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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하완 / 어반스케이프, 고독한 모나드들

고충환




부식기법에 의한 이미지(주로 전작에서 구사되고 있는 부식기법은 모티브를 분명하게 재현해주기보다는 최소한으로만 형상을, 어쩜 형상의 흔적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후 그림에서 부식기법 자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최초 부식기법을 통해 추구되어진 흔적과 암시는 향후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분위기로 자리하면서 다양한 형태와 경우로 심화되고 변주된다), 마스킹테이프가 만들어준 이미지, 그리고 여기에 작가가 직접 그려 넣은 형상이 어우러진 류하완의 그림은 사각패턴과 비정형의 얼룩이 두드러져 보인다. 추상과 형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때론 추상이 그리고 더러는 형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사각패턴과 비정형의 얼룩이 형식논리의 두 축인 셈인데, 그러나 그 축은 엄밀하게 말해 서로 별개의 영역으로서보다는 하나의 프로세스로부터 유래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실제로 작가의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간략히 스케치해보는 것이 일정한 도움이 되겠다. 먼저 화면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인다. 그리고 칼로 그림을 그리는데, 일종의 칼 드로잉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그린 그림으로 치자면 익명적인 군상을 실루엣으로 표현한 것 같은 유기적인 형상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크고 작은 사각형의 패턴으로 나타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상들이다.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하면 칼이 지나간 자리에 틈이 생기고 그 틈새로 채색이 스며든다. 그렇게 마스킹테이프를 붙이고, 칼로 드로잉을 하고, 채색을 올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연후에 칼에 의해 조각난 마스킹테이프 조각을 떼 내면, 안료가 테이프 안쪽으로 스며들어 고착된 비정형의 얼룩이 조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각패턴 자체가 자기 내부에 비정형의 얼룩을 싸안는, 사각패턴과 비정형의 얼룩이 합체된 화면이 연출된다. 


작가는 사각패턴과 함께 익명적인 군상을 실루엣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작가에게 사각패턴은 말하자면 익명적인 군상을 위한 일종의 배경역할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실은 도시를 그린 것이다. 도시를 그린 그림? 도시회화? 어반스케이프? 사실은 자잘한 마스킹테이프 조각이 만든 자국과 흔적에 지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유래한 사각패턴이 어떤 풍경을 암시하고, 항공지도를 보는 것 같고, 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사각패턴이 건물의 단면처럼 보이고, 원형패턴이 광장처럼 보이고, 격자패턴이 가로처럼 보인다. 바로 사각패턴이 도시의 전형적인 이미지인 탓에 가능한 일이다. 


A Beautiful flying, 130x70cm, Mixed Media, 2005

도시를 특징짓는 이미지가 많지만, 그 중 작가는 바로 이런 사각패턴에 주목한다. 도시는 말하자면 온통 크고 작은 사각패턴들로 이루어져 있다. 집도, 건물도, 가로도, 차도, 가방도 사각형이 기본이고, 사각패턴이 변주된 것들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의식마저 사각형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가. 환경이 의식을 만들고, 최소한 영향을 미친다(환경결정론?). 도시는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조화돼 있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역시 그 구조에 맞게 규격화돼 있고, 규범화돼 있다. 

도시의 구조는 그저 구조 이상의, 도시의 정신을 표상하는 것.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사각패턴은 도시를 그린 것이고, 도시의 정신을 그린 것이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그린 것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도시속의 모나드(원자, 원소)를 그린 것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사실은 저간의 변화된 양상을 설명하고 해명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에서 사각패턴으로 나타난 도시 이미지와 익명적인 군상이 어우러지다가 이후 점차 군상의 실루엣 형상이 사라지면서, 화면에는 순수한 사각패턴과 그 패턴이 만든 비정형의 얼룩만 남는다. 외형상 사각패턴으로 대리되는 도시 이미지만 홀로 남겨진 것이지만, 사실은 사각패턴 자체가 도시를 대리하고, 사람들을 대신한 것이다. 


그렇게 도시에서 사람들의 의식은 마치 사각패턴이 그런 것처럼 규격화되고 규범화돼 있다. 여기서 사각패턴이 그 속에 품고 있는 비정형의 얼룩에 주목할 일이다. 그 의미는 이중적인데, 한편으로 삶의 상처를 상징하고, 다르게는 일탈을 표상한다. 알다시피 얼룩은 우연이 만들어준 것이고, 이로부터 일탈이 유래한다. 그리고 그 자체 사각패턴의 필연과 일상에 대비된다. 이처럼 삶은 중의적이다. 비록 사각패턴처럼 규격화되고 규범화된 현실을 살지만, 이와 동시에 비정형의 얼룩으로 그리고 우연으로 표상되는 일탈을 꿈꾼다. 작가는 그렇게 무슨 자신의 일부처럼 비정형의 얼룩을 내재화하고 있는 사각패턴으로 하여금 이중적이고 중의적인 삶의 속성이며 존재의 현실을 표상한다. 꿈과 현실, 일탈과 일상, 우연과 필연이 길항하고 부침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그린 것이다. 


