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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이 / 비누거품에서 레고블록으로

고충환



비누거품의 추억.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누구나 한번쯤 유년시절에 비누거품 놀이를 하며 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불현듯 과거가 현재 위로 호출되는 경험을 프루스트효과라고 하는데, 이런 프루스트효과로 치자면 비누거품놀이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유년을 되불러오게 하는, 유년의 추억에 잠기게 하는 원초적인 경험이며 계기로 봐도 되겠다. 비누거품을 불면, 무지개 빛깔의 투명하고 영롱한 공이 눈앞에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그 생명력이 짧아서 잠시잠깐 떠 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그 공이 보고 싶어서 자꾸자꾸 비누거품을 분다. 여기서 무지개 빛깔의 투명하고 영롱한 공은 일종의 환영일 수 있고, 따라서 비누거품은 환영놀이일 수 있다. 그 공은 감각적 쾌감을 유발하지만, 감탄과 함께, 아니면 미처 감탄할 사이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그건 무슨 삶의 메타포 같고 알레고리 같다. 우리 모두는 삶의 의미를 찾지만, 그건 환영처럼 잠시잠깐 감각의 표면 위로 자기를 보여줄 뿐, 붙잡을 수도, 심지어 바라볼 수조차 없다. 어떤 현상(예컨대 삶)을 설명하게 해주는 궁극적인, 최종적인, 결정적인 바로 그 의미는 미묘하게 차이나는 의미들을 만들어내면서(다른 의미들로 대체되면서) 계속 미끄러질 뿐, 끝내 붙잡을 수 없다고 했다(자크 데리다의 차연). 비누거품도 삶의 의미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을 비누거품 같다고 했다. 무지개 빛깔로 투명하고 영롱하게 유혹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작가는 이 비누거품으로 유에프오를 그리고, 외계인을 그리고, 네시를 그리고, 설인을 그렸다. 하나같이 실체는 없고 풍문으로나 떠도는 존재(비존재)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존재(비존재)들을 그리면서, 사실은 실체는 없고 풍문(이게 삶이다, 아니면 저게 삶의 의미다, 하는 이야기)으로 떠도는 삶을 그리고 있었다. 


레고블록 도시 위로 비누거품이 흘러내리다. 그리고 작가는 비누거품에서 레고블록으로 옮겨간다. 작가에게 비누거품은 실체는 없고 풍문으로 떠도는 삶을 의미했다. 비누거품은 말하자면 삶의 메타포였고 알레고리였다. 그리고 그 메타포가 레고블록으로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된 것이다. 그림에서 작가는 레고블록을 한 장 한 장 쌓아나가면서 집을 짓고, 건물을 세우고, 도시를 만들었다. 레고블록은 말하자면 집의, 건물의, 도시의 최소단위랄 수 있는 벽돌에 해당한다. 그렇게 작가가 재현한 도시는 견고해 보이고, 꽤나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도시는 임의적이고 잠정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레고블록의 표면에는 요철이 있는데, 다른 레고블록과의 연결을 위한 것이다. 레고블록은 말하자면 그 자체 자족적이고 완결된 구조라기보다는, 그저 연결부위며 접속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레고블록을 쌓아 도시를 만드는 한, 그 도시는 항상적으로 임의적이고 잠정적이고 자의적인 상태, 미완성의 상태며 미결정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처럼 도시는 외관상 견고해 보이고 꽤나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 어떻게 해체될지 모르고 재구조화될지 모른다. 


그렇게 잠정적인 해체며 재구조화 가능성을 떠안고 있는 도시 위로 비누거품이 흘러내린다. 여기서 비누거품은 견고해 보이는 도시가 그 이면에 숨겨놓고 있는 미완성의 상태며 미결정의 상태, 임의적이고 잠정적이며 자의적인 상태, 불안정성의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도시가 숨기고 싶은 민낯이 표면화된 것 같고, 상징계의 허구를 폭로하기 위해 되돌아온 실재계의 출몰 같다(자크 라캉).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에서처럼 친근한 도시가 졸지에 낯설어지고, 그 이율배반(친근한 것이 낯설어지는)이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자아낸다(프로이트의 언캐니). 예수는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하는 만사가 헛되다고 했다. 흔히 일을 망쳤을 때 곧잘 수포(물거품)가 되었다고 한다. 레고블록 도시 위로 비누거품이 흘러내리는 작가의 그림에는 삶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자기반성이 반영돼 있다. 


