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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생명에 대한 예의

고충환

박미화/ 존재에 대한 연민과 생명에 대한 예의 




전시정경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체는 추하지만 시체를 재현한 그림은 아름답다고 했다.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존재를 상실한 상실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위험사회 광풍이 불만큼 존재의 안위를 염려해야 하는 안전 불감증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물신이 새로운 신으로 등극한 천민자본주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좌파와 우파, 유산자와 무산자, 다수자와 소수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이 분투하는 총성 없는 전쟁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때론 춤으로 노래로 그리고 조형으로 그 시대를 불러내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이 삶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니체의 전언과도 통할 것이다. 트라우마로 자리한 자기타자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와 친해지고 자기와 화해한다는, 루이스 부르주아가 조각을 하는 이유와도 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엔 때로 연금술과도 같은 그리고 마술과도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의 인식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런 지리멸렬한 현실에 대해서 처음에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리고 디스토피아의 진단을 내놓았다. 그리고 종래에는 헤테로토피아를 매개로 한 처방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그랬던 것처럼 헤테로토피아도 궁극적인 처방전이 될 수는 없었다. 미셀 푸코에게 헤테로토피아는 없는 장소며 부재하는 장소를 의미했다. 군대와 감옥과 기숙사처럼 실제로는 있는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를 의미했고, 욕망이 해소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차곡차곡 쟁여지기만 하는 억압의 장소를 의미했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에 주목했던 이유도 알고 보면 바로 이렇듯 쟁여진 억압이 종래에는 존재를 해방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생산적인 계기로 본 것에 있다. 그러므로 헤테로토피아는 어쩜 없는 장소며 부재하는 장소이기는커녕 사실은 절실하게 있는 장소이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장소일 수 있다.



박미화의 작업은 그렇게 부재하면서 절실하게 있는 장소, 의식 속에서 지워졌지만 동시에 무의식을 파고드는 장소를 재현하고 되불러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과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이 있다. 그 중 박미화의 작업은 진실을 통해서 사회적 트라우마며 실존적 트라우마를 위로하고, 그 상처와 친해지고 화해하는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전시정경



작가의 작업은 특히 공간적이고 장소적이고 연극적이고 문학적이다. 작업은 마치 한편의 공연을 상연하기 위한 연극무대 같다. 작품들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위상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어떤 서사를 풀어내는데 종사하는 무대 소품 같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 올리는 공연은 아마도 제의적인 것일 터이다. 사회적인 그리고 실존적인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는, 그런 치유를 위한 과정이 될 터이다. 이런 작가의 작업은 원래 신을 위한 제사로부터 예술이 유래했다는 예술기원론과도 통한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은 이런 신을 되불러온다. 망자의 혼을 달랜다는 의미의 진혼이 그렇고, 망자의 영을 위로한다는 의미의 자장가가 그렇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어쩜 이런 망자의 혼을 달래고 위로하는 한바탕 살풀이며 굿판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진혼이라는 이름의 그리고 자장가라는 제목의 무대 위에 어떤 살풀이며 굿판을 올려놓는가.

 


여기에 이름들이 추락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이름들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그 이름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떨어지는가. 보통 사람이 죽으면 망자를 모신 지방을 태워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그걸 소지라고 한다. 망자의 신을 태워 하늘로 돌려보낸다는 뜻이고,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름하는 의식이다. 이처럼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려 보낸다. 그런데 어떤 죽은 사람들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로 자기가 살았던 땅 위로 떨어지고, 산 자 곁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죽은 후에조차 산 자 곁을 맴도는 그들은 누구인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다. 여기에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넋이, 신이 땅 위로 떨어지고 있고, 물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이름들은 그나마 발굴된 이름들이고, 역사 속엔 이보다 숱한 미처 발굴되지 못한 이름들이, 때론 이름마저 지워진 헤아릴 수 없는 이름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워진 이름들 곁으로 창문이 많은 건축물 같기도 하고, 묘비들의 집 같기도 하고, 거대한 배 같기도 한 구조물이 있다. 그 구조물 위에는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라는 글귀와 함께, 알 수 없는 문자 같기도 하고, 숫자 같기도 하고, 기호 같기도 한 부호들이 새겨져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시베리아 탄광촌을 배경으로 자신의 유년을 그린 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자전적 흑백영화(1990)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구는 이후 암울한 세태를 대변하는 일종의 시대적 비망록 내지 묘비명이 되어주고 있다.




