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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아르코 신진 작가 워크숍

이선영


1. 타자와의 소통-류윤희, 심아빈, 이선희

① 류윤희
 세계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오랜 외국 생활은 타자와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설정해야 하는 계기이자 시험무대가 된다. 그것은 단지 문화를 넘어 생존의 문제, 즉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오랜 타지 생활을 한 류윤희에게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과 소통은 각성을 야기하는 자극이자 감내해야할 고통으로 다가온다. 타자가 적대적으로 다가올 때 나는 웅크린다. 작품 [안락을 위한 연습]은 외부로부터의 두려움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이다. 여기서의 독백은 [나와 나 사이의 거리]처럼 나와의 대화가 된다. 작품 [대화]는 나에 머물지 않고 6명의 서로 다른 국가의 친구들과 실뜨기를 하면서 대화한다. 실뜨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보편적인 놀이이며, 붉은 색은 핏줄을 연상시킨다. 몸과 몸이 마주해야 하며, 실체가 아닌 관계에 의존하는 실뜨기 놀이는 부인할 수 없는 타자의 현존을 일깨운다. 작가는 실 사이에 ‘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라는 질문을 삽입한다. 각각의 다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손으로 쓰는 장면이 나오는 작품 [너로부터]는 그에 대한 답을 예시한다. 나는 타자로부터 왔다. 물론 타자와의 만남은 작품 [moment]처럼 순간적이다. 오늘날 나와 타자가 만나는 공동체는 ‘어떤 가치로 한 묶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다수들’에 근거를 두며, ‘타자와 차이의 발견으로 지속’(블랑쇼)된다. 이 역설적 공동체는 인간 사이의 단수적 관계에 기반 한다.

② 심아빈
많은 유학생들처럼 심아빈 역시 타국생활을 계기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질문이 심각한 단계로 진입했으며, 약간의 공백기를 거치고 다시 작업에 몰두하게 된 지금도 자신에 대한 질문은 유효하다. 상상 및 상징적 구조를 통해 만들어지는 자아와 주체는 언어적 환경과 밀접하다. 언어는 나를 사회적 구조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하지만, 그자체가 많은 갈등을 야기하는 문제적 실체, 또는 관계이다. 유학생활은 타자의 장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의 여정을 성인이 되어서 다시 반복하게 하는 고난이자 도전이다. 작가는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 소통을 시도한다. 이 대안의 소통이 바로 예술이다. 나를 상징하는 동그라미와 타자를 상징하는 세모가 이야기를 이끈다. 심아빈의 작품에서 세모와 네모는, 구성주의자 El Lissitzky가 구사했던 조형 언어와 비교된다. 리씨츠키가 혁명기 러시아의 역사적 비전을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심아빈은 자기만의 솔직한 이야기를 이끄는 모듈로 삼는다. 그러나 자기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에서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고 작동하며, 신(神)이라는 절대적 타자까지 포함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과는 금기, 그리고 앎에의 의지가 낳은 금기 위반의 충동과 욕망을 상징하는 도상이다. 차분하게 잘 정돈되어 있는 영상과 드로잉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대답을 위한 어법을 갖추고 있다.

③ 이선희 
이선희는 자기 작업의 키워드가 ‘행복, 위안, 치유’라고 말한다. 명확한 목표와 계획, 그리고 방법론으로 한 코 한 코 한 땀 한 땀 착실하게 엮어가는 그녀의 작업은 선한 계몽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을, 위안은 고통을, 치유는 상처를 이미 내포한다. 가령 조각 기구인 날카로운 해바라기 날을 캐스팅하여 만든 작품 [해바라기]는 ‘불안했던 내 맘을 치유코자’ 한 것인데, 여기에서 고통의 원인과 결과, 질문과 해법은 동시적이다. 요컨대 작업을 하는 삶 자체가 불행, 고통, 상처를 야기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작가이기에 작업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문자언어를 적극 활용하는 형식 또한, 문자가 소통의 기본이면서 동시에 장벽을 야기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텍스트로서의 작품을 강조하는 문자 매체에서 보다 주목되는 것은 문자라는 추상적인 소통방식에 작가가 부여한 온기이다. 자연에서 얻은 송진으로 만든 작품부터, ‘우리’ ‘me’ ‘you’라는 단어를 실로 짠 작품이 그렇다. 실로 짜면 문자의 가독성은 많이 떨어진다. 지인들의 옷들을 잘라서 뜨개질하고 갤러리를 온기로 덮어버린 작품은 아예 언어가 사라지고 언어의 불투명한 물질성만 남는다. 언어를 매개로한 투명한 소통이라는 이상 보다는, 반복되는 해독을 야기하는 무언의 기호 또한 ‘치유’에 효과적일 수 있다.

