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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근 / 생태조각 혹은 생태작업, 자연의 종말이 그려 보이는 묵시록적 풍경

고충환

양태근 / 생태조각 혹은 생태작업, 자연의 종말이 그려 보이는 묵시록적 풍경


먼저 양태근의 작업을 생태조각 혹은 생태작업으로 규정한 이유를 해명하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해보자. 처음엔 환경조각으로 명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환경조형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고, 작가의 작업은 환경조형물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태작업으로 규정한 이유는 작가의 작업이 조각에 근간을 두면서도 동시에 공간설치며 사진과 영상을 아우르는 폭넓은 것에 기인한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생태를 주제화한 것이고, 이 주제를 조각을 중심으로 한 다중매체에 담아낸 것이다. 

특히 공간설치는 조각의 범주를 공간으로까지 확장하게 해준다. 더불어 이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어쩌면 조각으로 그려진 허구적 상황(최소한 상상력의 산물)을 현실상황에 연장시켜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일종의 유사현실 아님 대체현실 아님 증강현실의 제안으로 나타난 연극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제안된 유사현실이 현실에 눈 뜨게 해준다. 

현실에 눈 뜨게 해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현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한다. 이 무슨 이율배반인가. 여기에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가 있다. 일상을 낯설게 해 일상의 이면을 돌이켜보게 하고, 현실을 소외시켜 현실의 진상을 주지시키는 것. 그렇다면 그렇게 작가가 돌이켜보게 하고 주지시키고 싶은 일상의 이면이며 현실의 진상이 뭔가. 바로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되고 있는 생태환경이며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이다. 흔히 자연은 살아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자연은 과연 살아있는가. 지금도 여전히 자연은 그 속에 존재에 대한 비의를 품고 있고 주술을 부리는가. 그리고 그 남다른 능력으로 인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신비감을 자아내는가. 당연, 회의적인 것이 현실이다. 현대인에게 자연은 없다. 다만 도구적 자연이 있을 뿐. 자연에 귀의하고 전원생활 운운하는 풍문으로나 떠돌 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자연은 살아있다고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자연은 진즉에 죽었다. 여기에 파괴되고 있는 생태환경이며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을,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어쩜 진즉에 죽었을지도 모를) 자연과 더불어서 같이 침몰하고 있는 인간을 주제화한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의가 있다. 자연의 종말이 그리고 있는 묵시록적 풍경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라고 작가의 작업은 묻는다. 그리고 만약에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 있는가, 라고 물어온다. 더불어서 자연의 종말은 곧 인간의 종말이라는 암울한 비전 앞에 서게 만든다. 



흔적 로드킬(부분)


법정 스님의 에세이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이 기거하는 암자는 산속에 있는 탓에 이러저런 동물들이 많았다. 매일 새벽이면 스님은 그 동물들에게 자신의 밥을 나눠주었고, 그렇게 밥을 얻어먹는 식솔들 중에 쥐 한 마리가 있었다. 부뚜막 위에 밥을 놓고 가면, 쥐가 기다렸다가 먹고 가곤 했다. 하루는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 쥐를 보고 스님이 말했다. 너 참 흉측하게 생겼구나, 다음 생애엔 꼭 사람으로 태어나거라, 라고.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부뚜막 옆에 그 쥐가 죽어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그 쥐는 분명 스님의 말을 귀담아 들었을 것이고, 그리고 죽은 이후에 인간으로 환생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환생하라는 스님의 주문은 인본주의(인간이 편하자고 하는 생각)는 아닐 것이다. 다만 윤회의 높은 단계를 염두에 둔 덕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거짓말은 이야기의 에너지며 강도다. 그 강도가 현실을 친다. 이야기와 현실의 거리를 파고들고, 죽은 자연과 살아있는 자연의 차이를 파고들고, 자연과 도구적 자연의 다름을 파고든다. 이 이야기는 현실인가, 아님 선문답인가. 

