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양태근/ 생태조각 혹은 생태작업, 자연과의 소통 혹은 불통

고충환

양태근/ 생태조각 혹은 생태작업, 자연과의 소통 혹은 불통

 

 

먼저 양태근의 작업을 생태조각 혹은 생태작업으로 규정한 이유를 해명하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해보자. 처음엔 환경조각으로 명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환경조형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고, 작가의 작업은 환경조형물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태작업으로 규정한 이유는 작가의 작업이 조각에 근간을 두면서도 동시에 공간설치며 사진과 영상을 아우르는 폭넓은 것에 기인한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생태를 주제화한 것이고, 이 주제를 조각을 중심으로 한 다중매체에 담아낸 것이다.




양태근, 벽-진짜와 가짜, 가변설치, 철, 조명, 브론즈,감자, 2015


특히 공간설치는 조각의 범주를 공간으로까지 확장하게 해준다. 더불어 이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어쩌면 조각으로 그려진 허구적 상황(최소한 상상력의 산물)을 현실상황에 연장시켜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일종의 유사현실 혹은 대체현실 혹은 증강현실의 제안으로 나타난 연극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제안된 유사현실이 현실에 눈 뜨게 해준다.




현실에 눈 뜨게 해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현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한다. 이 무슨 이율배반인가. 여기에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가 있다. 일상을 낯설게 해 일상의 이면을 돌이켜보게 하고, 현실을 소외시켜 현실의 진상을 주지시키는 것. 그렇다면 그렇게 작가가 돌이켜보게 하고 주지시키고 싶은 일상의 이면이며 현실의 진상이 뭔가. 바로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되고 있는 생태환경이며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이다. 흔히 자연은 살아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자연은 과연 살아있는가. 지금도 여전히 자연은 그 속에 존재에 대한 비의를 품고 있고 주술을 부리는가. 그리고 그 남다른 능력으로 인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신비감을 자아내는가. 당연, 회의적인 것이 현실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에게 자연은 없다. 다만 도구적인 자연이 있을 뿐. 유원지며 관광지 그리고 전원생활 운운하는 풍문으로나 떠돌 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자연은 살아있다고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자연은 진즉에 죽었다. 여기에 파괴되고 있는 생태환경이며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을,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어쩜 진즉에 죽었을지도 모를) 자연과 더불어서 같이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인간을 주제화한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의가 있다.



법정 스님의 에세이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이 기거하는 암자는 산속에 있는 탓에 이러저런 동물들이 많았다. 매일 새벽이면 스님은 그 동물들에게 자신의 밥을 나눠주었고, 그렇게 밥을 얻어먹는 식솔들 중에 쥐 한 마리가 있었다. 부뚜막 위에 밥을 놓고 가면, 쥐가 기다렸다가 먹고 가곤 했다. 하루는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 쥐를 보고 스님이 말했다. 너 참 흉측하게 생겼구나, 다음 생애엔 꼭 사람으로 태어나거라, 라고.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부뚜막 옆에 그 쥐가 죽어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그 쥐는 분명 스님의 말을 귀담아 들었을 것이고, 그리고 죽은 이후에 인간으로 환생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환생하라는 스님의 주문은 인본주의(인간이 편하자고 하는 생각)는 아닐 것이다. 다만 윤회의 높은 단계를 염두에 둔 진심어린 덕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현실과의 차이 때문이고, 진상과의 차이 때문이다. 이야기와 현실, 죽은 자연과 살아있는 자연, 그리고 자연과 도구적 자연의 차이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현실인가, 아님 선문답인가.




법정스님의 이야기는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에 이러한 사실과는 다른 사람들의 선입견이 있다. 개가 오리무중의 문자를 쳐다보고 있다(-진짜와 가짜). 문자가 오리무중인 것은 개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며 개의 시각에서 본 것일 터이다. 그렇게 사람과 개는 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이건 인간 중심의 자기논리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소통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하는 것이고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나아가 오리무중의 문자는 개도 못 알아보고 사람도 못 알아본다. 무슨 재간으로 저 오리무중의 문자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과 개의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불통 이면에 사람과 사람 간의 불통이 더 문제다.




