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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달/ 삶의 유비로서의 산수, 굴곡진, 주름을 만드는

고충환

권영달/ 삶의 유비로서의 산수, 굴곡진, 주름을 만드는


묵상을 그리고 사의를 그리다. 묵상, 산에 들다, 삶, 그리고 자연. 작가 권영달이 지금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들에 부친 주제들이다. 형식논리에 천착한 순수추상회화에서처럼 주제가 이렇다 할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이를테면 구상회화나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반구상 회화에서 주제는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의미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주제가 그림의 의미내용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기에 따라서 회화는 암시의 기술일 수 있다. 그린 것을 통해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것. 그러므로 어쩜 그리는 기술이라기보다는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기술인 것. 


작가의 그림은 형식적으로 반구상회화로 정의된다고 했다. 순수추상회화도 아니면서 구상회화도 아닌, 추상회화의 형식논리와 구상회화의 재현과 서사를 하나로 합치해놓은 그림이고, 추상과 구상이 그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로 합체된 그림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혹은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먹그림의 성정으로 치자면 그저 무분별한 먹자국과 비정형의 얼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어떤 의미내용을 함축해놓고 있는 그림이며, 따라서 일정하게는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그림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무슨 의미내용을 재현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함축하는가.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묵상화라고 부른다. 묵상이란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염원하는 것이다. 특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마음속 생각을 그린 그림이다. 그 자체가 심의 혹은 사의와 관련된 전통적인 관념산수와도 통한다. 전통적으로 산수는 산수에 의탁해 기억(산수를 주유하면서 머릿속에 담아온 것)과 이상(이상향)을 그린 것이고, 이는 시점을 그린 서양의 풍경과 비교된다. 전통적인 산수에도 시점이 있지만, 그 시점은 이동하는 시점이며 움직이는 시점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시점이 풍경의 고정된 시점과 비교되고, 그렇게 산수와 풍경이 대비된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무슨 생각을 그린 것인가. 작가는 묵상이란 주제를 자연과 흐름이란 부제로 뒷받침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런, 원래 그런 존재를 의미하고, 따라서 호 불호와 같은 가치판단을 그리고 미와 추 같은 미학적 판단을 넘어선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흐른다. 모든 존재는 변화의 와중에 있고, 여기서 저기로 이행하는 도중에 있다. 결정적인 것도 없고 고정적인 것도 없다. 항구적인 것도 없고 항상적인 것도 없다. 다만, 때론 그 변화가 미비해서 눈에 띠지 않을 뿐, 변화무상하고 천변만화한 존재의 운동성이 있을 뿐이다. 유일하게 항구적이고 항상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이렇듯 밑도 끝도 없는 존재의 운동성이 있을 뿐이다. 좀 장황하다 싶지만, 작가가 자신이 그림 그림을 묵상화로 명명한 이면에는 이런 자연의 순리와 존재의 이치를 관통하는 자신만의 세계관이며 비전이 탑재돼 있다. 그 세계관이며 비전을 수묵의 형식실험이 현저한 먹그림이며 전통적인 산수를 재해석한 자신만의 현대판 산수화에다 의탁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산수에 의탁해 묵상을 그리고 사의를 그린다.  



삶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삶이다. 작가는 묵상을 그리고 사의를 그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묵상과 사의는 자연의 순리와 존재의 이치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을 삶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작 작가의 그림을 보면 다만 무분별한 먹자국과 비정형의 얼룩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먹자국과 얼룩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형상들, 이를테면 나무와 숲, 잡초와 들풀, 그리고 산과 같은 자연이 있을 뿐, 거기엔 삶의 현장성과 생생한 현실을 증언해줄 그 무엇도 없다. 심지어 사람마저도 없는 그의 그림은 얼핏 순수한 자연을 대상화한 그림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다시 전통적인 산수화를 호출할 필요가 있는데, 전통적인 산수화에는 심지어 사람이 그려지지 않을 때조차 사실은 사람을 전제한 것이다. 주체가 기억으로 되불러낸 장소며 이상과 같은 관념의 형태로 그림 속에 투사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종의 암시 내지는 생략법으로 볼 수 있겠다. 실제로 문학에도 곧잘 주어를 생략하기도 하고, 보다 적극적으론 저자의 죽음 운운하기도 한다(누가 쓰는가? 글을 통해 누가 말하는가? 단독자로서의 저자인가? 아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나 가치관을 대변하는 대리주체로서의 저자가 말하는가?). 


