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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훈/ 모순과 차이를 넘어서는, 싸안는, 파생시키는

고충환

성동훈/ 모순과 차이를 넘어서는, 싸안는, 파생시키는 


아이로네이아. 아이러니의 어원으로서 역설이라는 의미와 함께 위장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스스로 무지를 가장해 지로 위장한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에서 유래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위장이 존재한다.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무지를 가장하는 위장이 그 하나이고, 스스로의 무지를 숨기기 위해 지를 가장하는 위장이 또 다른 하나이다. 진정성을 지향하는 위장과, 남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위장이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에는 위장이 있고 역설이 있다. 지를 통해서 무지를 폭로하는 대신, 무지를 매개로 무지를 폭로하는 역설이 있다. 이런 위장과 역설은 당시 수사학(말의 잔치를 배우는 기술. 요새 식으론 언변)이 난무하는 가운데 말의 진정성(말은 원래 로고스 곧 이성을 상징했다)을 일깨우기 위한 소크라테스 특유의 방법론, 아니 차라리 말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가 있겠다. 


세상에는 이처럼 두 종류의 위장(사람을 현혹하는 말을 의미하는 독사와 진정한 말을 뜻하는 에피스테메)이 공존하고 있고, 그 진위를 가름하기도 어렵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둘 다 진실을 표방하고 있고, 더욱이 지금처럼 이미지의 정치학이 판을 치는 표면적인 시대에는 더욱이 그렇다. 진정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람들은 더 이상 이면을 보려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면이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그저 표면이면 족하고 표면으로 충분한 것이다. 봇물이 터진 이미지의 홍수 속에 몸을 내맡기면 그 뿐, 그 흐름을 타는 것이 중요할 뿐. 이런 이미지가 실재를 가리고 있는 탓에 거짓을 진실로 가장하기는 쉽지만, 진실이 진실로서 드러나기란 어렵다. 어렵사리 그 진정성이 판명된다 해도 이미 게임아웃 된 뒤라 진실공방이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이처럼 거짓은 컴퓨터고 진실은 형광등인 시대에 누가 고루하게 진실을 운운할까. 


그래서 아이로네이아를 주제로 내세운 성동훈의 태도가 뜬금없어 보이고, 그래서 오히려 더 의미 있어 보인다. 뭔가 성동훈의 분신이며 아바타랄 수 있는 돈키호테다운 발상 아닌가. 진실은 거짓을 위한 포장지로나 쓸 척박한(차리라 천박한) 시대에 표면을 돌파해 진정성을 일깨우려는 그 다운 태도가 아닌가. 돌이켜보면 돈키호테야말로 이성을 상실한 시대를 돌파하는, 어쩜 유일한 그리고 진정한 이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로네이아, 위장과 역설, 그리고 돈키호테는 말하자면 진작부터 성동훈의 멘탈리티를 지지해온 지축이었고, 그의 조각은 그 개념 축을 탄탄하게 해줄 구실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이 시대에 무지를 가장하고 돈키호테로 위장한다. 이런 가장과 위장은 역설을 위한 것인데, 그 역설의 칼날이 사회를 향하고 예술을 겨냥한다. 거짓이 진실을 위장하고 그렇게 위장된 거짓이 진실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사회는 그렇다 치고, 예술은 어떤가. 특히 개념미술 이후에 담론만 무성한 미술판에서 진정성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무슨 기시감도 아닌 것이 꼭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복제 어슷비슷한 것이 판을 치고, 여기에 자기복제도 더 이상 낯설지가 않은 판국에 작가의 예술가적 정체성이며 오리지널리티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아마도 작가가 막 조각을 시작했을 초기(1990)에 작가는 무식한 작업만이 살길이라고 다짐했고, 아무 생각 없이 감각이 부르는 대로 따르기로 작정했다. 세상의 모든 예술을 섭렵한 연후에나 나올 법한 통찰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만, 산전수전공중전 모두 겪어본 이후에나 가능할 법한 도통한 소리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 이른 것이어서 의외고, 그래서 오히려 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이종과 변종(초현실주의적으론 의외의 결합이며 예기치 못한 관계를 의미하는 사물의 전치, 요새 유행하는 용어로 치자면 융합과 통섭에 해당할. 그리고 좀 더 그럴듯하게는 질 들뢰즈의 리좀? 뿌리 없는 말? 귀환하지도 소환되지도 않는 의미? 밑도 끝도 없는 다른 의미들을 파생시키는 의미? 차이를 파종하는 의미?)은 작가만의 전략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돌이켜보면 작가의 다짐은 개념과 담론만 무성한 미술 현실에서 무식을 가장한 것이었고, 감각의 부름에 따른 그의 조각은 오히려 작가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게 해준 원인이었고, 진정성에 몸을 맡겨 진정성을 얻게 해준 역설적 계기로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자신만의 가짜왕국을 건설했고, 그 가짜왕국의 시민들을 소개 전시한다. 그가 건설한 가짜왕국은 사실은 가짜가 판을 치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그래서 종래에는 가짜와 진짜가 오리무중인, 그래서 진정 가짜왕국인 사회와 미술판을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가짜왕국이야말로 사실은 진짜왕국이며, 진짜왕국이 오히려 가짜왕국으로 폭로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는 그대로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돈키호테가 오히려 진정한 이성이며 유일한 이성으로 판명되는 것과도 통한다. 돈키호테는 어쩜 미쳐버리고 싶은데 정작 미쳐지지가 않는, 그런 이성의 역설 혹은 역설적 이성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가 이성의 역설 혹은 역설적 이성을 조형으로 옮기는 방법론이 이종이고 변종이다.  