여기에 법정 스님의 자연에 대비되는 도구적 자연이 있다. 로드킬이다. 아마도 로드킬이야말로 도구적 자연의 극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마치 죽음을 금기의 극단적인 경우로서 지목한 자본주의에 대해 재차 죽음을 호출한 조르주 바타이유의 경우에서처럼(자본주의는 죽음을 금기시하는데, 죽음이 비생산성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타이유가 재차 죽음을 호출한 것은 죽음의 비생산성을 오히려 잉여의 생산성의 논리로 전유하기 위해서이다). 주지하다시피 로드킬은 도로에서 차에 치어 죽은 짐승들을 말한다. 작가는 압축스펀지를 이용해 그 사체들을 재현했다. 그리고 납작해진 그 표면에 실제로 그 위로 지나쳤을 자동차 바퀴 자국을 중첩시켰다. 그렇게 짐승들의 사체 위로,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좌충우돌하는 멧돼지 위로 자동차들이 내달린다. 그리고 작가는 주물로 떠낸(처음엔 점토 덩어리였을) 덩어리 위에 그렇게 죽은 짐승들의 발톱으로 스크래치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 덩어리는 짐승들의 주검이 응축된 덩어리며, 짐승들의 상처가 응축된 덩어리며, 짐승들에 가해진 인간의 폭력이 응축된 덩어리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 사체들이며 덩어리를 흔적들, 이라고 부른다. 

흔적들은 이 일련의 작업들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생태에 바탕을 둔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흔적들은 과거를 향하고 미래를 향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주지시키고, 그 주지로 인해 미래를 예시해준다. 흔적들은 아득하게 먼 과거로 향하고, 가까운 과거로 향한다. 아득하게 먼 과거를 향한 흔적들이 인간이 부재하던 시절이며 선사 내지 시원을 열어놓는다. 아득하게 먼 옛날,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다. 작가는 그렇게 흙으로 빚은(땅신이며 지모가 낳은) 동물들이며 자연이 막 태어나던 신성한 순간을 그려 보인다. 바로 존재가 기원한 세계의 배꼽(옴파로스)을 형상화한 것이며, 인간은 다만 추정할 수 있을 뿐 실제로는 본 적도 알 수도 없는, 말하자면 신성불가침의 순간이며 불가지의 찰나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가까운 과거를 향한 흔적들이 로드킬에서 보는 것과 같은, 죽은 자연이 응축된 덩어리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폭력을 증언한다. 

그렇게 자연이 아프고, 인간도 아프다. 온몸에 스테이플을 박은 인간(스테이플 인간)이 스스로 만든 상처며 자학의 흔적을 증언해준다. 자연을 도구화하면 인간도 도구화되고, 자연이 상처를 입으면 인간도 상처를 입고, 자연을 죽이면 인간도 죽는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이 죽어가고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 이처럼 죽어가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불통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도구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통 때문이다. 자연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라고 인간은 착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을 도구화할 수 있고 도구화해도 된다(라고 착각했다). 이처럼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에서 인간은 고민에 빠진다. 인간 고유의 언어며 말을 상징하는 이러저런 문자며 기호를 덮어쓴 인간이 머리를 싸매고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현세와 내세, 삶과 죽음, 선과 악과 같은 거대담론에 생각이 잠겨 있었고, 반가사유상은 해탈(윤회 곧 다시 태어나지 않는 방법)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작가는 자연과 인간의 불통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을 그려서 보여준다. 그래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의 또 다른 버전처럼 보인다.    



흔적 로드킬


양태근은 그동안 국내 최고의 야외설치미술 그룹인 야투(들에 던진다는 뜻)와 바깥미술회, 그리고 특히 2001년 9월 창립한 야생동물들의 핵심작가로서 활동해오면서 줄곧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이 더불어 사는 유기적인 삶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진정한 생태적 환경을 복원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그렇다고 작가를 그저 환경운동가로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작가적 자의식으로 시대의 문제의식에 반응하는 자연스런 그리고 때론 적극적인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최근엔 로드킬에 그의 감각촉수가 뻗쳤고 삘이 꽂혔다. 이런 그의 작업에는 직설화법의 힘이 있다. 진정성만이 줄 수 있는 설득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우회를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직설화법을 조형 고유의 어법으로 환원해내는 갈무리가 있고 감각적 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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