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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대/ 후광(後光, Halo), 빛과 물의 현상학

고충환

김형대/ 후광(後光, Halo), 빛과 물의 현상학 


김형대의 목판화를 지배하는 중심개념은 빛의 표현이다. 그가 추구하는 빛의 정체는 금속성의 물화된 빛 혹은 옵티컬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나는 빛과는 다르다. 흔히 파장이나 혹은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처리되는. 고흐의 광란의 빛과도 다르다. 편집광적인, 나르시시즘적인, 정의할 수 없는, 고흐의 그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란한 색채의 향연은 사실은 빛의 자기 현시에 다름 아니다. 고흐의 빛은 자유자재로 화가를 지배한다. 빛의 광폭한 폭력에 의해 한낱 도구적 차원으로 쓰이고 있는 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미친 화가, 광적인 화가로 고흐를 정의하는 이유의 실체다. 한마디로 고흐의 정체성은 빛의 광란에 쓰인 도구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빛은 내면으로부터 온다. 마치 렘브란트와 조루즈 드 라 뚜르, 그리고 마크 로드코의 경우에서처럼. 인간 내면으로부터 발원한 빛은 성(聖)의 표현이다. 인간은 진즉에 빛과는 거리가 먼, 속(俗)에 속한 어두움의 자식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내부에 빛을 품는다. 단지 희미한 흔적 내지 단서로서의 그 빛은 성(聖)에 대한 인간의 향수로, 기원으로 기능한다. 빛은 인간이 속(俗) 이전에 성(聖)에 속한 존재였음을 말해주는 최소한의 단서며 기억이 된다. 그러므로 빛은 최초 인간 존재의 씨앗을 품고 있다. 

