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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 도화헌에서 별과 놀다

고충환




수묵화의 기본은 지필묵이다. 그 중 먹의 용법에 해당하는 묵법과 필의 용법에 해당하는 필법은 수묵화의 본질이랄 만하다. 이처럼 재료 자체는 단출하지만, 묵법과 필법이 종이에 반응하는 현상 여하에 따라서 천변만화의 변화무상한 세계가 가능해진다. 그림에서 유독 이런 묵법과 필법이 두드러져 보일 때, 비록 자연과 같은 사물대상에 의탁할 때조차 이런 묵법과 필법이 사물대상보다 강조돼 보일 때, 그 그림은 수묵화의 본성을 추구한 그림일 수 있다. 사물대상이 수묵화의 본성에 바쳐진 형식실험을 위한 구실에 머무는 것이다.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져 재현과 서사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때 이런 수묵화의 형식실험이 유행이던 적이 있었다. 수묵화운동이 그것으로, 이때의 형식실험이 순수한 묵법과 필법의 심화와 변주로 흐를 경우에 그림은 대개 추상미술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말하자면 엄격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경우가 아니라면, 생체리듬에 자기를 의탁해 그린 소위 몸 그림의 형태로 나타나고, 추상의 형식을 빌려 내면을 외화한 일종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의 경우로 현상한다. 서양화의 논리로 치자면 액션페인팅이 되겠고, 그 수묵화 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웬 수묵화의 본성 운운이라고 하겠지만, 정경화의 그림은 한눈에도 수묵화의 본성에 해당하는 묵법과 필법이 두드러져 보인다. 비록 자연과 같은 사물대상을 그리고는 있지만, 여기서 사물대상은 묵법과 필법의 용법을 위한 구실처럼 보이고, 최소한 묵법과 필법의 용법 속에 사물대상이 해체돼 보이고 일체화돼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수묵화의 형식실험의 연장처럼 보이고, 그 이후를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앞서 말할 것처럼 재현과 서사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터여서 오히려 그 만큼 더 귀해 보이고 의미 있어 보인다. 수묵화의 본성을 견지하는 한에서 자기변신의 가능성이며 운신의 폭을 가늠하는 경우여서, 말하자면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그 본성을 심화하고 변주하는 경우여서 그 만큼 신뢰감도 더하는 편이다. 


먹빛과 놀다, 한지에 수묵, 2015

작가의 그림은 묵법보다는 특히 필법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남다른 필법을 매개로 자기만의 그림이 가능한 지점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모필 대신 죽필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데, 대나무를 삶아 나무망치로 두드리면 섬유질 구조가 잘게 갈라지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이 과정으로 생대나무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제법 모필을 대신할 만한 부드러운 필을 얻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나무의 본성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모필에 비해 먹을 머금는 양도 시간도 턱없이 짧은 것이 현실이고, 작가는 오히려 이를 차별화를 위한 긍정적인 계기로 받아들인다. 당연히 처음부터 차별이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았을 터이다. 허다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필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섣부른 판단일까. 적어도 현재 그 필법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고, 그 과정에서 꽤나 숙련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죽필은 모필에 비해 먹을 머금는 양도 시간도 턱없이 짧다고 했다. 여기서 갈필과 건필과 속필이 유래한다. 마치 마른 붓으로 그린 듯 그 구조가 성근, 먹 자국과 먹 자국이 중첩돼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는 대신, 그 거리며 간격이 성글성글하고 세세한 필선들이 여실한, 한눈에도 묵법보다는 필법이 두드러져 보이는, 그런 건조하고 팍팍한 느낌의 화면이 가능해진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치 죽필을 이루는 모발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세선들로 혹은 점점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처럼 제어하기가 만만치가 않은 탓에 여차하면 사물대상의 경물은 고사하고 자칫 필선들의 무분별하고 우연한 흔적들의 난무에 머물 수도 있는 일이다. 무슨 말인가. 필이 머금은 먹이 미처 소진되기 전에 사물대상을 화면 속에 붙잡아 들일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사물대상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그 본질을 그림 속에 들어앉혀야 한다.

다시, 무슨 말인가. 그림과는 별개로 사물대상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물대상의 본질이 뭔지를 파악하는 일이, 체득하고 체감하는 일이 관건이다. 사물대상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나무와 숲, 바위와 산과 같은 자연일 때 그 본질은 그저 사물대상 자체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알다시피 모든 사물대상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관계야말로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렇게 이것은 저것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저것은 이것으로 인해 그 존재가 비롯된다. 그리고 그렇게 이것과 저것 사이에 바람과 공기, 빛과 어둠, 습윤한 기운과 건조한 기후와 같은 비물질적 매개들이 관계망을 이룬다. 사물의 본질이란 바로 이렇듯 그 관계 속에서의 유기적인 전체를 꿰뚫는 일이다. 비록 나무 한그루와 같은, 부분을 그릴 때조차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사물의 본질이란 다만 사물대상에 속하는 일이며 그것에 한정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보기에 따라서 사물의 본질이란 사실은 인간의 일이다. 사물대상은 그대로인데, 이것이 본질이다 혹은 저것이 본질이다, 하고 본질을 따지는 것이다. 이런 따짐이 중요한 것은 본질을 매개로 사물과 내가 만나지기 때문이다. 사물대상의 본질(혹은 본성)과 나의 본질(혹은 본성)이 하나로 만나지는 지평융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무슨 말인가. 사물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본질을 파악하는 주체의 본질에 해당하는 무엇이 움직여줘야 한다(공감?). 그렇게 나의 부분이 사물대상에 스며들어 사물대상의 부분이 되어져야 한다. 사물과 내가 상호작용하는 것이며, 여기서 죽필은 이런 주체와 사물대상의 상호작용이며 운동성을 그림으로 거두어들이기에 적절하다. 