A Beautiful flying, 162x70cm, Mixed Media, 2005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항공지도를 연상시키고, 격자로 구조화된 도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도시 속 모나드를 그린 것이고, 규격화된 삶이며 제도에 길들여진 삶을 사는 사람들을 표상한다. 그건 멀리서 볼 때(혹은 좀 더 관념적인) 이야기고, 작가의 그림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혹은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폐 타일을 연상시키고, 시간을 머금은 모자이크를 연상시키고, 뭔가 사연을 함축하고 있을 것 같은 오래된 벽면을 연상시킨다. 더욱이 비정형의 얼룩이 시간과 사연을 함축하고 있어서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놓은 것 같은 고답적인 느낌을 주고, 아득하고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든다(실제로 옛날엔 타일로 벽면이며 건축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그림 속에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을, 객관적인 지평과 주관적인 경험을 하나로 녹여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Flashback 곧 회상이며 회고라고 부른다. 도시의 생태학에 초점을 맞춘 것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반추하는 자기반성적인 경우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치 연어처럼 도시의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자신이 유래한 원천으로 되돌아왔다고나 할까. 그 원천은 말하자면 일종의 고향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 고향은 실제 하는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기보다는 근원에 대한 감정으로 봐야 하고, 일종의 원형의식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자체 근원을 상실한 삶을 사는 현대인의 상실감과도 통한다. 작가의 그림이며 주제의식은 이처럼 개인사적인 서사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경험과도 통하면서 공감을 얻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그림 속에 유년의 추억을 불러들이고, 요람을 불러들이고, 창문과 함께,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며 천 자락을 불러들인다. 주지하다시피 창문은 풍경을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면서 통하게 하는 열린 경계를 상징한다. 현재의 자기와 유년의 자기가 만나지고, 현실인식과 유년에 꾸었던 꿈이 만나지는, 현실과 꿈이 맞닥트리는 관문이며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삶의 지평에는 이처럼 통과해야 할 수많은 관문들이 있다. 요람을 흔드는 바람과 천 자락은 이처럼 살면서 맞닥트리는 삶의 난관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그림에 보이는 사각패턴을 일종의 벽으로 볼 수도 있겠다. 알다시피 주체와 벽과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주체를 단절시키고 고립시킨다. 그 벽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심지어 그렇게 벽 밖에 있을 때조차 언제나 벽 안쪽이 그립다. 작가는 그렇게 그리운 안쪽을, 벽면이며 존재의 안쪽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주체로 하여금 회상이며 회고에 빠져들게 만드는 계기를 프루스트효과라고 한다. 마들렌 과자를 베어 물때 나는 바삭거리는 소리와 입안에 감도는 향기가 화자로 하여금 과거 속으로 빠지게 만든 것에 착안한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가로 하여금 이런 프루스트효과를 불러오는 계기로 치자면 타일 벽면이 있고, 그리고 빨간 벽돌집이 있다. 빨간 벽돌집은 말하자면 작가로 하여금 유년의 기억이며 추억을 상기시키는 기호로 다가왔다. 실제로 옛날에 시골은 곧잘 블록집체와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을 했고, 도시에는 소위 양옥의 대명사로 칠 만한 빨간 벽돌집이 많았다. 


눈치 챘겠지만, 작가의 그림이 타일벽면에서 빨간 벽돌로 옮아온 것이다. 같은 사각패턴이지만 평면에서 입체로 변화되고 변주된 부분도 눈여겨볼 일이다. 덩달아 사각패턴이 도시의 모나드며 개개의 사람들을 표상하듯 벽돌 한 장 한 장이 사람들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벽돌 한 장 한 장처럼 개체화되고 고립된 삶을 산다. 때로는 벽을 쌓으면서, 그리고 더러는 벽을 허물면서 산다. 때로는 소통하고, 더러는 불통하면서 산다. 때로는 상처를 주고, 더러는 상처를 감내하면서 산다. 그런 삶들이 길항하고 부침하는 가운데 어머니의 위안처럼 바람이 불고 천이 흐른다. 그렇게 작가는 부드럽게 감싸면서 흐르는 천으로 하여금 존재를 위로하는 바람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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