김형대, 후광 02-1025, 2002, 130.4×162.2cm

이렇듯 빛은 성의 표현이며 성의 자기 현현이다. 성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속의 존재는 고흐의 경우 외에도 카뮈의 이방인과 미시마 유키요의 금각사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성의 현현으로서의 빛은 미적인 것이 아닌, 미 자체가 된다. 성과 빛과 미는 형이상학의 권력구조를 이루면서 각기 삼위일체의 세 꼭지점에 위치한다. 한편 작가의 작업을 성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단서는 화면을 조율하는 특유의 구성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름 아닌 좌우대칭으로 나타난 구도의 엄격한 적용을 말하며, 이는 예로부터 도상학적으로 성스러운 것에 속한 일체의 존재를 표현하는 도상학적인 전형으로 여겨졌다. 
빛은 불교에 대한 작가의 유형무형의 관념으로부터도 온다. 불교적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작가의 작업에 묻어있음을 의미한다. 비천상의 옷자락이 불로 화하는, 위를 향해 너울대며 춤추며 비상하는 불의 형상화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이 불은 언제나 위를 향하는 것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빛과 마찬가지로 성의 한 표현이 된다. 불은 빛들이 모여 군집을 이룬 것이다. 불은 팽창한 빛들이 스스로의 힘을 가시화하는 표상형식이다. 불의 입자인 빛은 타오르며 상승하며 경계를 만들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 넘쳐난 여분의 빛들은 불 주변에 아우라(사물이 발하는 특유의 기며 분위기)를 만든다. 빛들의 아우라는 불을 성과 연결시키는 결정적인 한 인자로 기능한다. 불의 양태를 가시화하는 하양, 노랑, 주황, 빨강색은 각각 빛들의 다른 밀도를 지시한다. 하양의 가운데 지점은 가시화의 범주를 넘어서며, 하양을 넘어서며, 색을 넘어서며, 불의 물적 형식을 넘어 관념 자체가 된다. 바로 그 지점에 성이 거주한다.
작가는 불교적 관념을 반영하는 상승하는 빛의 표현을 위해 단청으로부터 주요 모티브를(색상과 이미지를) 가져온다. 단청을 이루는 색층 가운데 특히 따뜻한 색의 배열은 그 자체로 이미 빛의 수용 혹은 표현으로 간주된다. 작가가 차용하는 단청의 색층 혹은 이미지는 문틈으로 새 나오는 빛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의 소재인 나무, 그 틈새로 새 나오는 빛, 그리고 문 위에 투사되는 빛의 파편이 만나 단청 특유의 효과를 형상화한다. 이때 문의 소재가 다름 아닌 나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빛의 만남이 아닌, 다른 특정 소재와 빛의 만남이 이처럼 단청 효과를 적절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지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빛은 전래의 정서로부터도 온다. 그것은 한민족 특유의 빛 정서로 명명할 만한 것으로서, 빛의 프리즘 가운데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너무 밝지도, 흐리지도 않은, 은근한, 그 정서는 사물을 빛의 광휘 속으로, 세례 속으로 무자비하게 내몰거나, 혹은 애매한 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더욱이 은폐시키지도 않는다. 그 빛은 사물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적당히 노출시키면서. 그리고 적당히 은폐시키면서. 빛은 노출과 은폐의 양극을 오가며 사물을 매만지고 어르고 형상화한다. 이렇듯이 빛의 사물 읽기는 사물의 표면으로부터 내부로, 이면으로 나아간다. 사물의 표면에 머물던 빛의 물적 형식은 사물의 내부로, 이면으로 읽기를 진척시키면서 사물을 즉시적으로 지시하는 대신 암시의 형식을 취한다. 그렇다고 결코 추상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자체로 지배적인 정서가 되며, 이렇듯이 정서가 된 빛은 추상적이고 구상적인 형식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이러한 사실을 빛과 소리에 대한 작가의 경험 혹은 관념을 통해 반추해볼 수 있다. 작가는 한민족 특유의 빛에 대한 정서를 빛을 거르는 얼금얼금한 발과 장막에 대한 선호로부터 이끌어낸다. 발과 장막은 직사를 투과시켜 빛을 중간 톤의 은은한 상태로 유지해준다. 이렇듯이 발과 장막의 현상학은 시지각적 쾌감은 물론이거니와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는 특이한 방식에로 나아간다. 즉 발의 얼금얼금한 사이를 통해 직접 사물을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먼발치에서 조차 발과 장막을 투과하는 빛의 자식인 그림자의 양태를 통해 사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언급한 문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업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닫힌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소리의 파편은 이면에 있는 사물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게 한다. 그 단서가 일단 정서의 차원으로 전이된 연후에는 암시의 형식을 허용한다. 즉 실제로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소리가 존재하지 않을 때조차 이면의 존재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득한 존재를, 시간의 무자비한 폭력에 잠식당한, 이제는 기억 속에서나 간신히 존재할 만큼 아련한 존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일단 정서가 된 빛이 추상적이고 구상적인 형식을 넘나든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미한다.
작가의 목판화를 지배하는 상상력은 이렇듯 빛과 불 이외에 물로부터도 온다. 이들은 각기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온다. 그 양태가 빛과 불의 너울로, 그리고 빛과 물의 여울로 표현된다. 이들 상상력의 편린들에 최종적으로 색이 가시화된다. 너울도 여울도 투영 혹은 투사의 매개 없이 현상되지는 않는다. 빛과 물 자체로는 현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투영은 던지는 힘의 일종으로서, 빛과 물이 만나지는, 혹은 빛과 물과 사물이 만나지는 것을 말한다. 잠자는, 편평한, 고른 대기 혹은 공기의 상태로도 현상하지 않는다. 들고 나는 빛 혹은 물의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상이한 밀도와 차이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현상한다. 미는 공기 곧 바람의 힘이 작용할 때 현상된다. 