그리고 이종과 변종은 형식적으로 온갖 이질적인 재료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결합과 이로부터 파생된 예기치 못한 관계로 나타난다. 처음에 그 결합과 관계는 알다시피 철과 시멘트로 나타났고, 점차 여기에 가죽과 투명유리구슬, 폐비행기 부품과 용광로에서 추출한 폐철 슬러지, 그리고 최근에는 청화백자와 청자 같은 자기와 각종 종교적 아이콘(신상)이 가세된다. 작가는 가급적 재료의 본성을 변형하지 않고 물성 그대로를 부각하는 편인데, 그런 탓에 재료 자체가 어떤 의미 있는 서사를 암시하고 대변해주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가죽이 에로티시즘을 암시하고, 투명유리구슬이 빛을 매개로 한 판타지를 불러들이고, 폐비행기 부품이 첨단이라는 문명의 명과 쓰레기에 해당하는 문명의 암을 대비시키고, 자기를 매개로 전통을 소환하고, 신상을 끌어들여 조형에 신화적인 빛을 더한다. 


이처럼 재료의 본성만을 놓고 봐도 정신이 어지러울 만큼 도대체가 개연성 내지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전통과 현대가, 과거와 미래가, 현실과 판타지가, 문명과 자연이, 첨단과 쓰레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고 자연스레 어울린다. 부조화를 통해 조화를 그리고 불협화를 통해 협화를 일궈낸다는 점에서 바로크의 현대판 버전을 보는 것 같고, 좀 더 그럴듯하게는 멀쩡한(사실은 다만 멀쩡해 보일 뿐인)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일그러진 초상을 폭로한 것이란 점에서 미하일 바흐친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도 통한다. 나아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우연하고 무분별하게 공존하고 뒤섞이는 모순이 현실 혹은 삶의 일부로서 싸안아지는, 그런 존재론적 알레고리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쩜 이와는 반대로 모순(어쩜 생명력의 무분별한 그리고 건강한 분출을 상징할)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코뿔소를 타고 있는 구름남자를 조형했다. 돈키호테의 또 다른 버전이고 자화상의 또 다른 한 형식이다. 서양의 돈키호테가 말을 타고 있다면, 작가의 돈키호테는 소를 타고 등장한다. 십우도에서처럼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소는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찾아가는 삶의 과정을 상징하며, 굳이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정서의 자연스런 표출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 소가 코뿔소로 변주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아마도 우직한, 묵묵한, 앞뒤 돌아볼 것 없이 그저 가는 작가의 자화상일 것이다. 


그 소를 구름남자가 타고 있다. 구름남자의 구름머리는 사유의 유목을 상징한다. 구름처럼 사유의 유목에 걸 맞는 소재도 따로 없을 것이다(때로 유목은 사슴으로 상징되기도 하지만). 구름은 말하자면 항상적인 이행이 있을 뿐, 다만 한 순간도 정박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적인 형상도 아닌 것이 온갖 형상을 짓고, 최종적인 형태도 없는 것이 모든 형태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천변만화한 존재를 상징하고, 변화무상한 우주를 상징하고, 흐르는 것들이며 덧없는 것들을 상징하고, 흐르는 구름처럼 그리고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움켜쥘 수 없는 삶을 상징한다. 삶이 흐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의미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의미화란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형태를 전제한 것이고, 삶은 도대체가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형태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뿔소를 타고 있는 구름남자는 아마도 그런 삶의 알레고리를 상징할 것이다. 


