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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 빨간 벤치에 앉아서 시대를 생각하다

고충환




그림 속에 다른 그림이 포개져 있는 경우에 그걸 흔히 이중그림이라고 한다. 하나의 화면 속에 두 개의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인데, 소설로 치자면 액자소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이중 혹은 액자는 그저 그림 혹은 소설의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구조 이상이다. 이를테면 서로 대비되는 의미 내지 서사가 충돌하거나 상호 대리 보충되는 경우를 통해 제3의 의미 내지 서사를 열어놓는 미학적 장치로 보면 되겠다. 어느 경우이건 이로써 그림의 의미영역을 확장시키는 방법론으로 보면 되겠다. 모든 의미는 중의적이고, 모든 텍스트는 다층적이고, 모든 현상은 중층결정화된 것이라는 인식이 그 밑에 깔려 있다. 하나의 목소리 속엔 언제나 미처 발화되지 못한 침묵하는 목소리가 함께 말을 하고(미하일 바흐친의 다성성), 하나의 의미 속엔 미처 의미화 되지 못한 의미(선의미?), 억압된 의미(욕망?)가 분신처럼 떠돌고, 가시적인 것의 곁에는 비가시적인 것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Fly- 붉은벤치(1), 116x72cm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한지로 떠내 엠보싱으로 표현한 날개가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는 어느 그림 할 것 없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일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따라서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의미론적인 축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림에서 날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투명한 사각 입방체 내지는 액자 속에 담겨져 있어서 배경화면으로 그려진 그림과는 구별돼 보인다. 여기서 투명한 입방체 혹은 액자는 일종의 틀을 의미하며, 관념의 틀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틀 속에 담겨진 날개는 이상을 상징한다. 언젠가는 관념의 틀을 깨고 비상을 꿈꾸는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며, 실제로도 그 틀이 벗겨진, 그래서 배경화면의 부분으로 흡수되거나 합체된 일부 그림에서 날개는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하고 이상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러나 대개는 여전히 틀 속에 갇힌 경우들이 많은 것이 흔히 그렇듯 이상과 현실의 거리에 대한 공감을 자아낸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날개는 이상을 상징하고, 그 이상은 현실에 해당하는 배경화면과 비교된다.   

날개가 시작되는 뿌리 부분에 흡사 주머니와 같은 둥근 형태가 매달려있는데, 날개로 상징되는 이상에 양분을 공급하는 이상의 원천이며 모태로 보면 되겠다. 그 모태 속엔 남녀가 마주하고 있는 변주된 형태들이 그려져 있는데, 각각 음과 양을 상징하고, 음양합일을 상징한다. 결국 작가가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음양합일상태를 말한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음양합일사상을 주제화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유래하고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의미의 원천이며 주제의 원형으로 보면 되겠다. 현실과 이상을 대비시키는 것도, 의미와 무의미가 충돌하는 것도, 의식과 무의식이 상호작용하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이런 궁극적인 조화에로 귀결되기 위한 서곡이고, 합일을 이뤄내기 위한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충돌하는 것들, 부침하는 것들이 경계를 허물고 조화를 이룰 때, 합일을 이룰 때에야 비로소 현실은 이상이 되고, 이상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가 있게 된다. 


작가가 그림 그리는 이유며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상징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그 상징은 입체조형물의 형태로 변주되고 심화된다. 양 날개를 펼쳐 비상하고 있는 형태의 입체조형물이 한쪽 날개만으로는 비상할 수 없는, 그래서 다만 이상에 머물 뿐인, 그리고 그 이상은 모든 존재가 진정한 조화며 합일상태를 이룰 때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을, 그런 잠재적이며 잠정적인 비상을 암시하고 있는 그림 속 날개와는 다르다. 그림 속 날개가 꾸는 꿈이며, 그림 속 날개가 이행해가는 방향을 예시해주고 있다고나 할까. 

