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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철주 / 몽유에서 몽중몽유로

고충환



근작에서 작가는 시점에 대한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다. 보통 시점이라고 한다면 그림 속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시점을 디스플레이에 적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공간 자체가 시점을 형식실험하기에 용이해야 하고, 그림 속에서와는 또 다른, 그림과 그림과의 관계며 그림과 관객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고도의 전시 공학적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벽 높이 건다. 그림을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거나 기울게 한다. 그리고 나아가 아예 바닥에 깔린 그림도 있다. 전시장 내부에 가건물과 같은 구조물을 만든 연후에 마치 실내에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과 같은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런 시점의 다양한 예시와 적용은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프레임에 갇힌 허구적 상황을 넘어 현실공간으로 확장시켜주고 현실성을 획득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현실성은 풍경화이기에 더 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전시공간을 현실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며, 현실 속에서 풍경을 체험하는 것과 같은 추체험을 유도한 것이다. 전시공간이 현실공간은 아님을 생각한다면 연출이 매개되는 일종의 연극적 상황논리가 재현되고 작동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그 상황논리에 힘입어 작가는 꿈에 본 풍경(몽유)으로, 꿈에 꿈이 포개진 풍경(몽중몽유)으로 초대한다.



신몽유도원도, 캔바스·아크릴릭, 130x300cm, 2011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크게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작가의 그림은 알다시피 통상 그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식이 아니라 벗겨내면서 그림을 그린다. 밑그림을 그린 연후에 씻어내고 닦아내고 지우고 문지르고 덧바르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다보면 형태가 어슴푸레 드러나 보이는 시점이 오고, 형태가 어떤 알 수 없는 아우라를 덧입고 존재감을 부각하는 지점이 온다. 그 시점이며 지점은 전적으로 감각적인 문제로서, 반쯤은 우연성이 만들어준 것이고, 절반은 그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만드는 작가의 역량에 속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풍경을 재현한다기보다는 풍경을 생성시키며, 형태 자체보다는 형태를 감싸고 있는, 어쩌면 형태가 발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래서 작가가 형태로부터 캐낸 것일지도 모를, 그런 분위기에 관심이 있다. 형태의 본성 내지는 형태의 생기, 아니면 형태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공기의 질감으로 볼 수 있겠고, 이 모두가 어우러져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안개가 자욱한 듯한, 눈발이 투명하고 희뿌연 베일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은 설산이 웅혼한 기질과 장대한 스케일을 드러낸다. 여기서 스케일은 화면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심정적인 문제의 층위에 속한다. 그렇게 작가의 설산그림은 심지어 작은 그림에서마저 크게 느껴진다.



생활일기(신몽유도원도), 캔바스·먹·아크릴릭, 194x518cm, 2007


작가의 그림에는 그렇게 우연성과 필연성이 상호 긴밀하게 작용한, 그리고 그 작용이 물성으로 고스란히 기록되고 간직된 그림이 있고, 그 그림 위에 또 다른 베일을 덧입혀 물성을 가라앉힌 그림이 있다. 한쪽은 즉물성과 즉발성이 강하고, 다른 쪽은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인상을 준다. 창호문이나 발을 통해서 사물대상을 한차례 걸러진 상태로 수용했던 전통적인 미의식이며 미적 감각을 재현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는 안개와 눈발, 그리고 발과 같은 베일이 등장하는데, 그 베일이 현실을 비현실로 만들고, 현실풍경을 꿈속정경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꿈속에서 본 설산(몽유)을 그렸다. 그리고 근작에선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렇게 꿈속에 꿈이 포개진, 또 다른 꿈속에서 본 설산(몽중몽유)을 그렸다. 그렇게 꿈속에서 꾼 꿈에 본 설산은 꿈이 겹겹이 포개진 것인 만큼 현실로부터 그만큼 더 멀어진 것일까, 아니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을 의미하듯 또 다른 현실일까.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현실이 혹 꿈(몽유)은 아닌지, 꿈속에서 꾼 꿈(몽중몽유)은 아닌지, 하는 회의와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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