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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 누군가가 앉았을 의자

고충환

김수자 /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 누군가가 앉았을 의자


옷 시리즈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떠오른 것이다. 셔츠 한 장에서 일상의 공허함과 가벼움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없음의 있음이 있다는 것, 관념적인 형상으로 얽매지 못하는 것(관념적인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작가 김수자가 옷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동기며 계기를 회고하고 있는 작가노트를 원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원형 그대로 옮겨본 것이다. 이 노트는 그대로 작가의 현재 작업을 함축하고 있고, 이전과 이후 작업을 가름하게 해주는 단서를 포함하고 있다. 

즉 작가는 이전에 관념적인 형상을 그렸었다. 소위 추상미술이다. 회화적인 화면에 기하학적 패턴과 같은 모티브를 중첩시킨 그림이었고, 붓질과 바느질을 대비시킨 그림이었다. 조직이 성근(때로 평면적인) 화면과 상대적으로 조직이 섬세한 화면을 하나로 포개놓은 것이 존재의 이중성을 상기시키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형식논리와 함께, 존재에 대한 작가의 관념(존재의 이중성)을 그 형식논리에 투사해놓은 그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가의 작업을 특징짓는 바느질이 이미 추상미술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추상미술과 더불어 바느질이 비롯되고 유래했다는 사실은 처음에 작가에게 바느질은 점이나 선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로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점을 대신하고 선을 대체하는 바느질 드로잉과 같은. 단순한 시각적 드로잉을 넘어서는 촉각적인 드로잉과 같은. 그러면서도 존재의 이중성이라는 관념을 부각하는 질료적인 형식을 시도하고 제안해본 것과 같은. 

존재의 이중성? 존재가 이중적이라는(그리고 다중적이라는 아님 최소한 일면적인 정의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작가의 추상미술은 존재의 이중성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을 나름의 아님 작가만의 형상으로 표상한 그림이다. 문제는 존재의 이중성을 표상하기 위해 도입된 도구가 다름 아닌 바느질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여성주의에서 바느질은 여성 고유의 성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도구로 인식된다. 전통적으로 특히 모더니즘 패러다임에서 회화는 가부장적이고 제도적인 세계관을 대변하는 도구이며 형식논리로 여겨진다. 그리고 바느질은 생활철학의 공간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회화에 바느질을 중첩시키고, 붓질과 바느질을 대비시킨 작가의 작업은 가부장적 도구(언어)에 여성주의적 도구(언어)를 대질시킨 것이고, 따라서 존재의 이중성 역시 가부장적 세계관에 대해 여성주의적 성적 정체성을 강조한 경우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정작 이러한 사실을 작가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럼에도 최소한 이런 여성 고유의 감수성이며 자의식이 작가의 작업 이면에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Diary-Absence, 163x130cm, Mixed Media


그리고 작가는 관념적인 형상으로 얽매지 못하는 것, 곧 관념적인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게 뭔가. 바로 부재다. 존재와 똑같은 강도와 실감으로 존재하는 부재가 있다.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며 부재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때 존재했었음이라는 과거형으로만 기술될 수 있을 뿐인 존재를 현재 위로 호출한 것이다. 다시, 그게 뭔가. 바로 암시며 흔적이다. 존재의 흔적이다. 예술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관념 가운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층위로 밀어 올리는 기술이 있다. 즉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작가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깨닫는다. 셔츠 한 장 속에 존재와 부재 사이의 미묘한 경계가 있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고, 관념적인 형상으로 얽매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다시, 그게 뭔가. 바로 일상의 공허함과 가벼움이다. 알다시피 작가의 주요 소재는 옷이다. 캔버스 화면에 이러저런 회화적 과정을 부가한 연후에, 그 위에 바느질로 옷을 재현하고 중첩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으로 치자면 다만 이런 옷들 자체이며, 일상의 공허함과 가벼움이란 엄밀하게는 작가가 옷에 투사한 것이며, 옷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며,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옷이라는 가시적인 것(존재)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무엇(부재)을 암시하고 싶다. 그리고 그 암시가 일상의 공허함과 가벼움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게 한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작가가 공허함과 가벼움이라고 한 것은 꼭 그렇게 한정된다기보다는 사실상 이 말로 싸안을 수 있는 감정의 성분들이며 의미의 지점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그런 포괄적이고 유기적이고 열린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작가가 화면 위에 재현해 놓고 있는 옷들은 이처럼 공허해 보이고 가벼워 보인다. 엄밀하게는 공허하고 가벼운 일상을 증언하기 위해 그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들이지만, 그래서 비록 그 옷들의 주체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희한하게도 아님 당연하게도 지금은 부재하는 존재들을 상기시키고 존재의 흔적을 상기시킨다. 옷을 매개로 존재가 부재를 암시하는 것. 이처럼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들은 옷 자체로 나타난 존재보다는 부재를 부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가 기법으로서 도입하고 있는 바느질된 옷은 그 조직이 느슨하고 헐렁해서 아님 그 존재감이 희박해서 오히려 더 이런 부재의 인상이며 느낌의 질감을 강조한다. 공허하고 가벼운 일상을 증언하는 헐렁하고 느슨한 방법이 부합하고, 이로써 형식과 내용이 합치된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가 그림 속에 재현해놓고 있는 빈 옷들은 존재를 통해 부재를 증언하고 있었고, 공허하고 가벼운 일상이라는 작가의 생활감정을 증언하고 있었고, 존재와 부재 사이의 스펙트럼 위 어디쯤엔가 위치해있을 존재의 위상(자리)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할 때보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할 때 존재의 존재다움이 더 잘 부각된다고 했다. 바로 예술의 기술이 암시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며, 부재의 미학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부재의 미학으로 치자면, 빈 옷도 그렇지만 빈 의자도 그 경우가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벗어놓은, 그리고 누군가가 앉았었을 존재의 흔적을 암시한 것이다. 옷이며 의자 자체보다는 누군가에게 방점이 찍히는 논법이며,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암시(증명)하는 논법이다. 여기서 암시란 그저 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존재의 흔적을 그리는 것이며, 말을 하자면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기술이다. 다르게는 여백의 기술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그 기술은 형식(헐렁하고 느슨한 조직)과 내용(공허하고 가벼운 일상)이 합치된 작가의 그림에서 효과적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여기에 작가의 삶의 철학에 대한 공감에로 이끄는 정서적 환기마저 더해져 어떤 시적 울림을 자아낸다. 생활철학(생활철학이 거창하다면 생활감정)을 시적 차원으로 승화시켜놓고 있다고나 할까. 바느질(생활)로 시(정서)를 그리고(환기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여기서 다시, 작가의 작업이 바느질이라는 평범한 일상(옷을 짓는 일)에서 비롯했다는, 그리고 일상에 대한 작가의 소소한 생활감정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Diary-Absence15, 200x200cm, Mixed Media


