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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 하나의 얼룩으로부터 파생된 생명, 우주, 존재

고충환

하나의 얼룩으로부터 파생된 생명, 우주, 존재



수전 손택은 자신의 사진론에서 베르겐 벨젠과 다하우의 유태인 수용소 학살 장면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자신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바꿔 놓았다고 회고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의 서정시는 불가능하다고 한 아도르노의 전언과도 통하는 회고다. 이처럼 우리는 대개 한 장의 사진이 전해준 충격과 감동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기억한다. 처음에 사진은 그랬다. 한 장의 사진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증언하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의 증인이었다. 


그리고 현대사진은 거짓말을 하는 사진으로 진화했다. 디지털 이후에 봇물이 터졌고, 어느 정도는 진즉에 아날로그 시절부터 그랬다. 여기서 거짓말하는 사진이란 그저 현실을 조작하는 사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현실적인 이미지는 물론이거니와 비현실적인 이미지, 초현실적인 이미지, 그리고 심지어는 없는 이미지마저 만들어내는 조형적 개입과 간섭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그런, 말하자면 일종의 조형사진으로 이해해야 한다.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렇다. 이런 변화와 통하는 것이 찍는 사진으로부터 만드는 사진으로의 또 다른 변화이다. 한마디로 조형사진과 연출사진을 매개로 현대사진은 현실은 물론이거니와 비현실과 초현실 그리고 관념 내지 상상으로나 존재할,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불가지적인 영역을 광범위하게 탐색하고 탐사한다. 이 탐색과 탐사는 거짓말이기는커녕 현실의 이면과 행간에 잠자고 있는 잠재적 현실을 캐내 현실을 확장하고 현실인식을 증폭시킨다. 



이호영_사이 #009_C 프린트_60×60cm


이호영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연출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고 연출된 이미지 그대로를 사진으로 옮긴다. 여기에는 디지털프린트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디지털에 의한 어떤 조작도 개입되지가 않는다. 현실 그대로를 찍지만, 그래서 현실을 증언하고 현실을 찍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아날로그 사진의 미덕을 간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 현실은 현실 그대로가 아니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연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불가지적인 영역을 탐색하는, 그리고 이를 통해 잠재적인 현실을 캐내고 발굴하는,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론 현실을 확장하고 현실인식을 증폭시키는, 그런 사진을 찍는다. 


이호영이 제안한 이미지를 처음 보면 추상회화 같다. 비대상 회화 같고 비구상회화 같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진이란다. 그렇다면 당연히 피사체가 있을 터이고, 이때의 피사체는 무엇인가. 작가는 피사체를 만들고 연출하는데, 페인트를 충돌시켜 그렇게 한다. 바트에 페인트를 채워 넣고, 바트 밑에서 바트에 담긴 페인트와는 다른 색 페인트로 채운 주사기로 페인트를 주입시킨다. 그러면 바트에 담긴 페인트와 주사기로 주입된 페인트 색깔이 서로 섞이거나 밀어내거나 충돌하면서 예기치 못한 다양한 표정의 문양이며 패턴을 연출해 보인다. 한 색깔이 다른 색깔 위에 덮이면서 부드럽고 엷은 피막을 형성하기도 하고, 한 색깔이 다른 색깔을 밀어내면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 스스로의 존재를 부각하기도 하고, 한 색깔이 다른 색깔과 섞이면서 간색의 영역을 만들기도 하고, 마치 수묵의 자연스런 번짐 효과와도 같이 패턴 가장자리로 희뿌옇게 번져나가기도 하고, 크고 작은 비정형의 기포를 형성시키기도 하는, 그리고 그렇게 부드럽고 유기적인 곡선으로 흐르는가 하면 때론 격렬하게 파열하는, 그런 이미지를 형성시킨다. 


이 이미지들은 다 뭔가. 이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이 이미지들은 흐른다. 느리게 흐르면서 끊임없이 다른 이미지로 이행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만 한순간도 고정돼 있지가 않다. 오랜 시행착오와 형식실험의 축적된 과정을 통해 최소한의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알 수도 없다.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진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적인 이미지도 고정된 이미지도 없다. 다만 흐르고 이행하는 이미지의 무한과정이 있을 뿐.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흐르고 이행하는 우연한 이미지의 한 순간을, 아마도 이거지 싶은 이미지의 한 찰나를 포착해 한 장의 사진으로 고정시킨다. 그러므로 사진 속에서 이미지는 비록 고정돼 있지만, 사실은 흐르고 이행하는 우연한 이미지의 무한운동이 한 장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잠재돼 있다고 봐야 한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이 예기치 못한 이미지를 통해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불가지적인 영역을 탐색하고 싶다. 존재의 비의를 탐구하고 싶고, 자신의 사진을 그 탐색과 탐구의 증거로서 제안하고 싶다. 자신의 사진으로 하여금 항상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며 이행하는 존재의 증거가 되고 싶고, 우연한 혼돈 속에서 존재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그리고 그렇게 생성과 소멸을 반복 순환하는, 그런 무한운동의 증거가 되고 싶다. 