이로써 관건은 사물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리고 마침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붓질로 붙잡아 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소소한, 씁쓸한, 스산한, 건조한, 팍팍한, 푸근한, 우호적인, 불온한 나의 생체리듬이 나무에 아로새겨지고, 숲을 어둑하게 하고, 이름 모를 들풀을 흔들어야 한다. 앞서 관계가 존재의 존재방식이라고 했다. 여기에 이행을 덧붙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그 자체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실체를 갖는 것이기보다는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고 운동의 와중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운동의 와중에 있는 것을 그리기 위해선 움직이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움직이는 느낌? 바로 생기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흐르는 바람의 질감(관계)이 느껴지고, 숲을 흔드는 기운(존재의 운동성 혹은 생기)이 감지된다. 

이 모두가 죽필이기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환원적 논리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죽필에 의한 특유의 필선과 필법으로 이뤄낸 것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용필에서 농필로 건너간다. 필법을 구사하던 것에서 필법을 가지고 노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저 법을 깨우진 이후에 법을 버리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그렇게 법을 버려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경우로서보다는, 물론 어느 정도 그 경지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사물대상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고 이에 대한 필법의 분배와 분유에 대한 경우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사물대상을 정의하는 데 바쳐진 필법으로서보다는 사물대상에 구애받지 않는 필법, 사물대상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사물대상을 드러내는 필법, 그 자체 자족성을 획득한 필법에 대한 작가의 태도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별빛과 놀다, 한지에 수묵, 2015

그렇게 작가는 도화헌에서 필과 논다. 그리고 근래엔 도화헌에서 별과 논다. 도화헌? 작가가 이따금씩 들러서 놀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전시도 하는, 고흥에 있는 한 공간이다. 알다시피 고흥엔 우주센터가 있다. 문학적 수사를 빌리자면 하늘에 가장 가까운 동네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만큼 그곳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다른 밤하늘과 다르고, 별이 주는 인상도 남다르다. 작가는 그 밤하늘의 별을 그린다. 도화헌에서 먼저 나무와 숲, 바위와 산과 같은 자연경물을 그리고, 이제 그 경물이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에 대한 인상으로 옮아온 것이다. 

자연경물을 그릴 때는 필법이 제격이었고 죽필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러나 밤하늘은 문제가 다르다. 이번엔 필법보다 묵법이 구사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밤하늘을 그린 근작에선 묵법이 두드러져 보이고, 이로써 투명하고 맑고 깊은 밤하늘의 질감이며 깊이가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온다. 깊이라고 했다. 마치 심연과도 동격일 밤하늘은 그 깊이를 감각의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관건이다. 그렇게 무한하고 무궁한 세계, 밑도 끝도 없는 깊이로 열린 세계와 대면하고 있다는, 어떤 정적이면서도 격한 감정(정중동? 파토스? 숭고미?)을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낮이 인간의 인식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밤은 인간의 인식을 벗어난 것들, 인간의 인식이 미칠 수 없는 것들, 오로지 더 투명해지고 더 오롯해진 순수지각이 겨우 그 질감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만을 허용할 뿐인 미지의 것들, 이쪽이 아닌 저편에 거주하는 것들, 아득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암시하고 상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밤을 그린다는 것은 사실은 밤의 아우라를 그린다는 것이며, 밤이 주는 인상의 깊이를 그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우라란 그저 분위기로 환원되고 한정되는 것이기보다는 밤으로 형용되는 일체, 밤의 깊이 속에 거주하는 일체(밤의 주민들? 밤의 유민들?), 오롯해진 지각의 더듬이로 만나지고 찾아지는 일체를 아우르는 무엇이어야 한다. 

그 깊이를 그리기 위해선 수평적인 구도보다는 수직적인 구도가 적격이다. 낮에는 시야가 열린다. 그래서 낮에 본 자연경물을 그릴 때는 옆으로 끝도 없이 연이질 것 같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 마치 아이맥스를 보듯 사실은 무한 연속된 것의 단절된 일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밤에는 시야가 좁혀지고 집중된다. 그렇게 좁혀진 시야가 수직적인 구도로 나타나고, 집중된 시야가 깊이로 현상하는 것. 그렇게 작가는 수직적인 구도 속에 그리고 맑고 투명하고 깊은 묵법 속에 밤의 깊이며 그 깊이의 아우라를 그려놓고 있었고, 그 깊이 속에 총총한 아우라의 성좌들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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