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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일 / 존재론적인 소통을 위하여

고충환

손성일 / 존재론적인 소통을 위하여


모든 일은 2002년경 우연히 들른 간송미술관에서 본 한 권의 낡은 책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글초판 자료 훈민정음이었다. 책이 있다면 당연히 책을 찍어낸 목판이 있을 터인데, 그러나 목판 원본은 현재 유실되고 없었다. 그래서 작가는 그렇게 유실되고 없는 목판 원본을 복원하기로 했다. 방법으로는 샌드블라스트 카빙 기법이 동원됐다. 기법이 말해주듯 모래를 강한 압력으로 쏘아 새기고 싶은 이미지를 얻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을 통해서 원형 그대로의 세부를 되살릴 수 있었고, 이렇게 재생된 원형에다가 작가는 시간을 탑재시켰다. 말하자면 훈민정음 자체가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건너온 것이고, 그런 만큼 시간이 만들어준 질감이며 아우라가 그 위에 겹쳐질 때에야 비로소 원형이 온전하게 복원되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모래의 압력을 조절하면서 원형에 가해진 시간의 생채기를, 낡고 해진 풍화의 흔적을 재현하고 연출할 수가 있었다. 처음엔 목판으로 재현했고, 머잖아 점토판(세라믹)으로도 연출했다. 

그렇게 재현되고 연출된, 그것은 말하자면 훈민정음이라는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원본 아님 제2의 원본(아님 원형 혹은 원판)인 셈이며, 동시에 그 자체 독자적인 위상을 갖는 자족적인 오브제로서 제시된다. 엄밀하게는 일종의 유사오브제로 명명될 수가 있겠다. 유사오브제? 훈민정음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리고 영락없는 훈민정음 그대로이지만, 당연하게도 훈민정음과는 다른, 원본과 사본과의 관계를 매개로 한, 일종의 경계 위의 존재며 정체성에 부쳐진 이름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한편으로, 작가의 원판 복원작업은 재현이며 연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렇게 재생된 원판을 원형 그대로 제안(재현)하기도 하고, 원형을 변주한 지점들을 제시(연출)하기도 한다. 원판을 재생하고 복원하면서, 그렇게 재생되고 복원된 원판을 자기 작업을 위해 전용하는 것이며, 재생과 복원 프로젝트로부터 자기화의 과정으로, 용법의 차원으로 이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훈민정음의 원형에 가까운 경우에서부터 원형과는 사뭇 동떨어진 지경에 이르기까지, 원판 오브제 작업에서부터 이후 한지 작업에 이르기까지, 훈민으로 명명된 일련의 시리즈 작업에 이르는 다양한, 폭 넓은 형식적 스펙트럼을 아우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훈민정음의 유실된 목판 원본을 재생하고 복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준 아우라가 여기에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원형이 온전하게 복원된다고도 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작가는 샌드블라스팅 기법의 감각적 운용으로 이런 시간의 질감을 만든다. 그리고 재생된 원판 위에 이러저런 모티브를 차용해 덧그리는 것으로도 시간의 아우라를 연출한다. 훈민정음은 조선시대에 창제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생활상이 작업 속으로 들어온다. 이를테면 민화와 항아리와 장롱 같은. 이렇게 시간의 질감이며 아우라를 연출하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 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을 형상화하고 가시화하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고 견인하는 계기 내지 구실이 된 것이다. 때론 과거와 과거가 중첩되고, 더러는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되는 경우를 통해서 시간은 형상화되고 가시화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만들어준 질감이며 아우라를 매개로 작가의 작업은 현재보다는 과거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현재를 발언할 때조차 과거를 소환하는, 그런 노스텔지아며 멜랑콜리아가 작업의 저변에 흐르는 지배적인 정서가 되고 있다. 


다시, 작가의 작업은 유실된 훈민정음 목판 원본을 재생하고 복원하는 일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판이 있으니, 이제 판 그대로 찍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판을 찍어내는 대신 떠낸다. 찍어낸다? 떠낸다? 판이 있고, 판 그대로 찍어내거나 떠낸다? 판을 찍어내는 것은 프린트(아님 프린팅)고, 판을 떠내는 것은 몰드(아님 몰딩)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프린트와 몰드는 판화가 가능해지는 두 지점이며 갈래에 해당한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 판화 내지 판법에 대한 이해가 깔려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판을 찍어내는 대신 판을 떠낸다고 했다. 바로 몰드가,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엠보싱 기법이 작가의 작업을 결정짓는 방법론이며 형식적인 특징이 되고 있다. 엠보싱 기법에 의한 오돌토돌한 표면요철효과가 시각적으로도 뚜렷하며, 작업의 범주를 평면회화로부터 저부조로까지 확장한다. 더불어 단순한 시각의 차원을 넘어 촉각적인 경지로까지 감각경험의 지평을 증폭시킨다.  