2. 몸의 확장-장성은, 김수현, 김홍빈, 김보아

① 장성은
 장성은의 작품은 공간과 인체의 관계에 대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관계를 다룬다. 이때 인체는 척도와 측정 단위가 된다. 여기에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또한 포함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라는 구체적 기준이 점차 모호해지는 시점에서 인간의 척도로 이해될 수 있는 공간들은 정겹다. 이 인간적 공간에는 인간의 소유물인 사물들 역시 척도에 가담한다. 실내나 골목 같은 구체적 생활공간과 측정 기준이 모호해지는 대자연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반경은 광대하다. 재현으로 대표되는 추상적인 좌표계는 오늘날 생산과 소비라는 시스템으로 무한 복제되면서 인간을 하나의 점들로 코드화 시켜 유통시킨다. 그래서 추상적인 공간에 대항한 구체적인 자리 잡기의 문제는 거시권력과 미시권력 간의 투쟁이 되었다. 일상의 동작을 매우 천천히 반복하는 작품은 기능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소격시킨다. 액션과 리액션으로 이루어진 자못 필연적인 장면들에는 무의미와 부조리가 내재해 있다. 하나의 피아노 건반에 많은 사람들의 손을 끼워 맞춘 작품이나 사물이 들고날 수 없는 좁은 문 같은 구조는 추상적인 공간 속에 인간적 척도의 사라짐을 말한다. 플라스틱 과일로 샤르댕이나 세잔의 정물화 구도를 채운 [contemporary still life]는 메멘토 모리나 바니타스라는 정물화의 전통적 알레고리를 계승하면서, 정물의 주인공인 인간 역시 사라지고 있음을 예시한다.

② 김수현
김수현의 작품은 인체를 주먹밥 모양으로 뭉치거나 데칼코마니처럼 대칭형으로 펼친 풍경(bodyscape)을 보여준다. 꼭 인체의 곡선과 산등성이의 선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풍경은 늘 인간을 떠오르게 하며, 인간에게도 풍경이 발견되곤 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인간과 인간을 합쳐지게 하는 힘, 밀치게 하는 힘 등이 작동한다. 이 힘은 생물학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인간을 뭉치게 하는 힘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힘(권력)은 양가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남녀가 엉켜있는 포르노그래프 같은 이미지는 외설적이기도 하고 유희적이기도 하다. 작품 속 인간들은 뭉쳐진 상태이지만 각각의 색을 유지한다. 개별적 단수로 존재하는 개인들을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은 견고한 덩어리라기보다는 일시적 집합체이며, 다르게 작동하는 힘에 의해 다른 개체들과 또 다른 일시적 하나를 이룰 원소처럼 보인다. 다소 장식적으로 보이는 색깔들이 하나 속 다수를 강조한다. 대칭적으로 펼쳐진 인체 이미지는 무성생식의 이미지가 있다. 차이의 만남이 아니라, 동일증식 집단을 이루는 인간들은 코드처럼 복제된다. 기계의 법칙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 기괴한 느낌이 든다. 기괴함은 병적이면서도 경이롭다. 가령 데칼코마니 같은 신체 이미지는 선천성 기형의 하나인 이중체를 떠오르게 하면서도, 야누스 같은 지혜의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③ 김홍빈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미술에 회의를 느끼고 낙향하여 귀농까지 했다가, 다시 작업에 몰두해온 김홍빈에게 예술가 및 예술의 의미는 작업의 출발점에 놓이는 선험적 가치가 아니라, 언제 도달될지 모를 목적에 놓인다. 특히 그는 자신이 남성이라는 무거운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예술이 필연이 아니라 잉여 및 장식으로 여겨져 온 어느 때고 예술은 여성화, 또는 연성화 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남성이라는 사실, 더구나 남성 예술가라는 사실은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그자체가 의문시되는 것이다. [군대 가기 싫어서 형이랑 나랑 했던 짓]을 비롯한, 젠더 바꾸기 게임에서 그가 연출하는 뒤집혀진 세계는 불온한 기운이 가득하다. 예술계는 여성화, 연성화 되어있지만 예술가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가부장적이다. 그래서 남성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수의 몫을 차지해왔다. 그것조차도 이미 기득권을 챙긴 기성세대의 사정이기에, 가부장적 가정 자체를 소격시킬 필요가 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진보와 새로움, 독창성 등에 내재된 남근 중심적 이데올로기이다. [슈퍼 히어로], [슈퍼 히어로 아님] 같은 풍자적이고도 역설적 제목의 작품들은 남근에 얽힌 음란하고 불량하며 자기 노출적인 언사로 가득하다. 고난 끝에 슈퍼히어로가 되었으나, 막상 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의미심장하다.