또 다른 너의 존재. 페인트가 그려 보이는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이미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내맡겨진 것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우연에 맡겨진 것이지만, 일말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인해 사진 속 이미지는 알만한 어떤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신체의 단면을 연상시키는, 실핏줄 같은, 촘촘하게 짜인 신경 같고 신경다발 같은, 림프 같은, 백혈구 같고 적혈구 같은,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세포 같은, 해파리 같은 수생생물이 유영하는 것 같은, 그런 생명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 이미지들은 다 뭔가. 이 이미지들을 통해서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이 일련의 이미지들에서 작가는 생명이 유래한 미시적인 세계로 초대한다. 생명을 미시적인 세계로 소환한다. 그리고 그렇게 초대하고 소환된 미시세계로부터 또 다른 너의 존재를 예시해주고 싶다. 또 다른 너의 존재?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이고, 또한 그 실체는 어떻게 가시화될 수가 있는가. 일단 이 이미지들로 보아, 그리고 특히 이 이미지들을 규정하는 주제 내지 주제의식으로 보아, 작가는 존재를 생명이라고 보고, 생물학적 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특히 생명 자체라고 본다. 


무슨 말인가. 페인트가 그려 보이는 형태는 움직인다고 했고 이행한다고 했다. 바로 그 자체를 생명의 메타포로 보면 되겠다. 항상적으로 움직이고 이행하는 존재, 그런 무한순환운동을 반복하는 존재, 아마도 기의 운동성에 비유할 만한 존재, 그런 운동하는 존재 아님 현상 자체를 생명으로 규정하고, 그 생명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공간. 그리고 어떤 이미지들은 마찬가지 연유로 인해 이와는 또 다른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원형의 중심으로부터 가장자리 쪽으로 빛줄기 아님 빛다발을 방출하는 것 같은, 플라즈마 같은, 우주 같은, 동공 같은, 우주폭발 같고 빅뱅 같은, 혼돈 아님 암흑 속에서 최초의 우주 내지 존재가 생성되는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무한 순환하는 것 같은, 존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존재를 뱉어내는 화이트홀 같은, 우주가 수축하고 확산하는 것 같은, 그런 우주며 우주의 운동성을 연상시킨다. 



이호영_사이 #046_C 프린트_60×60cm_2014


무슨 말인가. 이 일련의 이미지들에서 작가는 생명이 유래한 거시적인 세계를 열어놓고, 생명을 거시적인 세계로 확장한다. 생명을 그리고 존재를 생물학적 층위로 소환했다가, 재차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미시적인 층위로 수축했다가, 거시적인 차원으로 확산되는, 그리고 그렇게 미시와 거시를 넘나드는, 그런 생명 내지 존재의 시공간을 열어놓는다. 그 시간으로 치자면 존재가 매순간 생성되고 소멸되는 태곳적 시간이며 원형적 시간이 될 것이고, 그 공간으로 따지자면 세상이 온통 혼돈과 암흑과 우연 속에서 예측불가능성(모든 존재는 우연의 소산이다)과 예정조화설(모든 존재는 필연의 결과이다)을 실현하기 위해 용트림을 준비하는 극적인 순간이 될 터이다. 이 이미지들은 바로 그 극적인 순간이며 시공간 앞에 서게 만든다. 

 

규정과 무규정 사이.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들은 다 뭔가. 페인트가 만들어준 형태는 고정돼 있지가 않고 항상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이행한다고 했다. 우연에 맡겨졌다고도 했다. 이처럼 움직이고 이행하는 우연한 형태를 생명이다, 존재다, 시간이다, 공간이다, 우주다, 빅뱅이다, 그리고 특히 운동이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적인 규정이 아닌가. 형태적 유사성이 뭔가. 알만한 형상이란 뭔가. 이런 선입견이 아니라면 그 규정은 사실은 자의적인 규정이 아닌가.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여하튼 어떤 유사한 형태를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아님 피동적으로 그러므로 작가의 의식 내지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만한 형상을 떠올려주는 것으로부터 그것들을 명명하고 규정하는 문제로 넘어간다. 하나의 사물현상 내지 사물대상을 재현하고 규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사물현상과 규정된 사물현상은 다르고, 사물대상과 사물대상의 개념이 틀린다. 이로써 작가가 근작에서 내세운 규정과 무규정 사이, 라는 주제 내지 주제의식은 아마도 이렇듯 사물현상 자체와 그것이 그 무엇인가로 규정된, 그러므로 어떤 개념으로 한정된 사물현상과의 차이를 염두에 둔 것일 터이다. 


마침내 작가의 작업이 사물현상 자체, 사물대상 자체에 맞춰진 것 같다. 아님 도달한 것 같다. 사이를 묻는다는 것은 곧 차이를 묻는다는 것이고, 차이를 파생시킨 원인이며 원형을 묻는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적 유사성도, 어떤 알만한 형상도 떠올리거나 그것에 기대지 않은 채로 페인트가 만들어 보이는 우연한 형상 자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것, 어떤 개념도 없이 형상 자체에 직면하는 것, 아마도 그 대면과 직면이 작가의 또 다른 작업을 열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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