여기서 판 그대로 찍어내든 아님 떠내든 그 매개로서 흔히 종이며 한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종이며 한지 대신 한지의 원료인 닥을 가공해 만든 일종의 닥 가공물을 사용해 저만의 독특한 표면질감을 연출한다.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크게는 한지를 가공해 만든 한지조형작업으로 범주화된다. 그러면서도 이 범주에 드는 다른 작가들과의 일정한 차별성이며 변별성이 확인된다. 무슨 말이냐면, 닥을 원료로 한 다른 작업들이 대개 거칠고 자연스런 닥 고유의 표면질감을 보여주기 마련인데, 작가의 작업의 경우에 그 최종 결과물 말하자면 아웃풋은 닥이 무색할 정도로 그 색감이며 질감이 섬세하고 곱다는 점이 주목된다. 닥 그대로의 거친 표면질감을 보여주는 예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렇고, 특히 어떤 작업에선 얼핏 닥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 결이 섬세하고 곱다. 닥보다는 거즈를 보는 듯 하고, 흡사 가녀린 실오라기들이 촘촘하게 짜인 망조직을 보는 것 같다. 

그 망조직은 일종의 숨구멍에 해당한다. 한지를 일컬어 흔히 숨 쉬는 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며, 특히 가공한 닥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망조직이며 숨구멍을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그 숨구멍은 다만 나무가 숨을 쉬는 구멍만이 아니라, 자연이 숨을 쉬고 존재가 숨을 쉬는 구멍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하자면 닥에 의한 망조직이며 숨구멍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호흡이 들락거리는 생명원리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이런 곱고 섬세한 결이며 질감을 얻는가. 닥은 여러 층의 껍질이 중첩된 겹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런 닥을 삶고 빻고 벗겨내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그 색감이며 질감이 점점 더 하얗고 고운 속살이 나온다. 겉껍질에 가까울수록 거칠고 자연스런 질감이 나오고, 속으로 파고들수록 곱고 섬세한 망조직을 얻을 수가 있다. 비록 겉은 거칠지만, 그 거친 질감 속에 고운 속살을 숨겨놓고 있다. 작가는 닥의 바로 그 이중성에 매료되고, 그리고 특히 그 이중성이 숨겨놓고 있는 고운 속살에 매료되었다. 닥 고유의 거칠고 질박한 천성을 다스려 섬세하고 예민한 본성을 캐내고, 자연을 다스려(가공해) 고운 성정을 추출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렇게 순수하게 닥의 망조직만을 겹쳐서 작업을 완성하기도 하고, 바탕화면에 이러저런 오브제를 부착시킨 연후에 그 위에 닥을 덮어서 가리는 엠보싱 내지 저부조 형식의 작업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렇게 차용된 오브제로는 주로 한글자모와 같은 문자와 기호들이 많지만, 때로 바이올린과 같은 오브제의 단면이 도입되기도 한다. 바탕화면에 바이올린의 단면을 부착한 연후에 그 위에 섬세한 닥 조직을 덮어서 마무리한 작업은 마치 바탕화면에 바이올린이 묻혀 있는 것 같은, 바탕화면으로부터 바이올린이 표면 위로 부각되는 것 같은, 바탕화면과 바이올린이 일체화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아마도 시간을 넘어 소리마저 형상화하고 가시화하려는 기획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재차 작가의 작업은 지금은 유실되고 없는 훈민정음 목판 원본을 재생하고 복원하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그 시작이며 사건은 다분히 암시적인데, 향후 작가의 작업이 지향할 바를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작업 속에 한글자모가 들어오고, 영어알파벳이 들어오고, 인터넷의 이모티콘이 들어오고, 기타 알만한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들어온다. 이 문자와 기호들은 다 뭔가. 이것들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뭔가. 그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소통의 매개체들이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소통을 주제화한 것이다. 작가는 옛 문자와 동시대의 문자, 한글자모와 영어, 그리고 오프라인 상의 문자와 온라인상의 기호를 하나로 어우러지게 해 시공간과 세대별 차이를 넘어 상호간 소통을 꾀한다. 소통의 그림자는 불통이다. 소통이 문제시된다는 것은 사실은 불통을 증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인은 말이 모자라서 불통이 아니라, 말이 넘쳐나서 불통인 시대를 살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주제화한 소통은 사실상 불통의 시대에 제안된 것이어서 그만큼 그 의미며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문자와 기호는 소통의 매개체라고 했다. 이 말은 문자와 기호가 다만 소통을 매개시켜주는 수단이며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소통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자체로 소통이 성사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작가의 작업은 문자와 기호를 매개로, 그리고 어쩌면 그 자체 불완전언어며 불구의 언어인 예술을 매개로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 하는, 존재론적인 (인식론적인 것이 아닌, 혹은 인식론의 차원을 넘어서는)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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