④ 김보아
조각과 더불어 언론정보학 까지 부전공을 한 딱 부러진 작가 김보아는 짧은 작업 이력 안에 미술사의 계통발생을 축약적으로 반복하는 빠른 진도를 보여준다. 초기 작업은 골판지로 만든 방과 가구 같은 형태로, 여러 명이 좁은 공간을 나누어 쓰면서 서로의 행동반경이 영향을 주고받는 임시방편적 거처들을 구조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다. 비록 일회성 재료지만, 건축적 구조를 가지는 작품은 명확한 설계에 따른 합리적 실행이 중요하다. 부지런히 머리와 손을 움직이며 스펙터클하게 공간을 장악해 가는 근대적 스타일은, 2011년 ‘오래된 집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포스트 모던한 방식으로 바뀌게 된 듯하다. 이를테면 투명한 구조적 논리에서 불투명한 상황적 흐름으로의 변모이다. 얼룩과 곰팡이로 가득한 벽으로 둘러싸인 성북동의 낡은 집에서 장소특정적인 작업을 진행했던 작가는 유적지와도 같은 폐허의 공간에서, 무균의 실험실 같은 화이트 큐브 속 존재감을 뽐내는 예술작품이 아닌 알레고리 가득한 사물을 연출했다. 낡은 철망이나 폐동전 등으로 만들어진 인물들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문맥 속에 있다. 작가는 이전 작업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고려하기 보다는 논리적 인과관계대로만 실행해왔다고 반성한다. 이제 논리보다는 직관을, 매뉴얼보다는 즉각적인 작업에 경도 되어 있는 태도 변화는 삶 속에 스며드는 작업을 하겠다는 표명이다.

3. 안과 밖 사이의 경계-박종호, 전윤정, 정경자

① 박종호
거울의 거듭된 반사를 이용해서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박종호의 작품은 거울, 또는 오랫동안 거울의 유비였던 캔버스에 갇혀 있다. 극사실적으로 잘 그렸지만, 중간 톤이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그림은 진공상태처럼 현실감이 없다. 비록 그것이 작업실에서 그림에만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반영한 현실일지라도 말이다. 보고 보이는 관계 속에서의 차이들은 결코 일치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다가가도 언제나 현실은 저만치 미끄러져 가고 언어라는 빈 그물만이 뭔가 포획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다. 작가는 아예 그러한 간극 자체를 표현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그림, 재현에 대한 재현 등이 나온다. 메타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다보니 자화상도 끝없이 그리는 손으로만 변해 버렸다. 이 물화된 주체는 붙잡을 수 없는 실재와 쌍둥이 분체이다. 모더니즘은 지시대상을 괄호치고 언어에만 집중함으로서 모순을 해결하려 했다. 그래서 언어적 통일성, 즉 작품의 질적인 면과 순도를 확보했지만, 허무주의 및 현실안주와 구별될 수 없는 세련된 동어반복에 머문다. 더 나아가 동어반복은 장식화 된다. 스스로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의 자기위안이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역기능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도 유효한가? 언어는 새로운 현실과 조우할 때 재현을 넘어 생성된다. 그가 바다 같은 현실계를 만나서 최초의 탄성 같은 언어를 창조하기를 바란다.

