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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화 / 시간의 건축과 침묵하는 책

고충환



미셀 투르니에는 책과 독자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깨알 같은 흡혈박쥐들이 책 속에서 날아올라 독자의 피를 빠는 극적인 경험이며 사건을 겪는 것으로. 여기서 종이는 절벽이며, 활자들은 흡혈박쥐에 해당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절벽에서 잠자고 있던 흡혈박쥐들이 날아올라 독자의 폐부를 찌르고, 독자를 울리고, 웃기고, 설레게 하고, 가슴을 쥐어뜯게 만든다. 독서행위가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상호작용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한 권의 책이 독자를 사로잡는 의미작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말라르메는 자신을 책으로 가득한 곰팡내 나는 서재에다 비유하고, 롤랑 바르트는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알다시피 양피지는 책 이전의 책이고, 필사본이었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역작은 대개 작가가 눈이 먼 다음에 나온 것들이다. 작가가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를 사서(사실은 타이피스트)가 받아 적는 것인데, 이야기로 가득한 작가의 머리 자체가 이미 책이고 책들이며 도서관이었다. 


사람이 만든 물건 중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걸로 치자면 책만 한 것이 없다. 사람이 이미 한 권의 책이다. 혹은 책들로 가득한 서재다. 사람들은 저마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 그러므로 사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과도 같은.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에 존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어서 언어를 들여다보면 존재가 보인다는 말이다. 사람의 개념이, 인격이, 정체성이 모두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언어로 인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이 말은 사람이 곧 언어의 집이라는 말로 고쳐 읽을 수 있고, 사람이 곧 책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길, 여로, 여정, 로드무비, 연극, 극장, 무대, 바다,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 우주를 떠도는 미아 등등 사람을 그러므로 삶을 비유하는 표현들이 많지만,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치자면 책만 한 것도 없다. 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책을 쓰는 것이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욕망이 구술문화시대를 넘어 기술문화시대 곧 책의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책 자체는 기술문화시대의 산물이지만, 정작 책의 내용에 해당하는 이야기의 역사는 구술문화시대로 소급된다. 책의 역사가 이야기의 역사인 것이고, 이야기의 역사는 책의 역사에 한정되지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책에 한정되지가 않는, 또 다른 경우의 책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또 다른 경우의 책? 바로 여기에 정두화의 작업이 위치해 있다. 



정두화는 책을 해체해 또 다른 종류의 책을 만든다. 엄밀하게는 책을 소재로 조형을 만드는 것이지만, 책의 의미를 재해석한 것이란 점에서, 그래서 그 경우는 다르지만 여전히 책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에 연장된다. 형식으로 치자면 책을 의미의 담지체로서보다는 혹은 그와 함께 질료와 형태 같은 물질적 차원으로 재해석한 것이란 점에서 예술가의 책 곧 아티스트북에도 일정부분 연동된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책을 수집하고 분류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매개된다. 즉 시간대 별로 수집된 책을 분류하는 것인데, 고서와 같은 헌책과 새 책이 머금은 시간의 질감이며 색감이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최초 책이 머금은 시간의 질감이며 색감이 책을 소재로 만든 조형에도 그대로 옮겨지고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헌책을 소재로 만든 조형의 경우에는 조형이 자기 내부에 시간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고답적인 느낌을 주고, 새 책을 소재로 만든 조형의 경우에는 조형 역시 모던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작가가 단순히 시간대별로만 책을 분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더러 역사 내지 종교와 같은, 주제별로 분류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시간대별 분류를 따른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그 경우가 형식적인 차이 내지 구별을 강조해 조형적 효과를 꾀하기에 용이한 점이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회화로 치자면 여하튼 물감이 많아야 그림에 변화도 기할 수가 있고, 다채로운 그림도 가능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고답적인 느낌이나 모던하고 현대적인 느낌 자체만 해도 그저 헌책 아니면 새 책을 소재로 한다고 해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헌책이 주는 그리고 새 책이 주는 최초의 느낌은 다만 일차원적인 인상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미학적 경험에 해당하는 부분, 이를테면 고답적인 느낌에 대한, 모던하고 현대적인 느낌에 대한 감각적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이처럼 책을 재료로 해서 때론 시간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고답적인 분위기의 조형을, 그리고 더러는 모던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조형을 연출한다. 그리고 이따금씩은 다른 시간대에 속하는 책 재료를 하나의 조형 속에 혼용해 시간과 관련한 다른 종류의 개념을 연출하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직선적인 시간(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선분적인 시간(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구분되면서 연결되는), 물리적인 시간, 그리고 객관적인 시간과는 다른, 주관적인 시간경험 내지 개념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의식 속에서 시간은 뒤섞인다. 의식이 부르면 과거가 현재 위로 호출되기도 하고, 의식에 따라서 현재가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지기도 한다)에서와 같은, 그리고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시간개념(흐르는 시간개념으로서, 고정된 순간의 포착과 같은 정지된 시간개념과는 구별되는)과 같은. 