김형대, 후광 halo 12-0208, 2012, acrylic on canvas, 130.3x193.9cm

이렇듯 빛과 물이 만나는 지점이 투영이며, 물의 꿈이 자기를 현시하는 것이 여울이다. 꿈꾸는 물은 자기를 가시화하기 위해 빛을 불러들인다. 빛은 꿈꾸는 물속에서, 그 표면 위에서 가볍게 부유한다. 빛은 물의 깊숙한, 어두운 비밀로부터 물의 꿈을 끄집어내어 표면 위에서 춤추게 함으로써 원래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한다. 물의 깊고 어두운 꿈은 빛과 더불어 유희하며, 모여 덩어리를 이루기도 하고, 흩어지면서 파편이 되기도 한다. 물은 빛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한낱 무기물이 아니다. 물을 빛과 더불어서 단순한 무기물 혹은 무기체로 간주하는 것만큼 비과학적인 생각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인간은 진작부터 물을 생명의 담지체로 간주해오지 않았던가. 물은 빛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화학기호로 그리고 원소로 환원되지 않는다. 
작가의 목판화에서 특이한 점으로서, 판목의 섬세한 결이 연출하는 화면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화면으로부터 가급적 나무의 결이, 섬세한 디테일까지 드러나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 역시 자연스러움을 좇는 한민족 특유의 정서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자연과 최소한의 인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때 인위는 자연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연을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으로 기능한다. 판목의 결은 옹이를 중심으로 모여들거나 흩어지기도 하고,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기도 하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뚜렷한 방향성을 거스르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의 양태는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면서, 혹은 그것에 반하면서 자연스러움으로 귀결된다. 한마디로 결은 나무가 스스로의 의지를 표상하는 가시적인 형식으로 정의된다. 일견 규정성의 것으로 간주되는 나무의 의지는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자 자체적으로 필연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나무의 의지는 규정성과 비규정성의, 우연과 필연의 무구별적인 의미항 속에 있다. 
판목의 결은 나무의 삶 자체를 즉시적으로 각인한다. 그 삶이 넉넉할 때 결의 진폭은 크고 유연하게 흐르며, 사정이 어려울 때 진폭은 더 좁아지고 굴곡도 많다. 이러한 사실과 앞서 언급한 나무의 의지로부터 드러나듯, 나무의 결은 자체적으로 인생의 굴곡을 지시하는 유비체에(알레고리) 다름 아니다. 작가는 주로 느티나무와 춘향목의 무늬목으로부터 삶이 묻어나는, 삶의 채취가 짙게 배어있는 결을 발견한다고 한다.              
작가의 목판화를 읽는 주된 단서는 빛과 물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작가에게서 빛과 물의 만남은 멀다. 멀고 아련하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여의도 곁을 지나 흐르던 샛강 한 가운데, 발가벗고 서 있는,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은 현상 속에 있다. 현상은 죽음으로 인해 아련하다. 현상이 죽은 지점으로부터 기억은, 추억은 시간의 싹을 키운다. 기억은 그리고 추억은 최초의 현상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만큼 더 처연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이 확인되는 순간 기억은 그리고 추억은 더 간절한 것이 된다. 그리고 간절한 것이 그 자체로 명료한 현실이 된다.      
한마디로 작가의 목판화를 지배하는 미적 관념은 부재의 미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며 추억이라는 과거의 지층으로부터 모티브를 끌어온다는 점(주로 물과 관련된 표현)과 속(俗)의 표현이 아닌 성(聖)의 형상화에(주로 빛과 관련된 표현) 경도된다는 점이 그렇다. 물의 세포는 원래 무거운 것임으로 과거로 가고, 반면에 불의 입자는 지나치게 가벼운 것임으로 인해 현실을 초월한다. 이러한 정의가 작가의 작업이 추상적인 혹은 관념적인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름 아닌 한민족 특유의 빛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라는 사실이 그의 작업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고리로서 기능한다.                              
작가의 목판화는 회화와 같이 간다. 목판화든 회화든 마찬가지로 빛의 표현이 지배적이다. 빛은 속(俗)을 지나 성(聖)으로 넘어가며, 자연을 넘어서면서 자연으로 회귀한다. 목판화는 거저 판화의 한 종류이기 이전에 동양의 독특한 미술 표현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목판화의 정의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서양 역시 목판화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목판을 매개로 한 표현의 진정성을 언급하는 대목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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