② 전윤정
흰 바탕에 검은 선들이 얹혀있는 전윤정의 작품은 종이 위에 펜으로 끄적거린 것 같은 드로잉의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에 기대는 듯하다. 그러나 펜에서 라인테이프로 ‘필기구’를 옮긴 이후 유기체의 분비물 같은 자연발생성은 사라졌다. 붓과 필력으로부터 벗어난 이러한 작품들을 작가는 ‘불편한 드로잉’이라고 말한다. 분절된 선과 선의 관계는 타인들 및 사회와의 불편한 물리적 심리적 관계를 하나하나 집적시킨다. 쌓이는 것과 그리는 것은 다르다. 잘라서 덧씌우는 꼴라주 방식은 환영에 호소하는 재현의 체계와 다르다. 그것은 인간적인 희로애락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의 쌓임, 응어리, 맺힘, 그리고 풀어헤쳐 펼쳐내고 다시 엮어야할 관계망, 그 흔적들이다. ‘드로잉’의 단위를 이루는 여러 굵기의 검은 촉수들은 캔버스를 넘어 벽이나 가벽을 향해 확장된다. 어떤 공간 속에 위치함으로서 생겨나는 불편함은 자신의 자리를 창출하려는 구체적 몸짓이 된다. 추상적인 좌표계 속의 점들이 만들어내는 압박은 바깥에서 물고 온 재료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새의 둥지 같은 선적 흐름에 의해 무화된다. 그림자 같은 검은 실루엣은 중첩된 덩어리로 물질성을 확보한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는 유아독존식 존재의 증명이 아니다. 라인 테이프들 사이의 시공간적 간격들은 시각으로부터 몸으로,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열리는 트임이 있다.

③ 정경자
정경자의 작업은 참조대상이나 지시대상과의 유착관계가 인정된 매체이면서도,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돌아다니는 사진의 모호한 특성이 최대로 발현되어 있다. 사진이 가지는 정확한 증거능력은 시공간의 절편이라는 태생적 한계 및 특성에 의해 정반대의 것으로 뒤집어지고 만다. 작가는 단편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어 이야기를 시도하고, 관객에게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확한 인과관계로부터 풀려난 시공간의 단편들을 편집하기를 기대한다. 현대인의 시각적 무의식에 큰 영향력이 있는 사진이나 영화의 작동 방식 자체가 그러하다. 작품 [거울 속의 거울]은 제목처럼 실체가 불확실하고 반영된 단편들만이 확실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 정경자의 작품에서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편의 형식은 유기적 총체성이 와해된 죽음의 이미지나 덧없음의 메시지와 연관되곤 한다. 기억 뿐 아니라 지각 또한 파편적이다. 여자의 몸이나 자신이 살던 집의 부분들을 찍은 사진들은, 유기적 총체성의 환영을 강화하면서 질서 감각을 만들어내는 몸이나 집의 경계를 와해시킨다. 혼자 있는 사람을 멀리서 흐릿하게 찍은 작품 역시 주변과 구별이 안 되는 파편성으로 인해 개체의 동일성과 항상성이 와해된다. 이 모두는 단절과 죽음을 떠오르게 하지만, 작가는 입자처럼 헤쳐 모이게 배열한 단편들을 통해 유기적 총체성에 결핍된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4. 도시의 풍경들-박경작, 서화숙, 김은숙, 홍원석