그 불통의 원인은 자기입장을 주장하고 자기색깔의 덫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에 있다. 입장과 입장이 부닥치고 색깔과 색깔이 충돌하는 것에 있다. 여기에 파란 똥을 누는 개가 있다(파란 똥). 그 개는 자기처럼 파란 똥을 누는 개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자기와 같이 파란 똥을 누는 개를 만나면 반갑게 꼬리를 치고, 빨간 똥을 누는 개를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낼 것이다. 여기서 색깔은 정치적인 색깔이며 이념적인 색깔을 의미한다. 그리고 특히 지금처럼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한 물신(페티시즘)의 시대에는 신분상의 색깔을 의미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유산자 계급이 향유하는 예술과 무산자 계급이 즐기는 문화가 다르다고 했다. 사사로운 취미며 취향마저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문화 계급론이다. 그런가하면 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명할 때 개인은 비로소 주체로서 태어난다고 했다. 지배 권력과 피지배계급,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 좌파와 우파 같은. 그렇게 사람들은 때론 똥 굵기를 가지고 싸우고, 더러는 똥 색깔을 가지고 다툰다. 그렇게 똥을 가지고 다퉈봤자 결국 똥인 것을, 혹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자연과 사람 간의 불통을 넘어 사람과 사람 간의 키 재기에 대한 통렬한 비판처럼 읽히고, 온통 똥 판인 인간관계에 대한 통쾌한 풍자 내지 해학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렇게 불통은 불신을 낳는다. 여기에 오리 가족이 있다(생을 위한 행진). 외관상 모처럼 나들이를 나선 오리가족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그 이면엔 일종의 증여에 바탕을 둔 문화기원론이 깔려있다. 한 부족이 증여를 하면 다른 부족은 그보다 더 큰 증여며 더 귀한 증여로 되돌려줘야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인데, 마치 상대방을 만나면 서로 더 화려하고 더 크게 몸을 부풀려서 세를 과시하는 동물처럼 증여란 곧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증여 주고받기(졸라 머리 굴리기)가 문화발전의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작업을 보면 오리발에 꽃이 꽂혀있다. 오리발과 꽃? 오리발에서 핀 꽃? 변종? 생태환경 파괴? 자연은 생명을 주는데, 인간은 자연을 도구화한다. 자연은 꽃을 내미는데, 인간은 오리발을 내민다. 나는 선의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오리발을 되돌려준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자연과 인간의 불통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이보다 더 시급한 그리고 심각한 인간관계를 비판하고 풍자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자연이 아프고, 인간도 아프다. 자연을 도구화하면 인간도 도구화되고, 자연이 상처를 입으면 인간도 상처를 입고, 자연을 죽이면 인간도 죽는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이 죽어가고 있고, 인간도 죽어가고 있다. 이처럼 죽어가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불통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도구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통 때문이다. 자연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라고 인간은 착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을 도구화할 수 있고, 도구화해도 된다, 라고 착각했다. 다시, 소통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소통하면 안 들리던 소리도 들리고, 가슴으로 소통하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

 


 양태근, 生을 위한 행진, 가변설치, 브론즈, 식물, 2015


양태근은 그동안 국내 최고의 야외설치미술 그룹인 야투(들에 던진다는 뜻)와 바깥미술회, 그리고 특히 20019월 창립한 야생동물들의 핵심작가로서 활동해오면서 줄곧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이 더불어 사는 유기적인 삶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진정한 생태적 환경을 복원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그렇다고 작가를 그저 환경운동가로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작가적 자의식으로 시대의 문제의식에 반응하는, 자연스런 그리고 때론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런 그의 작업에는 직설화법의 힘이 있다. 진정성만이 줄 수 있는 설득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우회를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직설화법을 조형 고유의 어법으로 환원해내는 갈무리가 있고, 감각적 쾌감이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