그 형태가 얼핏 남근을 연상시키지만, 보기에 따라서 여성의 신체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를테면 가슴 같은, 아니면 엉덩이 같은. 남녀가 합체되고 음과 양이 합일되는 경지를 표현한 것이고, 자웅동체를 표현한 것이다. 존재는 원래 하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메워져 있어서(메를로 퐁티의 우주적 살) 분리 불가능함을 표현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분리가 되었다. 격리가 되었다. 원초적 상태의 상실이며 원형의 상실이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격리된 것에서 존재가 고독한 이유를 찾는데, 이 역시 음과 양의 또 다른 경우이며, 원형의 상실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상실된 것을 회복하고, 상실된 상태를 복원할 때 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오르가슴(조르주 바타이유가 작은 죽음이라고 부르는), 엑스터시, 카타르시스, 지복, 지락, 주이상스가 현실화될 수 있고, 지상의 유토피아가 건립될 수 있게 된다. 상실된 원형을 복원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며,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자기표현(예술)을 통해서 다만 우회적으로만 현실화될 수 있는 일이며, 그 불가능성이며 불완전성으로 인해 공감을 얻는 일이다. 


Fly- 붉은벤치(2), 116x72cm

그렇게 그림 속 날개가 이상을 상징하고 상실한 원형을 상징한다면, 바탕화면에 그려진 또 다른 그림은 현실에 해당한다. 마른 갈대가 있는 강변, 추수가 끝난 논밭, 자잘한 혹은 크고 작은 암석이 총총한, 갯벌 혹은 바닷가 위로 기암괴석이 총총한 풍경,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텅 빈 들판 위로 고목이 오롯한 풍경, 눈 내린 겨울강변, 파도가 물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바다, 양떼가 풀을 뜯고 있는 강변, 바다 위로 햇살이 혹은 빛줄기가 비쳐 보이는 풍경과 같은 알만한 풍경들이고 현실 속 풍경들이다. 

그 풍경들은 친근하면서 낯선데, 알만한 것들이어서 친근하고, 사실을 알고 보면 부분과 부분이 조합되고 편집된 것이어서 낯설다. 여기에 모노톤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현실을 그린 것이면서도 다소간 관념적으로 보이게 한다. 관념의 분위기가 현실 위에 보이지 않는 막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렇게 관념적 현실을 그린 것이라고나 할까. 보기에 따라선 비현실 내지 초현실처럼 보이는 풍경도 있는데, 이를테면 발레 하는 무용수가, 그리고 무슨 나무인간처럼 나무에 사람이 포개진 형상(나무의 정령? 그런데, 정작 정장을 갖춰 입은 현대인? 정령의 현대판 버전?)이 자연을 배경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그렇다. 심지어 벌판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도로마저 작가의 그림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초현실주의에 연유한 사물의 전치에 착상한 것일 터이다. 의미란 그 자체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도 덩달아 달라진다. 아마도 관념의 틀 속에 갇혀 있던 이상이 현실세계에 투영되고 반영된 것일 터이다. 이를테면 미의 이상과 나무 혹은 숲의 정령과 같은 형태와 경우로 표상된 것일 터이다. 

특이한 경우로는 정글 혹은 사바나를 배경으로 백악관을 대비시킨 그림인데, 백악관이 정중앙에 그려져 있어서 시선을 집중시킨다. 정글로 대변되는 약육강식의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를 백악관이 주제하고 있다? 미국 패권주의? 팍스아메리카나? 작가의 그림은 대개 관념적인데, 이 그림의 경우는 현실적이다. 혹 얼핏 보통의 자연 풍경처럼 보이는 그림 중에서도 우회적인 현실발언을 암시하고 있는 그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구럼비 바위와 같은? 


작가의 그림에는 이상을 상징하는 날개가 등장한다고 했다. 그리고 근작에서 또 다른 상징이 여기에 더해지는데, 그림 하단에 그려진 빨간색 벤치가 그것이다. 여기서 빈 의자는 사실은 빈 의자가 아니다. 그건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존재표현의 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빈 의자는 작가를 상징하고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보편상징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의자의 빨간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모노톤의 화면과의 대비를 강조하고 싶은 경우로 보면 될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빈 의자에 앉아서 그림으로 표현된 모든 서사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관조하고 있었다. 그 의자 뒤편으로 천천히, 라고 표기된 도로 표지판이 서 있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주는, 그리고 시대를 향한 코멘트이며 권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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