① 박경작
박경작의 [침묵] 연작은 육중하고 어둡고 무게 중심이 잡힌 덩어리가 아래에 자리하며 그 위로 강렬한 영기(aura)가 뻗쳐오른다. 그런데 진한 밀도를 가지는 검은 덩어리는 기하학적인 건물의 실루엣이기에 빛과 어둠의 폭발적 대비는 묵시록적으로 다가온다. 근대 아방가르드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갱생과 종말 전야의 퇴폐 및 묵시록의 기호들이 명멸했다. 그들의 진보주의는 나와 세계 사이의 대립을 비롯한 이분법을 전제로 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작가로서는 동화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바벨탑처럼 높이 올라간 스카이라인은 금 새 라도 먼지나 재로 내려앉을 듯, 연기로 날려갈 듯 비현실적이다. 번잡스러운 생산과 소비의 장일 인공적 풍경은 빛 때문에 더욱 어둡다. 풍경은 빛과 어둠 사이의 중간 스펙트럼이 생략되어 있다. 즉 삶을 이루는 일상의 구체성이 스펙트럼 양 극단의 대조 속에 자리를 잡지 못한다. 도시의 야경이나 금융가의 고층빌딩 등은 그림자나 안개, 구름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대신 무의미함과 공허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작가는 도시풍경 이면과 너머를 멀찍이서 다소간 초월적으로 바라보면서, 불현 듯 다가오는 깨달음과 현현(epiphany)을 캔버스에 옮긴다. 그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시대의 번영과 공해를 낳는’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정신성과 영성’을 언급하며, 작가로서 당면한 개인적 고난과 시대의 과제를 중첩시킨다.

② 서화숙
온통 하얀 칠을 한 얼굴들은 마치 마스크를 쓴듯하다. 서화숙의 작품에서 양 손바닥만한 작은 면적에 수 백 개의 근육이 깔려 있는 미묘한 얼굴은 또 다른 판으로 재 조직화되기에, 전통적 인간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읽기가 필요하다. 작가가 참조한 일본의 부토는 자신의 영혼만을 보여주기 위해 얼굴에 칠을 하지만, 서화숙 버전의 하얀 얼굴들은 마스크를 쓰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유비이다. 마스크 뒤에는 본질이 있을까? 인체의 경계가 와해되고 리좀의 방식으로 접 붙어 있는 몸들은 경계를 가지는 본질로서의 몸이 해체되어 있다. 마스크 같은 얼굴처럼 몸 역시 내부와 외부를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표면으로 출렁거린다. 몸이 아플 때 뜨는 부앙의 흔적은 표면으로 변모한 신체의 병적 증후를 강조한다. 그러나 정상과 병리의 기준 역시 모호해지는 시점에서, 몸 표면의 확장이나 몸 원소의 확산은 죽음의 기호이자 열락의 기호가 된다. 또 다른 작품군은 생활인의 동선이 좀 더 반영된 편하고 맘에 드는 장소를 부담 없이 찍은 사진들이다. [풍경 2010-2011] 시리즈는 머물고 싶거나(집) 가고 싶은 장소(야구장)를 찍었다. 그중에서 한강 나들목의 터널이나 통영의 해저 터널을 찍은 작품은 터널이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과연 이곳을 통과해서 그곳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양파 껍질 같은 몸-얼굴 풍경처럼, 도시 풍경에는 쓸쓸한 표정이 있다.

③ 김은숙

아파트, 광고 포스터, 쇼핑백, 은행 전표 등, 김은숙이 다루는 소재의 공통점은 기표이다. 물질적 지시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호가 순차적으로 기의마저 탈각시킨 후, 원소와도 같은 가벼움으로 이합집산 하여 또 다른 우주를 만든다. 그 우주는 실체 대신에 추상적 관계만 있는, 무한히 표피적인 세계이다. 독일어로 ‘설치물’이라고 하는 [hochhaus]에서 작가는 아파트들을 도미노처럼 세워 놓았다. 오랜 독일 생활로 낯설어진 한국의 아파트 풍경은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전 국민의 반 이상이 살고 있으며, 시공사의 상호와 야광 장식 조명까지, 한국의 아파트는 집이라는 원초적이고 실체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상품이자 기표(브랜드)이다. 그것은 거처보다는 투자처이기에 도미노 같은 경제의 연결망을 따른다. 2010년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전시 포스터로 종이 백을 만드는 작업 역시 알맹이보다는 포장, 무엇을 담는가하는 근본 목적 보다는 단지 실어 나르는 수단만이 강조된 기표의 성질을 이용한다. 은행 명세서 또한 상품이자 자본이 죽 펼쳐진 광경인 스펙터클 사회의 기표 중 하나이다. 기 드보르가 말했듯이 스펙터클을 추동하는 기표의 자율적 운동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2007년 광고판 형식으로 많은 전시회 광고를 축구장 광고 형식으로 배열한 작품은 예술 역시 상품, 즉 기표의 강제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려준다.