자화상(엄밀하게는 자소상)은 다른 소재에 비해 작가의 자의식을 좀 더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편이다. 그렇게 다른 자화상을 보면 부러진 칼을 들고 있는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부러진 칼이고 무뎌진 칼이지만, 그래도 칼은 칼이다. 무기력한 현실을 상징할 수도 있겠고, 상처투성이의 현실을 상징할 수도 있겠고, 이성이 마비된 시대에 오히려 이성을 상징하는 돈키호테처럼 사실은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이성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자화상은 존재론적 자의식을 표출한다. 그리고 작가의 자의식은 사회적 현실을 겨냥하기도 한다. 상어가(사실은 바다가 그리고 무지가 그리고 혹 무관심이) 집어 삼킨 세월호 사건을 회고하면서 만든 검은 통곡이 그것이다. 마치 그때 그곳의 물살처럼 거친 상어의 몸에는 아마도 희생자의 수에 해당할 300여 개의 청화백자 구슬을 새겨 넣었다. 구슬에는 얼핏 꽃과 나비 그리고 물고기를 초현실적으로 각색한 것 같은, 전통적인 화조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 자연을 매개로 한 이상향을 표현한 것 같은, 그런 세밀화를 그려 넣어 위로와 치유의 의미를 더했다. 


근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우로 치자면 각각 불과 물과 바위를 소재로 한 일련의 의자와 테이블 작업을 들 수가 있겠다. 이 작업이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대만 체류시절을 대변해 줄 철 슬러지 작업이 거의 원형 그대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년전 작가는 대만동호철강 아트파운데이션에서 50톤에 달하는 철강과 제작을 지원받은 적이 있고,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자신만의 형식실험을 꾀할 수가 있었다. 용광로에서 추출한 철 슬러지는 아직 가공방법이 따로 없어 재활용할 엄두를 못내는 것이지만,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을 통해 그 방법을 찾아냈고, 이로써 자신만의 조형으로 갈무리해낼 수가 있었다. 마치 용암이 분출해 흘러내린 형태 그대로 고착된 것 같은, 철의 원래 재료 그대로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날 것 그대로의 철물을 이용해 작가는 의자와 테이블을 만들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유일한 조형이고, 성동훈이기에 가능한 조형이다. 


그렇게 작가는 각각 불의 의자, 물의 의자, 그리고 바위 의자(그리고 테이블)를 만들었다. 아마도 여기에 공기 의자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이 작업에서 작가는 각각 흙(바위 혹은 대지), 물, 불, 공기(모든 존재가 그렇듯 철물조형에도 꼭 필요한 원소 혹은 호흡 혹은 생기)로 이루어진 세계 4원소설을 조형을 위한 원리로서 도입하고 있다. 아마도 존재가 유래했을 기본물질을 매개로 존재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존재의 순환원리를,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이 우연하고 무분별하게 결합하는 존재의 운동 원리를 재해석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질을 다루는 작가의 작업이 돈키호테로 대변되는 실존적 자의식의 경계를 넘어 유물론적인, 신화적인, 그리고 원형적인 경우로까지 그 스펙트럼이 확장되고 심화되는 계기로 봐도 되겠다. 부연하면, 의자와 테이블은 작가의 전작에서도 곧잘 등장하던 경우로서, 흔히 권력을 상징한다. 하지만 근작에선 이보다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잊히거나 억압된 것들, 이를테면 물질(질료)이 주는 힘과 원형적 자연 그리고 아마도 원초적 에너지(생명?)에 대한 염원을 담았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5년여의 대만시절을 접고, 이제 인도시절을 예비하고 있다. 대만시절이 철 슬러지를 이용한 조형작업으로 대변된다면, 이제 새롭게 열릴 인도시절은 아마도 신상을 모티브로 한 조형작업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들이는 나라, 세상의 모든 신들이 공존하는 나라, 이종과 혼성과 변종이 고유의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나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의 나라, 삶과 죽음이 경계를 허물고 모순과 이치가 몸을 섞는 나라에 세계시민 성동훈이 뜨면 분명 지금까지와는 판이한, 뭔가 큰일을 치를 것이다.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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