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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영실 / 살갗, 연약한 너무나 연약한

고충환

표영실 / 살갗, 연약한 너무나 연약한


  반투명. 투명과 불투명 사이. 투명하지도 불투명하지도 않은. 반쯤만 보이는. 봐도 본 것이 아닌. 투명과 불투명에는 사이가 있다. 표영실의 그림은 불투명에서 투명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진화한다기보다는 옮아가고 있다. 그래서 근작은 눈에 띠게 투명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별반 없어 보인다. 불투명으로 시작을 했을 때나 투명한 근작에서나 애매하기는 매 한가지. 처음엔 뭔지 몰라서 막연했고, 뭘 어떻게 그려야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불투명했다. 그런데 투명해진 근작에서도 여전히 막연하고 막막하다. 투명하면 또렷해져야 하는데, 적어도 불투명에 비해보면 그 실체가 어느 정도 손에 잡혀야 하는데, 반쯤만 투명한 탓이고, 절반만 보여주는 탓이고, 숨기면서 보여주는 까닭이다. 숨기면서 보여주는? 혹 보여주는데 보지 못하는? 자크 라캉은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말을 한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지금여기에 없다고 했다. 반쯤은 작가의 몫이고 절반은 내 탓이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 살갗이 있다. 알다시피 살갗은 몸과 네가 맞닿는 경계다. 몸의 응시와 너의 시선이 부닥치는, 주저하는 몸과 너의 욕망이 충돌하는, 주체와 외계가 면해있는 관계의 최전선이며,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바로미터다. 그래서 부끄러우면 발갛게 달아오르고, 때로 분노로 파르르 떨기도 한다. 살갗 밑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살갗 위로 자기를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보는 것이며, 시선의 욕망은 사실 감정이 보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눈빛의 의미는 뭔지, 나의 시선은 레이저가 돼 처음엔 꽤나 두터웠을 너의 살갗을 파고든다. 그래서 너의 살갗은 마치 허물을 벗듯 점점 더 얇아지고 점점 더 투명해진다. 

  그래서 감정이 보이는가. 시선의 욕망은 마침내 감정에 도달했는가. 살갗을 넘어, 감정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드는데 성공했는가. 그리고 그 다음엔? 당연히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심연이 기다리고 있을 뿐. 텅 빈. 공허 자체인. 어둠 자체인. 처음처럼 혼돈 자체인. 살갗은 어쩜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시선의 욕망이 살갗 너머를 엿보는 것이 문제였다. 시선은 살갗을 죽이고, 감정을 죽이고, 무의식을 죽이고서야 비로소 살갗을 넘고, 감정을 사고, 무의식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욕망이며, 그 이면에 죽음충동을 숨겨놓고 있는 욕망의 화신이며 죽음의 사신이다. 그렇게 너(시선)는 나(응시)를 본다. 그러면서 사실은 살갗이 벗겨져 허물어져 내린 나를 삼킨다. 그리고 종래에는 어둠 속에 빛나는 섬광처럼 사라지게 만든다. 



표영실, 사라지는것 2013 oil on canvas  45.5x53cm


  표영실은 이처럼 살갗을 그리고, 경계를 그리고, 관계를 그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고, 나와 너 사이에 경계(다만, 여기까지!)가 있고, 주체와 외계 사이에 살갗이 있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그림은 인간관계의 미학이며 사람사이에 대한 성찰로 보면 되겠다. 사회적 관계와 심리적 관계, 객관적 관계와 주관적 관계가 삼투되면서 상호작용하는 어떤 지점 아님 현상을 그린 그림으로 보면 되겠다. 그 관계의 양쪽 끝에 각각 내가 있고 네가 있다. 나의 응시가 있고 너의 시선이 있다. 나는 너의 시선(시선의 욕망)으로 인해 이중으로 분열된다(시선의 욕망이 다중적이면 주체도 덩달아 다중 분열된다. 그리고 그렇게 주체가 분열되는 것은 욕망에 연동된다).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페르소나는 사회에 내어준 주체이며, 내가 보여주는 주체이며, 네가 보고 싶은 주체이다. 그리고 나는 그 페르소나 뒤에 숨는다. 그렇게 숨은 주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으므로 너도 모르고, 때로 나 자신에게마저 낯설다(자기소외?). 

