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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희 / 휴지, 휴식, 막간, 일시정지, 잠시 멈춤, 그리고 아마도 판단중지?

고충환





비정형의 얼룩들과 화면을 종횡하는 무분별한 붓질들,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마구 흘러내리다 멈춘 물감 자국들, 반투명한 베일 속에 어둠을 숨겨 놓고 있는 것 같은 색조, 격렬하고 가라앉은 역설적인 감정(정중동? 파토스?)과 함께 내성적인 경향을 불러일으키는 색감, 그리고 지우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켜켜이 쌓인 피막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고 있는 것 같은 질감, 그리고 그렇게 벗겨진 막과 막 사이로 설핏 보일 것도 같고 아니면 오히려 더 오리무중으로 숨어들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형태들. 여명희의 그림은 그렇게 회화적으로 다가왔다. 회화의 본성을 추구하는 그림으로 다가왔고, 액션 페인팅의 몸 그림에서처럼 붓질과 색감과 질감에 행위와 몸과 존재를 일치시키는 그림으로 다가왔고, 그리고 그렇게 회화의 과정으로 하여금 존재증명이 되게 하는, 그런 그림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다만 회화의 본성을 추구한 그림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비정형의 얼룩들과 무분별한 붓질들 사이로 알만한 형상들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산과 집, 해와 달, 초원과 바다 같은. 그리고 무의식이며 심연 같은. 그러나 엄밀하게 그 형상들은 다만 00처럼 보일 뿐인, 그리고 그렇게 어떤 형태를 특정하기보다는 겨우 암시할 뿐인, 그런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최소한의 형상들이다. 그런 최소한의 형상들이 어우러진 작가의 그림은 풍경적으로 보인다. 풍경적? 풍경적인 것은 풍경과 어떻게 다른가. 풍경의 의미를 전유하면서 풍경과의 차이를 생성시키고 파생시키는 풍경? 그림 같은 풍경? 실재가 이미지의 기준이 되는 대신 이미지가 실재의 잣대가 되는 풍경? 그리고 그렇게 실재와 이미지(혹은 실재와 의미)의 관계가 전복되고 재편되는 풍경? 아마도 어느 정도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고 아우를 것이다. 



더운 강, 145x112cm, 캔버스에 오일, 2014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풍경적이지만, 그러나 단순히 감각적 사물대상으로서의 풍경에로 환원되지는 않는 풍경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풍경에다 자기를 투사해 그린 내면적인 풍경이고 심리적인 풍경이다. 그리고 회화의 본성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경우로 치자면 회화적인 풍경이고, 풍경을 의미연구(실재와 이미지 혹은 실재와 의미와의 관계연구)를 위한 구실로 보는 것으로 치자면 의미론적 풍경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풍경처럼 알만한 감각적 사물대상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지향이기보다는, 사실은 이처럼 회화의 본성을 위한 그리고 의미연구를 위한 구실이며 계기처럼 보인다. 


의미연구? 무슨 말인가. 작가는 산 그림을 더운 산으로 부르고, 강 그림을 더운 강이라고 명명한다. 더운 산? 더운 강? 작가는 그저 산을 그리고 강을 그린다기보다는 감정 이입된 대상으로서의 산을 그리고 자기를 투사한 강을 그린다. 그 대상으로 치자면 굳이 산이며 강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익명적인 산이며 무명의 강을 그린다. 그러므로 산과 강을 빌려서 사실은 자기를 그리고, 최소한 산 혹은 강과 자기와의 상호작용이며 삼투현상을 그린다. 여기서 산을 더운 산이라 부르고 강을 더운 강으로 명명한 것은 중의적이다. 그 의미가 중의적인 것은 이처럼 감각적 사물대상과 작가의 주체가 만나지고 하나의 층위로 포개지는 것에 연유한다. 각각 한 쪽 의미는 사물대상으로부터(응시), 그리고 의미의 또 다른 한 갈래는 주체로부터(시선) 유래해 상호 간섭현상이 일어나는 것. 중의적인 의미는 사실은 이처럼 감각적 사물대상과 주체가 만나지는, 응시와 시선이 교차되는 모든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자체 해석 작용 혹은 행위로도 볼 수 있겠고, 작가의 그림은 특히 이런 해석 작용에 연루된다. 말하자면 주체는 감각적 사물대상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의미화 하는가, 하는 문제에 연동된다. 여기서 작가는 그림의 의미를 부여하고 캐내는, 숨기면서 드러내는, 그런 기호학자며 고고학자가 된다. 


