되 그러나 대상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최소로의 축약은 팽창을 위한 전제 조건이며, 이때 양자는 모순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한다.  

 

정헌조의 작품에서 수많은 가는 연필 선으로 구현된 명도의 대조에서 음/양이나 밤/낮 같은 상징을 볼 수 있지만, 그러한 비유가 너무 거시적이라면 수술실이나 첨단기기를 만드는 공정이 이루어지는 공간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은 현실적이긴 해도 일상과 완전히 차단된 중성화된 공간이다. 미술 또한 오로지 작품에 집중하기 위해 화이트 큐브라는 무균실 같은 공간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한 이상적 공간은 큰 자본이나 기술이 투자되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에서 이상 공간을 구현하려 한다. 정헌조의 작품은 자신이 정한 게임의 원칙을 일관되게 관철한다.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최선을 다해서 완벽히 정제된 형상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고 말한다. 가로나 세로의 선들을 중첩해서 화면을 만들어 가는 그의 작품에 또 하나의 그리기 도구는 지우개다. 지우기와 그리기는 그와 어울리는 짝패인 채우기와 비우기를 낳았다. 종이 위에 구현되는 환영의 세계에 오랫동안 몰입하는 수행같은 작업들은 궁극적으로 허구와 실체의 관계를 묻는 과정이다. 



김범중-기계적 반복을 상쇄하는 또 다른 반복 


김범중의 작품에서 일정한 넓이를 가지는 수직의 면들은 수많은 수평선의 결로 채워진다. 수직면들의 가운데 부분은 빛이 시작되는 또는 사라지는 듯한 모습이다. 바탕인 종이 색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그은 연필 선은 어둠을 낳지만, 그 어둠은 고정되지 않고 미세하게 유동한다. 수평선 부근에서 밝기의 분포가 달리하면서 고요한 가운데 울림을 준다. 그의 작품은 연필 선 긋기의 밀도를 통해 밝은 바탕이 드러나는 정도가 다르다. 화면의 밝기는 선의 밀도에 달려있다. 마치 블라인드의 각도를 조절하는 끈처럼 공간에 빛이 스미는, 또는 어둠에 잠기는 정도는 달라진다. 빛과 어둠, 수직과 수평적 요소의 관계를 통해 해가 뜨고 지며, 그 사이에 하늘의 밝기가 서서히 변화하는 매일의 극적 사건이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로 매번 재연된다. 정적인 조형 요소가 주도적인 가운데, 최소한의 방식으로 그것이 작동 중임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앰비언트(ambient) 음처럼 공간 전체에 나지막이 지속되는 파동과 같다. 편재하는 음(音)은 그의 작품의 주요 요소였고 그것이 흐름을 표현하기 적합한 선적 표현을 낳았을 것이다. 대개 크지 않은 그의 작품은 밀도와 정교함이 특징이다. 연필을 쥔 손의 압력에 의해 두툼한 종이 표면의 질감 또한 가세한다. 




내부로 파고드는 작품이다 보니 대개 형태는 단순하다. 색은 연필 선이 만들어 내는 흑백의 계조로 대신한다. 선후 관계가 어떻든 그의 공(共) 감각적인 연필 드로잉은 악기나 악보같이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공명을 지향한다. 일상에 편재하는 잡음을 조율하여 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음에 대한 관심을 드로잉으로 풀어가는 작품에는 시간적 감각이 새겨진다. 에바 헬러는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검정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은 검정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블랙은 종말이나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신학적 철학자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말하듯이,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감각은 그에 상응하는 고독한 주체의 시간에 의해 구현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나의 고독은 죽음을 통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깨어진다.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더욱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 


절대적 타자와 접속하는 듯한 작업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을 ‘죽인다’. 시간 자체가 죽음과 연관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시간의 의미화 방식은 죽음의 신비라는 그 특징을 통해 하나의 우회로를 만든다. 죽음이란 단순한 무가 아니라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한 선 한 선 더해지는 과정은 유기체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호흡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르지만, 시간을 고정시킬 수 없듯이 차이는 생겨난다. 처음에 확실했을 수직선은 선이 하나둘 공간을 채우면서 흐릿해진다. 시간은 팽팽하게 당겨진 선과 매끈한 표면에 미세한 주름을 남긴다. 위 또는 아래로 빛을 발하는 수평선 인근은 시작의 팽팽함이 유지된다. 에바 헬러는 검정이 물체의 경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고 했지만, 무수하게 그어진 선들은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밤새며 헤아렸을 선들은 일상의 기계적 반복을 상상력으로 무화시키는 또 다른 반복을 실행한다. 예술적인 것에 고유한 후자의 반복은 내적 감각들의 다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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