  그래서 어쩜 살갗이란 그런,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드러난 주체와 숨은 주체를 가름하는 경계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의 시선이 페르소나에 머물러 있었으면, 피상적인 웃음가면에 만족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페르소나의 뒤편을 엿보고, 그 경계를 기웃거릴 때 문제는 배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너는 나를 본다. 너의 시선이 나의 응시를 파고든다. 나의 속살을 파고들고, 나의 감정을 파고들고, 나의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들어봤자 아무 것도 없다. 어쩜 당연하게도 거기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네가 뚫어놓은 공허한 두 구멍(둥근 구멍)이 있을 뿐. 다만 그 빈 구멍 너머로 보이는 어둠 자체가 있을 뿐. 

  작가는 이처럼 공허를 눈구멍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공허는 목구멍으로 대리된다. 너의 욕망이 살갗을 넘어, 경계를 넘어, 금지를 넘어 뚫어놓은 구멍들이다. 본다는 것도 욕망에 연동되고 삼킨다는 것도 욕망에 연동된다. 작가는 눈구멍으로 그리고 부르주아는 목구멍으로 상처를 삼킨다. 그리고 그렇게 삼켜진 상처를 너는 결코 목격하지도 그 어둠 자체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빈 눈구멍과 부르주아의 빈 목구멍은 똑같이 공허를 표상하고, 하나같이 욕망에 연동된 것이란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들자면,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얼굴그림(없는 얼굴)이 꼭 무슨 공허를 상연하는 무대 같고, 실재의 사막(슬라보예 지젝)이며 실재계(자크 라캉)를 상영하는 극장 같다. 암흑이며 어둠 자체, 막 섬광이 사라진 우주 아님 심연을 상영하고 있는 그 극장에는 한편에 노란 커튼마저 드리워져 있어서 꽤나 그럴듯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림이 증여를 암시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내민 손바닥 위로 꽃이 피어오르고(선택), 산딸기 같은 알갱이들이 소복하다(반복). 나는 너에게 꽃을 내밀고 산딸기를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상처가 돼 되돌아왔다. 꽃도 붉고, 산딸기도 붉고, 피도 붉다. 문화주의자 중 증여론자들이 있다. 증여가 문화를 생성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증여는 곧 권력의 표상이었다. 내가 너에게 증여를 하면, 너는 나에게 더 큰 증여며 더 나은 증여로 되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증여를 교환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증여에 부수되는 선의는 다만 권력행위의 후광에 지나지 않는다. 

  꽃이면서 동시에 피기도 한, 산딸기면서 동시에 상처이기도 한 작가의 그림은 어쩜 이런 증여행위와 권력관계, 선의와 상처의 이율배반적인 관계, 진심과 오독이 뒤얽힌, 더 이상 풀 수 없게 꼬여버린 관계를 그려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와 네가 도저히 통할 수 없는 불통의 관계를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에 민감한,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너의 선의마저도 상처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살갗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살갗 너머를 엿보지 말 일이다. 그저 모자라도 차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머물 일이다. 



표영실, 신기루 2013  oil on canvas  181.8x227.3 cm


  처음에 작가는 집이며 풍선이며 구름 같은 오브제를 그렸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사람을 그린다. 이처럼 소재 상으로 사물로부터 사람으로 옮겨왔지만, 알고 보면 사물도 사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감정이입 된 사물의 살갗이 벗겨진 수위 아님 수면 아래로 속살이, 상처가, 감정이, 사람이 드러나 보인 점이 다르다. 감정을 각각 사물형상에게 그리고 사람형상에게 분유한 그림들이다. 그래서 사물도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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