그래서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책을 이용한 작가의 조형작업의 진정한 주제일지도 모른다. 책을 매개로 하여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질감도 없는 시간을 가시화하고 형상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책 자체가 이미 시간의 집이며 건축이기도 하다. 그저 헌책 아니면 새 책의 문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이야기가 전승되어지는 차원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욕망의 소산이다. 시간이 전제되거나 매개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이야기 자체가 이미 기승전결과 프로세스와 같은 시간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조형으로 옮겨놓고 있는 시간은 단순히 조형적인 성과 내지 결과로만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어쩜 시간 자체를 책의 본성 중 결정적인 경우로 보고, 그 본성을 주제화한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책에 내재된 시간의 지층을 그리고(만들고?), 책 속에 흐르는 시간의 궤적을 조형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시간의 표상이다. 그 자체 이미 시간의 집인 책을 해체해 또 다른 시간의 집으로 재구성하고 재축조한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건축적이다. 마치 벽돌을 쌓듯 하나의 단위구조(모나드 혹은 단자 혹은 원소)를 쌓아나가는 지난한 그리고 노동집약적인 과정(책을 낱낱이 찢고, 붙이고, 둥글게 말고, 책의 단면을 자잘한 조각들로 절단하고, 모판에 모를 심듯 심고, 사포로 표면을 갈아내는)을 통해서 책과 마찬가지의, 책에서 비롯했지만 책과는 다른, 그런 일종의 시간의 건축물을 구축하고 축조한 것이다. 



그리고 책의 원형에 해당할 이야기는 원래 책으로 기술되기 이전에 낭송되고 낭독되어졌었다. 최근 시낭독회가 붐이지만, 시와 노래와 같은 문학형식들, 그리고 철학적 논쟁과 같은 사변적 다툼이 모두 활자 이전에 소리를 매개로 전달되어졌었고, 이로부터 광장문화와 아카데미 문화가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효율성으로 치자면, 특히 교육현장에서 기술문화보다는 토론문화가 더 효과적이라고 보고, 이를 고수하는 문화권이 많다. 말하자면 책은 동시에 눈으로도 그리고 입으로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책을 소리로 표현한다. 엄밀하게는 책의 내용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소리로 표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쩜 읽는 책과 함께 듣는 책에 조형적 관심이 기울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타이피스트처럼. 그리고 더 먼 경우로는, 이야기 전수자의 말에 온통 귀를 기울이고 있는 구술문화시대의 사람들처럼. 앞서 말했듯 작가는 단위구조에 해당하는 책 조각을 낱낱이 쌓아나가는(축조)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책을 조형하고, 이야기를 조형하고, 시간을 조형하고, 그리고 소리를 조형한다. 마치 수면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파문을 그리면서 번져나가듯 일정한 굴곡과 함께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형태의 조형들이다. 구조적으로 스피커를 연상시키는데,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번져나가고 퍼져나가는 소리의 방향성을 생각하면 되겠다. 번져나가는? 퍼져나가는? 바로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을 조형한 것이며, 독자가 저자와 조우하는 과정을 조형한 것이며, 한 권의 책이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극적 순간을 조형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독자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한 권의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소리를 조형한 것이며, 그렇게 독자에게 공명하는 내면의 소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단일의 책을 전제로 했을 때 그렇고, 사실 작가의 조형은 허다한 다른 책들, 차이 나는 책들, 이질적인 책들, 외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책들의 집합이며 조합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다시, 무슨 말인가. 그 자체를 다른 언어들, 다른 말들, 다른 인종들, 다른 관심사들의 무분별하고 우연한 조합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책을 매개로 한 작가의 조형은 이런 다름과 차이를 넘어 봉합하고 하나로 통하게 하는, 그런 소통의 계기를 주제화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작가의 조형엔 책도 없고, 텍스트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의 작업은 책이다. 책을, 텍스트를, 소리를 표상한 것이다. 마임이스트 마르셀 마르소는 말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지만, 침묵의 언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마임을 정의한 말이지만, 이 말은 그대로 작가의 조형에도 타당한 말이지 싶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일종의 묵언의 책이며, 미처 활자화되기 이전의 잠재적인 텍스트(혹은 의미), 그리고 침묵하는 소리로 공명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침묵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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