④ 홍원석
바다 속이나 먼 우주를 떠오르게 하는 깊은 검푸름, 그리고 태초의 빛처럼 어둠을 가르는 택시의 노란 헤드라이트는 회화의 표면을 개인의 환상이 펼쳐지는 광대한 영사막 같은 장으로 만들곤 했다. 홍원석의 작품에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택시는 유목의 상징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처럼 늘 상 제자리로 돌아올 유목일지 모르지만, 지금여기를 떠날 수 있다는데, 그리고 떠날 수 있다는 기대를 주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다. 그에게 택시는 지금여기의 붙박힌 삶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또는 착종된 질서를 휘저을 수 있는 매력적인 미디어이다. 게다가 그 미디어는 개인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상징을 가진다. 몇 년 전부터 그는 자비로 구입한 작은 중고차를 개조하여 ‘아트 택시’를 운영하면서 개인의 실존적 세계에서 공공의 세계를 향해 직접 뛰어든다. 부산, 청주, 제주, 영천, 그리고 서울에서 ‘홍반장의 아트 택시’를 매개로 만난 공공영역(public sphere)은 작업실과는 다른 행동주의의 무대이다. 실제 굴러가는 택시는 보다 장소 특정적이고 상호작용적이다. 그래서 더욱 실험적이다. 공공영역에서의 소통은 회화 못지않은 창의력과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사회적 상상력이 더해져야 한다. 공공작업의 관건은 어떤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있다. 도시의 불특정 다수와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5. 시네티즘-정효영, 홍기원, 신승연, 김성대

① 정효영
정효영의 설치와 드로잉은 오감의 기억을 재연하는 장이다. 피부 톤의 인조가죽을 손바느질로 연결하여 모터 장치를 해서 연속되는 움직임을 낳는다. 그것들은 기계이면서도 신체이며, 신체이면서도 유기적이지 않다. 이질적 단편들이 엮이고 접속되어 이름 모를 실체로 변환된다. 기계장치에 의해 연동되어 움직이는 작품들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기억에 의해 현재에서 단번에 과거에로 이끈다. 일상을 지배하는 연속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은 단절되고 도약한다. 다소 어둡게 조명된 무대인 연출된 소우주가 날선 쇳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하면 지금여기는 그 때의 그곳으로 변화한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듯한 거슬리는 기계소리는 불안과 공포의 느낌을 배가한다. 붉게 조명된 설치는 놀이동산 같으면서도 고문 기구 같은 음산함이 감돈다. 잊혀진, 또는 애써 잊은 과거는 정확히 재현 된다기보다는 현재와 공존하며 공명한다. 공명은 희미한 또는 강렬한 진동을 낳는다. 작가에게 기억은 온몸에 새겨져 있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정효영은 아픈 엄마, 심술 맞은 여선생 때문에 어린 나이에 슬픔과 고립을 진하게 체험했다. 최초의 트라우마는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한 상황에 맞딱뜨려 비슷한 공포, 그리고 자기 방어를 낳는다. 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공격본능은 방어본능의 일환이다. 모든 것이 처음인 어린 시절은 밝음을 더욱 밝게, 어둠을 더욱 어둡게 기억한다.

