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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용 / 꿈, 하이퍼텍스트의 한 갈래로 열린

고충환

꿈, 하이퍼텍스트의 한 갈래로 열린



철탑 꼭대기에 번지점프대가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하나둘 철탑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 종이처럼 얇은 몸을 가진 다크서클이 인상적인 여자가 있었는데, 내안의 공포가 외화된 것이었다. 내가 먼저 뛰지 않으면 아무도 못 뛸 것 같아서, 나는 뛰어내리는 대신, 사실상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공포와 키스를 했다. 그렇게 키스를 하자 공포는 나의 신부가 되었다. 


범진용의 꿈 일기를 각색한 것이다.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원안 그대로이다. 어차피 꿈 일기 자체가 꿈 그대로를 옮겨 적을 수는 없는 일이다. 꿈이 꿈 일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각색이 일어난다. 꿈 일기는 꿈을 재현한 것일 수 있고, 이를 재차 그림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또 한 차례 각색이 일어난다. 그렇게 꿈을 재현하는 동안 이중삼중의 각색이 일어난다. 따라서 꿈을 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차연과 산종을 위한 형식실험의 장일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무슨 일을 밝혀줄 궁극적인, 최종적인, 결정적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다만 미미한 차이를 가진 어슷비슷한 의미들의 끝없는 연쇄가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최종적인 의미는 계속 미끄러지면서 연기될 뿐. 그래서 다시, 꿈을 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다른 의미들을 파종하는, 무수한 어슷비슷한 다른 의미들을 생성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서사들의 연쇄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꿈일기 드로잉_charcoal on canvas_140 x 830cm_2014(부분)


그래서 꿈을 꿈 일기로 재현하고 그림으로 각색하는 작가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 최초의 꿈 자체가 현실과는 다른 아님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서사를 열어놓고, 꿈의 재현이며 각색이 이와는 또 다른 서사 내지 차이나는 서사를 열어놓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꿈을 재현하고 각색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서사의 보고를 여는 일일지도 모르고, 억압된 서사며 잠재적인 서사의 봇물을 터주는 일일지도 모르고, 자유자재로 하이퍼링크 되면서 다른 서사며 차이나는 서사를 불러들여 기왕의 서사를 부풀리는 일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사통팔방으로 열리고 닫히는 하이퍼텍스트를 여는 일일지도 모른다. 억압된 서사며 잠재적인 서사? 꿈은 억압된 욕망의 우회적인 실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욕망의 처벌이라고도 했다. 욕망(아님 유혹)과 처벌이, 자아와 초자아가, 얼터에고와 아버지(내가 죽여야 할 자)가 날실과 씨실이 돼 하나의 서사를 직조하는, 서사의 직물이 꿈이다. 


하이퍼링크?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리얼? 꿈은 하이퍼리얼한 세계를 여는 행위이다. 나는 욕망을 지향하고 현실(아님 제도. 그 자체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은 욕망을 억압한다. 그렇게 욕망은 현실에 연동된 것이며 현실에서 건너온 것이며 현실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욕망이 억압되고 잠수를 타면서 현실이 왜곡된다. 그렇다면 현실은 왜 욕망을 억압하는가. 말하자면 현실은 왜 욕망을 파생하는가. 현실은 꼭 필요한 분량의 욕망을, 불안을, 억압을 자기 변방에 거느리고 있어야 한다. 현실에 문제가 생길 때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희생양을 예상되는 폭력에 내어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다. 그렇게 욕망은 존재론과 사회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체제의 안정과 체제의 불안을 싸안는다. 말하자면 제도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욕망을 억압하고,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혁명의 불씨가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꿈은 그 자체 진정한 현실일 수 있는 욕망의 파노라마일지도 모르고, 리얼한 세계보다 더 리얼한 세계일지도 모르고, 따라서 하이퍼리얼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꿈이 재현해 보이는 서사는 친근하면서 낯선데, 꿈이 현실을 모방 내지 반영한 것이기에 친근하고, 꿈속에서 현실이 재편되고 재구성되기에 낯설다. 그렇게 꿈은 리얼한 세계를 넘어 하이퍼리얼한 세계를 열어놓는다. 


다시, 처음의 꿈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작가도 밝히고 있듯,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작가의 무의식이 육화되고 체화된 것이다. 말하자면 철탑을 오르는 사람들은 어두운, 두려운, 어려운, 껄끄러운 순간들이 실체로 화한 것이다. 이 서사의 주연이랄 수 있는 종이처럼 얇은 몸을 가진 다크서클이 인상적인 여자는 공포가 그리고 유혹이 외화된 것이다. 공포와 유혹? 욕망과 처벌? 그 여자(어머니)는 원래 나의 애인이었다(상상계). 그리고 아버지가 개입되면서 나는 애인을 아버지에게 내어주었다(상징계). 그럼에도 여전히 그 여자는 내 마음속에 애인으로 남아있다(실재계). 여자가 동시에 공포와 유혹을, 욕망과 처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작업실_ink on canvas_117 x 91cm_2014


해서, 나는 억압된 욕망을 보상받고 싶다. 억압된 쾌락원칙을 회복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친부살해는 피할 수가 없다. 친부살해?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그렇고,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가 그렇고,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리즘이 그렇고, 질 들뢰즈의 욕망이 그렇고, 자크 라캉의 실재계가 그렇다. 그렇게 친부를 살해한, 쾌락원칙이 자기를 실현한, 한바탕 혁명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다만 황량한 사막에 스산한 바람이 불 뿐,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너무 알려고 들지 말고 캐려고 들지 말라. 알아봤자 사막이고, 그마저도 체제 아님 제도와의 숨 막히는 숨바꼭질 속에서 호기심이 파멸을 부를 수도 있는 일이니. 여하튼 그렇게 여자는 나에게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면서 유혹의 대상이었다.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두 인격이 합체된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공포와 유혹이, 친근한 것과 낯선 것이, 캐니와 언캐니가 그렇듯, 사실상 하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시절에 그림은 사실상 그림책이었고 이야기책이었다. 그래서 사계와 같은 자연현상이며 불안이나 질투 같은 심리현상이 모두 사람형상으로 그려졌었다. 그리고 그렇게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 사랑과 죽음의 알레고리, 천상의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알레고리와 같은 알레고리화들이 그려질 수가 있었다. 그 숨은 의미를 모르면 볼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행간읽기와 이면읽기가 필수였고, 따라서 그 속에 이미 어느 정도 하이퍼텍스트의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탈문맹인 시대에 꿈은 이런 또 다른 알레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꿈을 일기로 재현하고 그림으로 각색하는 작가의 작업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억압되고 잠재된, 사실상 무한정한, 또 다른 서사의 봇물을 터주는 계기가 되고 있기에 의미가 있다. 현대판 알레고리를 제안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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