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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용궁에서 탈출한 토끼

고충환

한경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용궁에서 탈출한 토끼

 

 


가족연대기, 스킨십과 투게더. 한경화의 전작은 주로 가족을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가족연대기로 범주화할 수 있겠다. 소설로 치자면 자전소설 혹은 성장소설이 되겠다. 그리고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가족을 소재로 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대개 스킨십과 투게더라는 상황논리로 나타난다. 세부적으로 스킨십은 접촉을 의미하고, 투게더는 관계를 뜻한다. 가족공동체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형성이 주된 관심사로 등장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관계가 가족으로 아우러지는 일종의 작은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면, 접촉은 관계가 작동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 곧 관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아님 반응?)을 반영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접촉은 몸적이고 특히 심리적이다. 그 이면에 소통이란 그저 논리와 이해가 교환되는 차원이 아니라, 몸과 몸이 접촉되고 심리와 심리가 교환되는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공감?)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얼굴의 세부가 불분명하거나 나아가 아예 지워진 경우가 많다. 새로운 관계 형성으로 나타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친근함(캐니)과 낯설음(언캐니)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 복합감정이 더해질 수가 있겠다. 작가의 심리가 가족에게 투사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이와는 거꾸로 가족 특히 아이들의 눈을 통해본 작가 자신의 자의식을 반영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복합감정이며 이중성이 모든 분명한 것들이며 말로 혹은 의미로 환원되어질 수 있는 것들의 경계를 지우면서 무의식의 성분을 복원하고, 이로써 작가의 그림에 특유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한경화, 미인도




그렇다면 엄밀하게 그 분위기는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허접공주와 울랄라 백설공주에서 보듯, 그리고 가족 혹은 아이들을 대리하고 있는 의인화된 토끼가 등장하는 토끼의 집이며 금호동 앨리스에서 보듯 동화적인 상상력에 연유한 것이며, 동화에 대한 재독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잔혹동화라고 할 것까지야 없지만 전래동화가 은폐하고 있는 억압된 욕망을 복원하고 바로잡는 과정이며 경우로 보면 되겠다. 다시, 무슨 말인가.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동시에 지어낸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또 다른 책을 저술(각색?)한다. 작가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과정에서 불현듯 아님 은연중에 롤랑 바르트가 개념화한 작가적 텍스트(그저 수동적으로 읽기만 하는 독자적 텍스트와 비교되는)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동화책(이를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속으로, 지어낸 이야기며 판타지 속으로,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의 꼬리를 물면서 연이어지는 이야기의 무한순환 속으로 빠져든다. 혹은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순환구조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가상현실, 현실인식과 상상력,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워진 제3의 어떤 차원을 열어 놓는다.

 




아이의 눈으로 본 숲속과 피안. 작가의 그림은 자전적이고 서사적이고 문학적이다.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생성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생성되는 이야기가 최초의 이야기를 넘어서고, 원본과 사본과의 경계를 지우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가 무슨 순례자인 양 숲속으로 접어든다(숲속 대통령). 여기서 숲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의미하고, 아이의 눈을 통해본 작가의 무의식(숲속과 무의식이 동일시되는)을 의미하고, 아이 자신의 호기심천국을 의미한다. 그 숲에는 민화풍의 해학적인 호랑이가 살고, 호랑이보다 큰 토끼가 산다. 아이는 호랑이와 토끼 중 과연 누가 이 숲속의 진정한 제왕(주인?)인지가 궁금하다. 당연 호랑이가 되겠지만, 정작 호랑이는 종이호랑이처럼 평면적이고 얇다. 여기에 그 생긴 꼴이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이에 비해 토끼는 훨씬 실감이 있고(실사로 재현된), 게다가 호랑이보다도 더 크다. 그저 논리의 비약 내지 유별난 상상력으로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아이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학습효과가 아니라면, 타자의 눈을 통해본 경우가 아니라면, 선입견과 편견의 눈으로 본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도 보인다. 의식을 제로지점에 내려놓고 보면(현상학적 에포케), 생판 처음 보듯이 보면 그렇게 보인다. 혹은 이런 제3의 눈(심안? 혜안?)을 복원시키기 위해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어쩜 의식을 내려놓고 본 혹은 맨눈으로 본 세계의 진상이란 사실은 가변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우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의식이 세계를 만들고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식이 이런 세계를, 그리고 저런 이념이 저런 세계를 낳는 것. 여기서 아이의 눈은 진실을 본다. 아이의 눈은 즉각적으로 진실을 알아보는(알아채는) 동물적인 직감이 있다. 앎이 아닌 몸으로 보기 때문이고, 이치가 아닌 감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맨눈으로 보면 호랑이 흉내를 내는 종이호랑이가 우습고, 괴물토끼(엽기토끼?) 뒤에 숨은 토끼가 우습다. 이미지 정치학(정치에서 결정적인 것은 실제가 아닌 이미지)과 파사드의 정치학(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이면이 아닌 표면) 그리고 정치적 키치가 우습다(아님 재밌다?). 그렇게 작가는 아이(어른아이?)의 눈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며 정치적 현실을 풍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차안과 피안의 경계 위에 서있다(13월의 피안). 여기서 13월이라는 제목이 흥미롭다. 게오르규의 소설에서 유태인으로 오인 받은 주인공이 현실도피를 위해 25시라는 없는 시간을 지어냈듯이(한편으로 그 시간은 악몽 같은, 할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고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그런 비현실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13월은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반영하고 있고, 그 연장선에서 일종의 피안이며 유토피아를 암시한다. 어쩜 13월의 피안이란 제목을 통해서 작가는 13월이 없는 것처럼 사실은 피안도 유토피아도 없다는 반어법적 현실을 암묵적으로 증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가 맞닥트릴 암울한 현실을,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현실을, 상상의 도피처마저 허용되지 않는 불임의, 불모의 현실을, 상상을 무미한 현실로 소환해 들이는 가상적 현실을 증거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입센의 인형의 집 사이, 용궁에서 탈출에 성공한 토끼와 또 다른 현대판 용궁인 하수구 통풍구 사이, 그리고 어쩜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가상현실, 현실인식과 상상력,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저 홀로 셀카봉을 들고 서있다. 그 자체가 오리무중인 현실인식의 알레고리를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아이는 숲속으로 들어가고 미지의 세계에 입문한다. 피안으로 들어가고 오리무중의 현실에 눈뜬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반어법처럼 보이고,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한경화, 미인도 




성형미인. 작가는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동시에 각색한다고 했다. 그처럼 이번엔 전통적인 미인도를 가져와 현대판 미인도로 뜯어고쳤다. 얼핏 전통적인 미인도 그대로인데, 알고 보면 아담 사이즈의 전통적인 미인이 8등신 몸매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한 쭉쭉빵빵 미인으로 거듭났다. 이렇게 종이호랑이는 호랑이 뒤에 숨고, 토끼는 엽기토끼 뒤에 숨고, 아이덴티티는 페르소나 뒤에 숨고, 얼굴은 가면 뒤에 숨고, 이면은 표면 뒤에 숨는다. 그렇게 현대인은 정체성 지우기에 급급하고, 얼굴 지우기에 급급하고, 이면 지우기에 갈급하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다가 실제로 다 지워져서, 어쩜 현대인은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며 얼굴이 부재하는 시대 그리고 이면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오로지 표면만이 진실이고 진정인, 그런 초현실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성형미인도는 그런 초현실적 현실(비현실?), 얼굴도 핏기도 그리고 당연히 영혼마저 없는 사이보그 세상을 풍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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