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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정/ 제의적 퍼포먼스, 소지에서 불에 탄 산수에로

고충환

정희정/ 제의적 퍼포먼스, 소지에서 불에 탄 산수에로


곰브리치는 엄밀하게 재현적이기만 한 그리고 표현적이기만 한 그림은 없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 재현충동과 표현충동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고 했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진경과 의경이, 실경과 의경이 상호 삼투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경도 실경도 없다. 모든 그림은 결국 어느 정도 의경이랄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경이란 말에 실경과 의경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과 의중을 담은 그림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모든 그림은 의경이면서 심경이면서 관념화일 수 있다. 이때의 관념은 말할 것도 없이 주체에서 그림 쪽으로 건너간 것이며, 자연에 반영된 주체의 가치관인 것이며, 일종의 이상향이며 유토피아일 수 있다. 그리고 때로 디스토피아(유토피아와는 비교되는 억압된 실재가 만든 풍경)이며 헤테로토피아(없는 장소며 부재하는 장소)일 수도.  


시대가 바뀌면 관념이 달라지고, 관념이 바뀌면 형식이 달라진다. 예컨대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반영한 붉은 산수며, 문명의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현실을 그린 쓰레기 산수가 그렇고, 도시의 빌딩숲이 그려낸 스카이라인과 같은 인위적인 선을 전통적인 산수에 대입해 그린 도시산수 혹은 도시풍경이 그렇다.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을 그린 기억된 풍경이며, 희미해진 기억을 그린 흐릿한 풍경이 그렇다. 그리고 정희정은 불에 탄 산수를 그린다. 불에 탄 산수? 산불로 황폐해진 산수를 그린? 그처럼 황폐한 현실을 그린? 앞으로 그런 관념이며 현실을 반영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선 그런 것 같지는 않다.




骨巖_어떤 돌, 90㎝ x 90㎝,장지에 화선지 꼴라쥬,향,라이터, 2015


 
작가의 불에 탄 산수 그림은 이런 관념으로서보다는 방법론이며 형식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태워서 그린다. 큰 그림은 라이터로 태워서 그리고 작은 그림은 향불로 지져서 그린다. 라이터와 향불이 전통적인 붓을 대신한 것인데, 지두화며 죽필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나 뿌리를 붓으로 대용한 경우의 연장으로 보면 되겠다. 이것들은 다 뭔가?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형식논리로 치자면 남다른 선이며 개성 있는 선을 얻기 위한 것이다. 흔히 서양화는 색이고 동양화는 선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통적인 회화에서 선은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준과 필과 획이 세부적으로 다르지만, 크게는 대동소이하게 이런 선에 맞춰져 있다. 


작가는 태운 종이 조각을 화면에 중첩시켜 첩첩이 중첩된 산세며 능선을 재현한다. 먹그림의 이력으로 감을 잡지만, 종이 조각이 태워지면서 만들어내는 가장자리 선은 완전한 통제를 넘어선다. 감과 우연이 상호작용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은 희한하게 먹의 선염을 닮았고, 먹의 농담을 머금는다. 그리고 여기에 한지를 중첩시키는데, 알다시피 한지는 반투명이다. 그래서 마치 엷은 먹을 덧발라 밑 색이 우러나오는 것처럼 종이와 한지가, 한지와 한지가 하나의 층위로 어우러져서 은근하고 은은한 색감과 질감을 자아낸다. 이처럼 종이며 한지를 태운 자국이 어우러져서 첩첩이 중첩된 산세를 만들고, 앙상한 골산을 만들고, 아련한 능선을 만들고,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만든다. 실제로도 작가는 이 산들을 골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골산은 우리 산을 표현하기에도 걸맞다. 우리 산은 늙어서 옆으로 퍼지는 부드러운 능선도 있지만, 대개는 바위산이 많고 기암절벽이 많다. 남다른 선을 얻기 위한 형식논리도 있겠지만, 작가의 무의식에 흐르는 기억과 관찰이 작용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작가의 무의식에 흐르는 기억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산을 좋아하는 아버지 탓에 어릴 적부터 산을 자주 찾았고 산에 친숙했다. 한국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치는 코스로 보기 이전에 작가는 산을 일종의 내적필연성의 한 계기로서 심중에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 년에 열두 번도 넘는 제사를 치렀고, 제사에는 어김없이 향불이며 소지가 등장한다. 특히 소지는 종이를 태워 재를 만들어 날려 보내는 것인데, 죽은 사람을 상징한다. 죽은 사람? 작가의 그림은 삶과 죽음이, 생성과 소멸이 순환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이며 존재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워서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이 스스로 생성되게 한다. 소멸을 통해서 그림이 재생되게 한다. 차후에 죽음과 소멸과 부재, 공과 허와 무를 통해서 존재를 생성시키고 형상을 낳는, 없는 것을 통해서 있는 것의 원인을 밝히는 근원에 대한 그리고 그 생성운동에 대한 이치에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엿보인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이렇게 불에 탄 산수며 한지를 태워 만든 산수의 종합이 일어난다. 얼핏 작가의 그림은 남다른 선을 얻기 위한 형식논리의 소산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작가의 유년의 기억이며 무의식과 같은 내적 필연성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은 산세를 닮았고 골산을 떠올리게 한다는 선입견을 제외하고 있는 그대로 보면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닮았고 주름을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로도 작가의 그림을 보면 첩첩이 중첩된 천 개의 고원 같고 겹겹이 포개진 주름 같다. 그리고 알다시피 고원도 주름도 들뢰즈의 리좀을 형용하는 개념이다. 리좀은 구근류의 뿌리를 의미하고, 뿌리가 따로 없는 뿌리를 의미하고, 모두가 뿌리인 뿌리를 의미하고, 다중심을 의미하고, 그 자체 이미 대우주인 소우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적이며 완성과 같은 이미 가 닿은 어떤 지점으로서보다는 과정과 이행, 운동과 생성원리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소멸을 통해서 스스로를 생성시키고 재생시키는 자연의 원리를 그려놓고 있었고, 그 항상적인 생성원리를 그려놓고 있었다. 종이를 태운 자국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마치 알 수 없는 얼룩처럼 어느 정도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고, 기본적으론 예측불가능성에 노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며, 그리고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것의 우연한 포획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불에 탄 산수를 통해 실경(감각적인 풍경)을 재현하고 있었고, 의경(관념적인 풍경)을 반영하고 있었다. 형식논리로 치자면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 불에 탄 종이 조각을 아예 일종의 오브제처럼 사용한다. 콜라주에서 오브제로 확장되고 심화된 경우라고나 할까. 불에 탄 종이 조각을 화면에 콜라주하는 대신에 그 자체로 중첩시켜 제안하는데, 여기서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결정적이다. 중첩된 종이 조각이 일종의 산수 혹은 풍경처럼 보이고, 높낮이에 따라서 그 산수 혹은 풍경은 매번 다르게 보이고, 이는 그대로 전통적인 시점논의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산수그림은  전통적인 산수화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고 있었고, 전통을 현대로 전유하는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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