미궁 속에서 길을 잃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동궐도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그림들을 그렸다. 동궐도란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그림으로, 전통적인 가옥이 목조인 탓에 혹 화재로 소실되더라도 원형 그대로 재건할 수 있게 했다. 요새 식으로 치자면 건축 설계도면으로 보면 되겠다. 당연하겠지만 작가는 이 동궐도 그대로를 옮겨 그렸다기보다는, 다만 그 구조만 가져와 자기 식으로 각색한 것인데, 그 각색 과정에서 원래는 없는 부분을 더하기도 하고, 점차 원형과는 거리가 있는 자기만의 그림으로 변주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각색되고 변주된 그림을 보면 세부가 생략된, 오직 최소한의 구조만으로 축조된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 먼저 화면 가득히 모눈 혹은 격자패턴을 그리는데, 그 위에 축조될 구조물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그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위에 역시 레고블록을 쌓아 벽을 만들고, 통로를 만들고, 문을 만들고, 길을 내고, 길을 막는다. 부감법으로 그려진 동궐도 자체도 그렇지만, 이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무슨 미궁 같고 미로 같다. 그래서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미궁이라고 부른다. 


주제와 관련해보자면, 미궁은 작가의 그림이 동궐도를 그 원형으로 하는 것인 만큼 궁을 상징하고 삶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미로 같은 궁의 이면에는 자기를 숨기면서 드러내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고, 길이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열린 듯 닫혀있고 닫힌 듯 열린 삶의 아이러니가 가동되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회학적인 맥락(권력문제)에 그리고 존재론적인 맥락(삶의 아이러니)에 연동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중층화된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권력과 관련해보자면 권력은 자기를 숨기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동방식에 기초하고 있고(이를테면 판옵티콘에서 감시자는 피감시자를 볼 수 있어도, 피감시자는 감시자를 볼 수가 없다), 미궁은 그 작동방식에 부합하는 적절한 형식이 되어준다. 


그리고 삶의 메타포로 치자면, 격자구조를 정교하게 그리고, 그 격자구조에 맞춰 레고블록을 반듯하게 쌓는 행위가 탄탄한 삶의 구조를 흉내 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다만 겉보기에 탄탄해 보일 뿐인, 허술한 그리고 억압적인 삶의 구조를 풍자한 것이다. 그 구조가 허술한 것은 레고블록이 그렇듯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란 점이고, 잠정적인 해체와 재구조화의 가능성을 떠안고 있는 미완의 그리고 미결의 상태란 점이다(혹자는 이런 미완의 그리고 미결의 상태를 자유의지라고 할까). 그리고 그 구조가 억압적인 것은 그렇게 축조된 결과가 미궁이며 미로로서 현상한다는 점이다. 삶이 꼭 그렇다. 무리 없이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 삶은 다만 단위구조간의 긴밀한 결속 탓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 결속을 지지하던 단위구조 중 하나가 빠지면 다 무너진다. 언제 레고가 도미노로 변할지도 모른다. 도미노는 말하자면 레고의 잠정적인 불안이다. 그래서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야 한다.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미궁이고 미로다.  


그런가하면 대개 궁은 한 번에 그 완전한 형태며 구조가 건축되지는 않는다. 이러저런 이유로 인해 부분적으로 파손되고 증축되고 개 보수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구조에 이른다. 그래서 작가는 서로 그 건조시기를 달리하는 부분 부분을 각각 빨간색 점이며 파란색 점 그리고 노란색 점으로 그림 위에 표시했다. 그렇게 구별해 그 차이를 시각화했다. 여기서 색점은 다른 건립시기를 표시한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주로 무채색으로 나타난 무미건조한 화면에 시각적인 변화며 리듬과 같은 형식적인 재미를 더한다. 때로 색점은 색점보다는 좀 더 큰 색공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그 색공이 마치 구조물 위에 떠다니는 풍선 같다. 미궁으로 나타난 삶의 구조 위에 부유하는 비누거품 같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제도의 관성을 흉내 내고(아마도 빨갛고 노랗고 파란 색 사인펜으로 등기등본 같은 서류에 체크하고 표기할), 시간을 도입하고, 허무를 재 호출한다(비누거품은 환영이고, 삶의 메타포다). 특히 작가가 제도의 관성을 흉내 내는 것(이를테면 미궁을 공들여 쌓는 것)은 그 관성에 부합하기보다는, 그 관성에 내재된 부조리를, 억압을, 불안을 드러내고 폭로하기 위해서이다. 


색은 또 있는데, 부분적으로 적용된 파란 색면이 인공호수며 연못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림의 주제가 미궁임을 생각하면 함정을 암시할 것이다. 막다른 길에 잘못 들어서면 허방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지하 혹은 땅속으로 연결된 표면이 설핏 보이기도 하고, 배경화면에 채색된 붉은 색조가 핏빛 권력의 실체를 암시하기도 한다. 작가의 그림은 무미건조할 정도로 치밀하고 치열하고 견고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는 레고처럼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고, 비누거품처럼 잠시잠깐 눈앞에서 아롱거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고, 미로처럼 막다른 길에 갇힐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레고블록 구조물을 쌓으면서, 집짓기와 문명화의 과정을 흉내 내면서, 사실은 미궁 속에 갇힌(그리고 아마도 비누거품처럼 덧없는) 삶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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