그리고 특히 파란 병이며 빈 병을 주제화한 그림이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문제며 자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더운 산이며 더운 강에서 산이며 강을 수식하고 있는 말(더운)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파란 병이며 빈 병에서 병을 수식하고 있는 말(파란 그리고 빈)에 주목할 일이다. 바로 주체에 연유한, 주체에게서 건너간, 사물대상에 대한 주체의 간섭의 흔적이고 증거이다. 그 흔적이며 증거에 의해 빈 병은 무의식으로 해석되고 변질된다. 말하자면 의식의 관점에서 빈 병은 알고 보면 무의식으로 충만한 것일 수 있다. 의식의 관점에서 삶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죽음일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의식의 관점에서 그리움(강밀도가 헐렁한, 그래서 시적인)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절실함(강밀도가 촘촘한, 그래서 현실적인)일 수 있는 것처럼. 이처럼 모든 문제는 관점의 문제며 강밀도의 문제로 소급된다. 


작가는 이처럼 회화의 본성이 속해져 있는 지평(한갓 비정형의 얼룩이 어떻게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의미를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문제)과 의미론적인 문제의 지평(기표와 기의의 일치와 불일치 문제) 그리고 관점의 문제의 지평(그 자체 강밀도에 연동된, 주체와 세계가 만나지는 지점이며 주체가 세계를 의미화 하는 문제)이 융합되는, 그런 지각변동의 현장이며 현상을 그린다. 



하얀섬, 73x90cm, 캔버스에 오일, 2015


pause, big pause, small pause. 여명희가 그린 그림에 부친 제목 중엔 이처럼 유독 pause가 많다. 그림의 의미내용보다는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미술에서 주제와 제목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재현과 서사에 방점이 찍힌 형상미술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주제와 제목이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내용을 캐내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림은 회화적이고 제목은 문학적인데, 회화적인 층위와 문학적인 층위가 상충하고 부닥치고 스며드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회화적인 층위와 의미론적인 층위가 상호 간섭하는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런 상호 간섭의 과정을 매개로 작가의 그림은 의미론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비정형의 얼룩과 무분별한 붓질로 이루어진 회화적 질감이며 색감이 여실한 그림으로 합리와 상식, 선입견과 편견으로 굳어진 의미를 수정하는 것 같다. 암시력이 풍부한(그 자체 비결정적인. 비결정과 암시는 같이 간다) 그림으로 결정적인 의미를 교정하는 것 같다. 이런 수정과 교정의 과정을 통해서 의미의 처음상태를, 의미 이전의 의미(?)를 구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쩜 작가에게 그림은 일종의 의미론적인 연구처럼 보이고, 의미에 반하면서(비정형의 얼룩과 무분별한 붓질로 이루어진 작가의 그림은 마치 비의미 혹은 반의미의 알레고리 같다) 의미를 구제하는 것이란 점에서 역설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론적 접근은 의미심장한데,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고 부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고, 삶이 의미로 축조된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삶이 이미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는 회화를 통해 의미를, 삶을, 존재를 주제화한다. 그렇게 존재는 작가의 그림에서 주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회화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과정(존재를 실현해가는 과정, 혹은 그 과정을 통해 존재가 생성되고 비롯되는 과정)이기도 한 이중적이고 중의적인 층위를 갖는다. 


다시 pause로 돌아가 보자. 작가의 그림에서 pause는 무슨 의미일까. 작가의 그림에서 pause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pause는 대략 휴지, 휴식, 막간, 일시정지, 잠시 멈춤, 그리고 아마도 판단중지를 의미할 것이다. 판단중지(현상학적 에포케)? 주지하다시피 판단중지는 의식의 영도 지점에다 자기를 내려놓는 행위이다. 그 제로지점에서 세상을 생판 처음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판 처음 보는 것에 걸맞게 의미도 자유자재로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에서 산은 바위와 돌멩이, 머리와 심장, 그리고 종으로 변주된다. 그리고 똥으로 변태되기도 한다. 형태적 유사성이 의미론적 차이를 넘어서게 해주고, 소리를 매개로 한 공감각이 차이를 봉합하게 해주고, 심지어 냄새(똥)며 기후(더운)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이 의미를 재편하고 재구성하게 해준다. 


의미는 언제 어떻게 결정되는가. 상황, 전제, 문맥,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의미론적 지층을 그린 것이고, 상대주의적 의미론을 그린 것이다. 결정적인 의미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의식의 흐름에서처럼, 자동기술에서처럼, 그리고 자유연상에서처럼 여기서 저기로 이동 중인, 이행 중인, 운동의 와중에 있는, 그런 움직이는 존재며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그렇게 존재들이 순간이동하면서 보여주는 운동성을, 그리고 그 운동의 종류와 정도(강밀도)에 따라서 매번 달라지는 의미의 어긋난 단층을 그린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도 파란색은 심연처럼 보이고, 그 심연이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어둠이 보이는가.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산 그림에선 더위가 느껴지고, 분뇨의 냄새가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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