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채영 / 도시의 변방, 도시가 일탈을 드러내는 순간

고충환




서울의 밤, 공허한 심연, 사이풍경(Between the scenery), 그리고 순간(The moment). 이채영이 그동안 자신이 그린 그림들에 부친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은 표면적으로 저마다 다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주제며 의식의 계기들로 보인다. 


서울은 도시다. 작가는 도시의 밤을 그린다. 도시는 낮보다 밤이 더 도시답다. 인공불빛이 밤으로 하여금 더 도시답게 만들어준다. 그 불빛은 유혹적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밤은 인공불빛도 없고 유혹적이지도 않다. 인적이 끊긴 주택가 골목의 막다른 길은 어둠에 잠겨 있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에 감싸여있다. 그렇게 어둠에 잠기고 정적에 감싸인 골목길을 가로등이 저 홀로 비추고 서있다. 가로등 불빛은 저를 감싸고 있는 어둠을 부각하고, 마치 국부조명등처럼 시선을 집중시켜 흡사 무대장치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 무대 위에서 작가는 정적을 보고 공허를 본다. 어둠을 보고 심연을 본다. 그것은 마치 사이풍경이라고도 부를 만한 것으로서, 작가와 풍경이, 작가와 어둠이, 작가와 내면이, 작가와 미지의 대상이, 그리고 어쩜 알만한 것과 알 수 없는 것, 친근한 것과 낯선 것이 하나로 만나지는 풍경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바로 그 풍경의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의 풍경을 그린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은 마치 그 실체가 손에 집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연출된 풍경이다. 풍경의 스펙트럼 중 어떤 순간, 어떤 찰나를 붙잡아낸 풍경이다. 


재생, 180X230cm, 장지에 먹, 2015

도시회화, 어반스케이프. 처음에 작가는 주택가의 어둔 골목길을 그렸다. 어둠을 그리고, 어둠 자체를 그렸다. 그 어둠은 현실의 것이면서, 동시에 마치 도시의 성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어둠은 도시의 성질 같았다. 번잡한 도시와는 다른 정적에 감싸인 도시, 휘황한 불빛으로 밤을 몰아내는 도시와는 다른 어둠에 감싸인 도시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욕망 대신 소외를 강조하는 것이었고, 도시의 다른 얼굴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도시의 두 얼굴을, 양가성을, 그림자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골목길은, 더욱이 어둠에 감싸인 골목길은 도시이면서 도시답지 않다는 점에서 도시의 변방일 수 있다. 도심 속의 가장자리며, 도심 속의 외곽이며, 도심 속의 변방일 수 있다. 


작가는 이처럼 도심이 품고 있는 변방, 도시답지 않음으로 인해 어쩜 도시에 반하는 변방, 욕망하는 도시의 이면에 감춰진 소외를 소환하고 증언하는 풍경으로서의 변방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변방이며 변방풍경을 작가는 사이풍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변방은 주택가 골목길에서 공사가 중단된, 재개발계획으로 묶인 잠정적인 장소들, 가동을 멈춘, 공실로 남겨진, 그러므로 어쩜 그 자체가 과부하 걸린 도시를 증언해주는 공장들, 용도 변경되거나 아예 폐기된 주택인지 관공서 부속건물인지 알 수 없는 건축물과 부대시설로 옮겨가고 확대된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이 꺼진 장소에는 어김없이 원래 주인이었던 자연이 자신의 왕성한 생명력과 함께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건축과 자연이 공생하는데, 계획된 공생이 아닌 우연하고 무분별한 공생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다시, 작가가 주제로서 제안하고 있는 사이풍경이란 아마도 그런, 멈춘 도시와 활성의 자연이 우연하고 무분별하게 만나지는 풍경을 의미할 것이다. 변방을, 슬럼을, 그리고 어쩜 게토를 자신의 일부로서 품고 있는 도시풍경을 의미할 것이다.       


조우, 180X230cm, 장지에 먹, 2015

헤테로토피아. 미셀 푸코는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를 제안한다.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상상 속에 등록된 장소를 유토피아로, 그리고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로 명명한다. 헤테로토피아는 말하자면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없으면서 있는 장소, 초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군대, 감옥, 정신병원, 서커스, 극장, 시골장터, 사창가, 휴양지, 도서관, 박물관과 같은 잠정적인 장소들이 포함된다. 대략 훈육의, 일탈의, 그리고 시간의 헤테로토피아들이다. 이 장소들에는 왠지 의심스러운 일들이 도모되고, 반사회적인 일들이 모사된다. 억압의 계기들이 모여드는 곳이며, 불온이 싹트는 곳이고, 혁명이 물꼬를 찾는 곳이다. 