일상에 대한 작가의 감정은 공허하고 가볍다고 했다.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에서 그리고 흡사 존재와 부재 사이를 넘나드는 것 같은(그 자체 헐렁하고 느슨한 그림의 구조에 의해 뒷받침되는) 작가의 그림에서 유추되는 감정이지만, 그래서 쉽게 공감이 가는 감정이지만(실제로 사람들은 때로 일상을 그렇게 느낀다), 반드시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 감정은 다만 그림의 표면에 드러난 것일 뿐, 사실 작가는 그 이면에 치열한 과정을 숨겨놓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의 그림은 대부분 회화적인 과정 위에 바느질을 중첩시킨 것이지만, 때로 여기에 사진 콜라주를 부가하기도 한다. 사진을 콜라주하고, 그 위를 회화적인 과정으로 덧칠하고, 그리고 재차 바느질로 마무리한 것이다. 콜라주한 사진을 보면, 사람들도 있고 사건들도 보인다. 아마도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매체로부터 차용한 것들이며, 일상으로부터 건너온 것들이며, 작가의 생활감정이 유래한 것들이며,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것일 터이다.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초상들은 익명적인 사람들이며, 그 익명성마저 회화적인 덧칠에 의해 강조된다. 존재를 부재에게 내어준다고나 할까. 존재를 지워 오히려 존재의 흔적을 강조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지워졌지만, 그러나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마치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처럼(실제로 롤랑 바르트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다만 흐릿해질 뿐,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존재는 그렇게 수도 없이 고쳐 쓴 존재의 흔적들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익명적 주체들이며 존재의 흔적들이 그림자처럼 점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헐렁하고 느슨해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그 이면에 이처럼 치열한 과정을 숨겨놓고 있었고, 지난한 존재증명을 동반하고 있었다. 어쩜 이런 치열한 존재증명의 과정이 있었기에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헐렁하고 느슨한 그림(?)이며 일상에 대한 감정이, 그리고 자기인식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이로써 작가는 사진 콜라주 작업을 매개로 익명적인 주체를, 존재의 흔적을, 그 자체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존재의 결을 표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시간을 상징하고, 기다림을 상징하고, 인연을 상징한다. 작가는 그런 실을 매개로한 바느질을 통해 옷을 짓고, 존재를 짓고, 존재의 흔적을 짓고, 부재를 짓는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바느질은 어쩜 일상이며 생활감정을, 그리고 종래에는 우주를 표상하는 것일 수 있겠다. 옛날에 여자들은 수틀에 세계를 수놓았었다. 여기에 작가는 캔버스를 수틀 삼아 일상적인 생활감정을 수놓고, 자기만의 우주를 아로새긴다. 그 우주는 일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기에 공허하지가 않고,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존재론적 자의식을 얻고, 가시적인 것을 매개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회화적 성취를 얻는다. 불현듯 아님 새삼스레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이 살갑게 와 닿고, 누군가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을 의자가 예사롭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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