결국 자연에 의탁하고 산수에 의지해 자기를 투사하고 존재를 암시한 그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걸어 들어간다? 무슨 의미인가. 그 의미를 작가는 산에 든다고 표현한다. 산에 든다? 든다는 것은 경계를 전제한 개념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며, 여기서 저기로 이행한다는 뜻이다. 작가는 좀 거창하게 말해 산에 입문하는 것인데, 그 입문은 거듭나는 삶을 위한 것이며,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순례자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산은 무슨 의미인가. 굳이 산에 든다고 표현할 만한 무슨 거듭날 계기라도 있는가. 그렇다고 지레 심각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작가에게 산은 호 불호와 같은 가치판단을 넘어서고, 미추와 같은 미학적 판단을 넘어서고, 그리고 진위와 같은 사리판단을 넘어서 스스로 그렇게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존재의 원형이며 본성을 상징한다. 판단은 그저 인간의 일일 뿐, 그 판단을 싸안는, 그리고 나아가 그 판단에 연유한 상처마저 싸안는 자연의 무한하고 무궁한 포용력을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에게 산과 자연과 존재는 하나였고, 작가는 그 하나를 그린다. 어쩌면 실경이나 실사보다는 관념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고, 그러므로 그림에 대한 이런 태도에는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수신적인 일면이 있다. 말하자면 자연에 투신하고 자연에 동화되고 싶은 관념 혹은 염원을 그린 것일 수 있다. 


세부적으로 작가가 자연을 그리기 위해 불러들인 소재로는 나무와 숲, 잡초와 들풀, 그리고 산이 있다. 이 가운데 작가는 잡초와 들풀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나무와 숲과 산이 알만한 형상으로 다가온다면, 화면의 밑바닥에 깔린 흔적들 이를테면 그저 무분별해 보이는 먹자국과 비정형의 얼룩들이 잡초와 들풀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잡초와 들풀은 어쩜 나무와 숲과 산보다 더 근원적인, 그런 만큼 작가 자신의 인성이며 성정을 더 잘 대변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으로 대변되는 거대담론과는 비교되는 미시담론을 대리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잡초와 들풀은 삶의 속성을 닮았다. 밟혔다가도 다시 살아나고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존재의 끈질긴 생명력이며 삶의 근성을 상징한다. 작가는 아마도 그 생명력이며 근성에서 자신과의 동일시를 느끼고 애정을 느끼고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작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구김산수 혹은 주름산수. 작가는 한지를 구겨 충분한 구김을 만든 연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화면에 미세한 굴곡이 생기고, 그렇게 굴곡진 위로 붓질이 지나가고, 그 중 일부는 굴곡진 아래쪽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붓질은 끊어질 듯 연이어지고, 연이어지다가도 끊어진다. 그렇게 단속적이고 단절적인 붓질들이 잡초며 들풀을 조성하고, 그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나무를 만들고, 숲을 만들고, 산을 일궈낸다. 그래서 작가의 작화방식은 일종의 구김산수 혹은 주름산수로 명명할 만하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화방식은 그저 방식에 지나지 않으며 형식논리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가는 산수에 의탁하고 자연에 의지해 사실은 자기를 그리고 존재를 그린다. 그래서 자기며 존재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전달하게 해주는 방법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심해왔고, 그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구김산수며 주름산수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구김산수 혹은 주름산수는 그저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삶에 대한 태도며 그림을 대하는 입장과 관련이 깊다. 무슨 말인가. 그림처럼 삶이 꼭 그럴 것이다. 삶은 미세한 주름처럼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떠안고 살고, 굴곡진 화면처럼 부침을 거듭하면서 살고, 연이어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불현듯 끊어지는, 그리고 끊어질 듯 하다가도 연이어지는, 그런 모진 인연과 더불어 산다. 더욱이 주름은 자기의 일부를 그 속에 숨기고 있어서 그 진면모를 알 수가 없다. 그 진상을 알기 위해선 표면을 넘어 이면을 꿰뚫어야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말 못할 속사정이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자의식으로 품고 산다. 작가는 말하자면 그렇듯 굴곡진 자신의 삶을 그리고 싶었고, 사람들이 품고 살 자의식(아마도 상처가 만들어준)을 그리고 싶었다. 


질 들뢰즈는 사유, 그러므로 어쩜 삶을 주름에다 비유했다. 삶이란 말하자면 저마다 주름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어떤 주름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중요하지만, 주름 속을 돌파해 주름의 진면목이며 진상에 도달하기 위해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애정이 있어야 하고 연민이 있어야 한다. 누가 잠자는 상처를 들추어내는가. 누가 사람들의 상처에 관심이나 있는가. 작가의 구김산수며 주름산수는 이렇듯 무관심의 시대(그리고 어쩜 무심한 시대)에 새삼스레 대타적이고 이타적인 존재론을 역설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고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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