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지젤박/ 내면의 표상으로서의 풍경

고충환




화면에 비정형의 마티에르를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 색을 덧칠해 그린 지벨박의 그림은 색면 추상처럼 보인다. 색띠 혹은 색면들이 층층이 포개진 색의 단층이나 단면처럼 보인다. 감각적인 사물대상을 전제로 한 재현적인 회화나, 그림으로 하여금 어떤 메시지의 표상을 염두에 둔 서사적인 회화와는 구별되는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이 첫인상의 세목들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그 해답은 작가의 그림이 어떤 인문학적 지층이며 감각논리에 의해 지지되는가를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은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해 지지되고, 그 원리 그대로를 회화로 옮기고 변주한 것 같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뭔가. 그림에서 형식과 의미내용을 원칙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지만, 편의상 구분해볼 수는 있다. 여기서 그림으로 하여금 그림이 되게 하는 것으로 치자면 의미내용보다는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의미내용이 없는, 순수한 형식만으로도 그림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최소한의 구조로 나타난 조형에 대한 도날드 저드의 태도나,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적인 전언이 모두 이런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전제한 것이다. 더 멀리는 그림이란 말이나 자연 풍경과 같은 특정의 사물대상을 재현한 것이기 이전에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덧칠된 색면들의 조합이라고 본 모리스 드니의 발언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무슨 말인가. 점, 선, 면, 색채, 양감, 그리고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야 말로 회화의 본질이랄 수 있고, 그 조합과 구성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이를테면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경우는 그저 우연적이고 부수적일 뿐(모더니즘의 장르적 특수성의 논리에서 볼 때 재현과 서사는 조형예술보다는 문학의 본질에 가깝다). 그렇게 작가는 추상회화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재해석한, 그런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형식주의자이며 모더니스트인가. 작가의 그림은 다만 형식주의로 나타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준칙이 요구하는 회화의 본질에 천착해 그린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중층화된 색면으로 나타난 그림의 외관은 사실은 보다 심층적인 무언가를 숨겨놓고 있는 표면 같고 구실 같다. 

무슨 말인가. 특유의 질감과 색감이 어우러진 색면으로 나타난 작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자연풍경이 연상된다. 색면과 색면이 서로 면해지면서 만들어내는 가상의 선이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연상시키고, 그 선을 경계로 산이, 강물이, 바다가, 하늘이, 들판이, 언덕이, 야트막한 구릉이, 초원이 그 형태를 드러내 보인다. 아마도 감각적 실제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암시와 연상 작용이 불러일으킨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선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이 열리고, 지평선을 화면 아래쪽에 설정해 그린 그림에선 상대적으로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늘이 광활하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면과 면이 접해진 경계 부위를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보이고, 수차례 색깔을 덧칠해 그려 밑칠이 배어나오게 한 것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는 색감이 가능해진다. 대개 색깔 자체는 원색적인데, 이처럼 표면 위로 우러나온 밑칠이 원색을 중화하는 특유의 색감이며 분위기를 연출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감각적 사물대상 이를테면 산이나 들판 같은 자연풍경에다 바람과 공기의 질감과 같은 상대적으로 비가시적이고 그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을 더해 자연의 실재(이를테면 생명 같은?)에 접근하고 있다. 

나아가 그림은 일종의 내면풍경처럼도 보이는데, 작가의 바이오리듬을 그림에다 투사해 그린 것이다. 말하자면 풍경은 대개 평화롭게 보이고, 정적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휘몰아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정중동의 긴박감을 품고 있는 그림도 있다. 거듭 하는 말이지만, 단순한 자연에 대한 인상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에 자기감정이 이입된, 자연과 자기가 혼연일체가 된, 자연과 주체가 상호작용하고 상호 삼투되는, 그리고 그렇게 자연과 주체가 서로 구별되지가 않는, 그런 그림이다. 옆으로 긴 그림이 자연풍경을 닮았다면, 정사각형 화면에다 그린 그림이 내면풍경을 연상시킨다. 어느 경우이든 사각의 프레임이 창을 대신함으로써 마치 창을 통해 내다본 풍경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작가는 말하자면 일종의 가상적인 창을 내는 행위로 나타난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재현적인 문법을 전유해 자기만의 추상형식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색면추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풍경에 연동되고, 자연 풍경처럼 보이지만 이보다는 내면풍경에 가깝다. 자연풍경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니거니와, 자기 내면에서 불러낸 풍경을 색면에다 덧입혀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어쩜 일종의 내면의 표상으로서의 풍경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자기내면풍경이며, 자기내면에 난 창을 통해 본 풍경이다. 자기내면풍경? 자기내면의 풍경을 그렸다? 이 말은 곧 자기를 그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여기서 작가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에 주목할 일이다. Utopia of Life. 삶의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말하자면 삶의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며, 그 과정에서 유래한 그림은 곧 유토피아의 표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에게 유토피아는 자연을 의미했고, 이때의 자연은 자연을 이상향의 전형으로 본 전통적인 자연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상향을 감각적 실재로서의 자연보다는 관념적 실재로서의 자연으로 본 경우와도 통한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그림을 보면 그림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비정형의 마티에르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바로 삶의 상처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치 붕대로 감싸듯 상처를 색깔로 덮어서 가린다. 상처를 불러내고, 상처를 치유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치자면 자연만한 것도 없다. 이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연풍경을 연상시키고, 이때의 자연풍경은 사실은 내면의 표상(상처와 대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을 위한 구실 내지 계기로서 주어진 것이며, 그 계기가 유토피아의 주제의식과 통한다. 실재로도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상처가 치유되는가. 마음에 위로를 받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그림에 부친 제목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From a Distance. 거리로부터란 뜻이다. 아마도 거리두기를 의미할 것이다. 그림을 잘 보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걸 심적 거리 혹은 미적 거리라고 한다. 그림은 거리에 따라서 다르게도 보인다. 멀리서 보면 자연풍경이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내면풍경이 보인다. 단순한 거리 자체를 의미하기보다는 감각적 사물대상에 오버랩 된 관념적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주문일 것이다. 거리두기는 삶에 대한 태도와도 관련된다. 잘 보면 아름다운 표면이 숨겨놓고 있는 상처가 보인다는 주문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색면추상의 형식을 빌려 자연풍경을 그리고, 자연풍경의 형식을 빌려 내면풍경을 그리고, 내면풍경의 형식을 빌려 상처와 대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어쩜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할 유토피아를 그려놓고 있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