이 구조물도 그렇지만, 근작에서 작가는 합판과 커트 칼을 이용해 조형을 했다. 그래서 조각이지만 환조보다는 저부조에 가깝고, 조각보다는 회화에 가깝다. 그런 만큼 커트 칼은 조각도보다는 붓을 대신한다. 작가는 커트 칼 하나로 이 모든 형태며 문구며 부호들을 아로새겼다. 모르긴 해도 제작과정에서 커트 칼 꽤나 분질러먹었을 것이며, 더러는 손도 다쳤을 것이다. 그렇게 지워진 이름들이며 암울한 시대를 아로새겼다. 그렇게 사실은 상처며 상처의식을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렇게 지워진 이름들이며 암울한 시대를, 상처를 아로새기기에, 그리고 종래에는 그 상처를 작가 자신의 자의식으로 아로새겨 넣기에 합판과 커트 칼은 꽤나 어울리는 조합이었고 환상의 궁합이었다. 상처를 더 상처답게 만들어주는 재료가 있고, 자의식의 강도를 더 절실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따로 있는 법이다. 작가는 그 절실함으로 지워진 이름들을 부각했고, 지워진 메시지들을 복원했고, 알 수 없는 문자며 숫자며 기호들을 재생시켰다.




그렇게 작가가 커트 칼로 그린 혹은 커트 칼로 그린 것처럼 절실한 강도로 그린 그림 중엔 유독 피에타가 많다. 피에타의 전형처럼 여자가 누군가를 안고 있는데, 아기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하다. 여기서 00 같기도 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 혹은 다름 아닌 그것을 명명하지는 않는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며 지워진 이름들의 희미한 자국을 의미한다. 그렇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존재 일반을 지시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은 것 같고, 최소한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있는 것 같다. 그런 경계 위의 존재들이 연민을 자아낸다. 이런 연민을 자아내는 경우로 치자면 선인장을 안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 선인장을 안고 있는 것은 손 같기도 하고 발처럼도 보인다. 어느 경우이건 안을 수도 그렇다고 떨쳐버릴 수도 없는 상처며 자의식을 표상한다. 삶이 꼭 그럴 것이다. 아프고 절실하고 가엽고 도망가고 싶은. 그런데 정작 도망갈 수도 없는.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가지지가 않는.




이 모든 정황들을 지모가 침묵 속에 지켜보고 있다. 혹은 삶을 관장했듯이 죽음을 주재하고 있다. 수십 수백 아니 수억만 년은 됐음직한 고목이 물기(생기)란 물기를 다 내어주고, 손으로 만지면 파삭파삭 바스러져 내릴 것 같은 오래된 몸뚱어리로 어둠을 지키고 있다. 마치 더 이상 고갈될 최소한의 연민조차 남아있지 않은 연민의 형해 같다. 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길어도 길어도 끝이 없는 연민의 화수분 같고, 연민의 화신 같고, 연민 자체 같다. 그렇게 연민이 한편의 살풀이며 굿판과도 같은 구천 위로 떠도는 발굴된 이름들이며 지워진 이름들을 낱낱이 불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들을 불러내면서 다독여주고 있었다.




여기서 지모란 사실 그저 흔한 나무둥치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그 흔한 나무둥치를 보는 순간 치마를 입은 머리 없는 어머니를 보았다(알아보았다?). 치마 입은 머리 없는 어머니가 흔한 나무둥치 속에 이미 모셔져 있었던 것. 그러므로 나무둥치 속에서 어머니를 본 것은 사실은 발견한 것이다. 지극한 눈으로 보면 보인다(혜안? 심안?). 무슨 말인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사물 속에 그리고 물질 속에 이미 완전한 형상이 들어 있다고 보았고, 그 완전한 형상을 에이도스라고 불렀다. 알다시피 후기 미켈란젤로의 숱한 미완성조각들은 바로 그 완전한 형상으로 구현된 신의 의지를 알아보았던, 미켈란젤로 자신의 철저한 무력감으로 무너져 내린 인간적인 좌절감을 증언해준다. 지금 보면 오히려 그래서 더 숭고해보이고 현대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렇게 작가의 눈엔 흔한 사물 속에 그리고 물질 속에 이미 완전한 형상을 덧입고 있는 지모가 보이고 갑옷이 보이고 투구가 보인다. 여기서 지모는 아마도 생명을 낳고 죽음(혹은 주검)을 거두어들이는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우주적 어머니를 의미하고, 갑옷과 투구는 죽임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살풍경한 시대에 존재를 보호해주는 살림의 미학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얼마 전 강화도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리고 칠흑 같은, 지옥처럼 캄캄하기보다는 투명하고 깊은 그곳의 밤하늘을 그렸다. 그 하늘 속엔 별이 총총하다. 그렇게 그림 속에 총총한 별들이 마치 하늘 위로 들려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존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 그리고 이름마저 지워진 사람들의 정령들 같다. 아마도 한 묶음 꽃을 던져도 메아리조차 되돌아오지 않는 넋들과의 대화가, 고무신마냥 작은 배를 타고 망자의 강(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건너온 영들과의 대화가, 그리고 어쩜 지금은 자연의 일부가 된, 더러는 별이 되고 때론 바람으로 떠도는 정령들과의 대화가, 하늘과 바다와 밤과 그리고 때론 파도에 떠밀려온 이름 모를 부목과의 대화가 작가의 작업에 또 다른 전기를 열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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