② 홍기원
단조롭게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예쁘게 색칠된 형태들과 그것들의 움직임은 공간에 그려진 입체적인 회화이자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홍기원은 자신의 작품들을 디즈니랜드와 비교하고 있으며, 디즈니랜드 자체가 하나의 갤러리라고 생각한다. 디즈니랜드가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고객들의 동선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는 상업시설인 것과 달리, 예술로서의 놀이터는 시공간에 대한 보다 실험적인 조합에 중점을 둔다. 물리적, 관념적 환영을 낳는 조각적 덩어리는 ‘연극적인 실험’을 위한 장으로 분해되고 펼쳐진다. 그러나 홍기원의 작품은 연극의 장이 되기에는 인간적인 비유 및 규모와의 연계가 남아있다. 미술사에서 논구된 미학적 어법으로서의 연극성(theatricality)은 (인간적)대상이 보다 느슨한 지각의 장으로 흩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형태나 동작은 그저 시각적으로 보여지기 보다는, 몸과 결합해서 또 다른 지각의 체험을 낳는 환경의 스케일로 변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건을 들고 하는 줄넘기 같은 동작이 나오는 작품은 상징과 비유를 넘어, 몸과 사물의 복귀를 예시한다는 점에서 연극적이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던 경험이 있는 작가는 기계와 몸,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기능성과 비기능성 간의 관계를 탐색해 왔다. 스스로 파괴되는 기계를 만든 팅글리의 키네틱 아트처럼, 목적이 결여된 기계가 바로 예술이다.

③ 신승연
조소를 전공했지만, 미국에서 ‘아트 앤 테크놀로지’를 공부한 신승연은 ‘조각가’라는 말이 어색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어색함이 표면적인 것은 아니다. 미디어는 조각의 전통적인 기준이었던 인간중심주의를 확장, 또는 해체해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휜 거울이 등장하는 작품처럼 반영은 구성이고, 구성은 동시에 해체이다. 디지털 매체가 추동하는 폭주하는 속도와 양은 인간적 스케일은 물론이고, 인간의 기억과 지각의 템포와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작가는 전기 전자 미디어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조각과 결합시키며, 예술작품의 영원한 원천이었던 자연과의 유대 또한 끊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가 염두에 두는 자연에는 SNS 등 정보의 바다 또한 포함된다. 미러와 모터가 결합된 작품은 등굣길에 지나치곤 했던 넓은 호수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자연을 반영하는 거울을 모듈로 조각내고, 자연을 움직이는 구조적 힘과 유비될 수 있는 기계의 리듬과 결합시킨다. 작품 [waving mirror]는 스테인레스 미러 아래에 모터를 장착하여 움직이게 한다. 중력이나 바람 같은, 호수의 반사면을 가능케 했던 자연의 물리적 요소는 정보화되어 상호작용한다. 반사면의 변화는 순환되는 빛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 달리 어둠속에서 작동하며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들린다. 자연과 예술, 예술과 과학기술 간에 벌어진 차이는 줄어들지 않는다.

④ 김성대
김성대의 작품은 치밀한 계획과 노동에 의존하는 금속조각에서,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한 흙 설치 작업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빛이라는 요소는 여전하다. 빛은 공간적 중심을 재현하다가 시간적 흐름을 제시하는 일과성의(temporarily) 매체로 변화한다. 뿌연 안개 속에 보이던 창밖의 야경, 큰 나무가 서있던 들녘의 빛의 산란은 그의 감수성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마치 태양처럼 작품의 핵심에 있으면서 맥락에 따라 다양한 상징으로 변모한다. 지구의 모든 것이 태양과 관련되어 있는 한, 빛은 단순히 자연의 한 요소가 될 수 없다. 태양 빛은 써도써도 고갈되지 않는 천혜의 선물로, 다수 민족의 상징적 우주를 충만하게 비추어 왔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은 무궁한 에너지의 원천을 다수의 경쟁을 야기하는 희소가치로 변질시키는 잘못된 ‘진보의 역사’를 밟는다. 산에 담겨 있는 생명을 표현했던 [산]시리즈와 달리, 최근 작업에서 빛은 생산력의 진보가 낳은 자연의 고갈을 고발하는 냉랭한 기운이 있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자연의 반작용은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갈라진 틈이 확연한 지진이나 가뭄의 이미지는 자연의 탓만으로는 돌릴 수 없는 문명의 흔적이 있다. 금속조각이든 흙 설치물이든 틈새로 보일 듯 말 듯 새어나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보다 큰 시간의 주기 속에서 의미 깊을 구원의 빛을 떠오르게 한다.

출전; 2012 아르코 신진작가 워크숍(아르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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