그 자체로 도시의 변방일 수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가동을 멈춘 공장, 재개발계획으로 묶인 장소, 야적장과 공터, 그리고 공원을 더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소들은 어떤 억압의 계기를 증언해주고 있는가. 가동을 멈춘 공장이 도시의 과부하를, 재개발현장이 자본주의의 무모한 욕망을 증언해준다.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에 의해 견인되는 자본주의 물신은 경제성이 없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몬다. 그리고 그렇게 변방으로 내몰린 것들에는 질병과 죽음과 노화가, 그리고 예술이 포함된다. 이걸 미셀 푸코는 비정상성이라고 부르고, 조르주 바타이유는 잉여라고 명명한다. 그 자체가 드라이버 걸린 도시, 돌이킬 수 없는 도시, 무모한 욕망이 마침내 폭발한 이후 파국을 맞은 도시며 자본의 초상을 앞당겨 보여주고 있는 풍경이며, 따라서 예언적 풍경일 수 있겠다. 


작가는 한 그림의 제목을 끝, 이라고 부쳤는데, 그 끝이라는 제목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렇게 세상의 끝이며 변방의 끝에 서면 무엇이 보일까. 작가의 그림은 비록 도시의 변방을 그리고 정적인 풍경을 그린 것이지만, 그림은 동시에 이렇듯 과부하 걸린 도시며 무분별한 자본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야적장과 공터는 본드와 양아치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사람이 빠져나간 빈 공원에 재배치된 인공자연이 생경한 느낌을 준다. 인공자연은 사람이 감시하고 있는 동안에만 인공자연이다. 심지어 감시하고 있는 순간에마저도 인공자연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원초적 상태의 회복을 도모한다. 그래서 인공자연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마치 도시의 일부이면서 도시에 반하는 변방처럼. 


외면풍경, 도시의 멜랑콜리. 보통 풍경에다 자기를 투사해 그린 풍경을 내면풍경이라고 한다. 여기서 풍경은 주체가 자기를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한 구실이며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풍경 자체보다는 풍경을 대하는 주체의 입장과 태도에 방점이 찍힌다. 흔히 풍경에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주체보다는 풍경에 무게중심이 실리고, 풍경 자체가 말을 걸어오는 경우를 외면풍경으로 명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런 외면풍경을 그려 보인다. 가동을 멈춰선 공장, 슬레이트 마감 벽체가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벽면, 페인트칠이 부분적으로 벗겨져 얼룩진 벽면의 공장건물과 담벼락 대신 쳐놓은 철망 사이에 무분별하게 웃자란 수풀들, 멀리 펜스가 보이는, 아마도 잠정적으로 공사가 중단된 공사장 안쪽 공터, 주택인지 공장인지 관공서의 부속건물인지 알 수 없는 건물들, 밭이 끝나는 자리에 무슨 초현실주의 풍경마냥 서있는 콘크리트 마감 건축물, 천변에 자리한 수양버들, 화면을 가로지르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철망 펜스와 콘크리트 벽면과 수림이 풍경을 실제보다 더 멀고 아득하게 만드는, 광활하고 황망하게 만드는, 정적이고 쓸쓸하게 만드는 풍경들이다. 


그 풍경들이 친근하면서 낯설다. 그 풍경들이 친근한 것은 알만한 풍경들이어서이고, 낯선 것은 사람이 없어서이다. 원래 사람들과 함께였을 풍경이기에 낯설다. 무대에서 사람이 사라지면서 무대 자체가 풍경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무대에서 사람이 사라지면서, 졸지에 시간도 정지되고 활성도 더 이상 가동되지가 않는다. 대신 사람의 것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도시의 것과는 다른 활성이 가동된다. 다른 시간과 다른 활성, 그것은 어쩜 현실이면서 비현실이고, 현실의 일부로서의 비현실이고, 현실의 민낯을 증언하기 위해 호출된 비현실이고,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한 실재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폐허를 그린 낭만주의 그림에서와 같은 도시의 변방을 그리고, 도시의 끝을 그린다. 낭만주의 그림에서라면 세상의 변방이며 세계의 끝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도시변방의 소외를, 우수를,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